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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하루키니까, 또 평들도 엄청난 것 같고, 슬쩍 훑어본 내용도 흥미로울 것 같아서 시작했다. 이 작가의 다른 책을 그리 많이 읽진 않았지만 어쨌든 <상실의 시대>의 하루키류와는 소문대로 많이 달랐다. 달랐지만, 여전히 읽는 즐거움을 주는 하루키. 이번에는 문체보다도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만큼 처음부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 끌고간다.
덴고와 아오마메를 엇갈리면서 한발짝씩 나아가고 있는데 1권은, 4월에서 6월까지의 기간. 10살 때 한 순간의 섬광과도 같은 순간을 깊게 공유한 둘은 이후 엇갈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속에는 상대가 각인되어있지만, 그걸 의식하고 있는 아오마메와 봉인하고 있는 덴고의 각자의 형편이 전개된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스스로의 시간을 채워가는데 그 둘은 달리 어찌할 수 없이 서로 한 군데로 모이고 있다..는 것. 덴고는 덴고대로, 아오마메는 아오마메대로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이 빽빽하다. 둘, 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뿜어내는 포스는 하도 강렬해서 저절로 읽는 내게도 힘이 들어간다. 게다가 너무 많은 수수께끼들. 하나씩 풀려나가기도 전에 하나씩 덧붙여지며 긴장을 높인다. 작가의 책중 표현처럼, '하나의 감옥에서 멋지게 빠져나온다 해도, 그곳 역시 또다른 좀더 큰 감옥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 트릭이 중첩된다.
그날 밤도 달은 두 개였다. 둘 다 보름달에서 이틀분만큼 이울었다. 아오마메는 브랜디 잔을 손에 들고,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퍼즐을 바라보듯이 그 크고 작은 한 쌍의 달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 조합은 점점 더 수수께끼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달에게 묻고 싶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갑자기 너에게 저 초록빛 작은 동반자가 딸리게 되었느냐고. 하지만 물론 달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달은 누구보다 오래도록 지구의 모습을 근거리에서 보아왔다. 아마도 이 지상에서 일어난 현상이며 행위 모두를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은 침묵한 채 말을 하지 않는다. 한없이 차갑게, 적확하게, 무거운 과거를 품어안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공기도 없고 바람도 없다. 진공은 기억을 아무 상처없이 보존하기에 적합하다. 어느 누구도 그런 달의 마음을 풀어낼 수 없다. 아오마메는 달을 향해 잔을 치켜 들었다.
"요즘 누군가와 껴안고 자본 적 있어?" 아오마메는 달에게 물었다.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는 있어?" 아오마메는 물었다.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쿨하게 살아가는 거, 이따금 피곤하지 않아?" 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쿨하게 살아가는 것, 더이상 쿨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아오마메가 그렇게 말한다. 달은 침묵. 그러나 하루키의 책에서는 침묵조차 그저 소리하나 없이 고요한 것이 아니다. 침묵 자체가 뭔가를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많은 순간 아오마메에 경탄하고, 때로 공감한다. 세계의 기묘함에 대해, 노부인의 말처럼 만일 우리가 단순히 유전자의 탈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째서 우리 인간 중 적지 않은 자들이 그토록 기묘한 형태의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 우리가 심플한 인생을 심플하게 살고, 쓸데 없는 건 생각하지 말고, 그저 생명유지와 생식에만 힘을 쏟으면, DNA를 전달한다는 그들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될 게 아닌가. 인간들이 복잡하게 굴절된, 때로는 너무나 이상하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 유전자에게 과연 어떤 메리트가 있다는 것일까.
이 책을 읽다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고 일상 다반사의 나날을 살아가는 나-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실 그저 유전자의 탈것일지도 몰라, 싶은 생각이 덜컥 든다. 이 책의 인간들은 어찌나 굴절된 종류의 삶을 살아가는지.. 가슴이 쿵쿵거릴만큼, 놀랍다. 어찌됐든 그토록 기묘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오마메는 독백한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기묘한 것일지라도, 일그러진 것일지라도, 그것이 나라는 탈것carrier의 존재 방식이다.
쿨하다. 달보고 '그렇게 쿨하게 살아가는 것, 이따금 피곤하지 않아?' 했던 아오마메는 실상 달만큼이나 쿨하고, 사는 건 그만큼 피곤하다. 그래도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자신의 길이기에 간다는 것. 아오마메는 이 소설의 분위기를 강하게 휘감고 느와르로 이끌어간다. '소설에는 이런 인물이 있어야만...' 실은 1권을 덮고 나니 이런 말을 할 여유가 생긴다. 1권을 읽는 동안에는 아오마메에게 휘둘려, 감지덕지하면서 그녀의 쿨하고 터프한 매력에 끌려 다니기만 한 걸.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다든가, 뭔가 엇갈려버려 다른 곳으로 들어와버린 '장소'라기보다는 '시간'이라는 개념, 모호하지만 그러니까 덴고의 입을 빌어 말하는 바, 시간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정이다.
인간의 뇌는 최근 이백오십만 년 동안 그 크기가 약 네 배로 증가했다. 무게만으로 보면 뇌는 인간의 몸무게의 2퍼센트를 차지할 뿐이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체의 총 에너지의 약 40퍼센트를 소비한다. 뇌라는 기관의 그러한 비약적인 확대에 의해 인간이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과 공간과 가능성의 관념이다.
시간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덴고는 알고 있다. 시간 그 자체는 균일한 성분을 가졌지만, 그것은 일단 소비되면 일그러진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떤 시간은 지독히 무겁고 길며 어떤 시간은 가볍고 짧다. 그리고 때때로 전후가 바뀌거나 심할 때는 완전히 소멸되기도 한다. 있을 리 없는 것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인간은 아마도 시간을 그처럼 제멋대로 조정하면서 자신의 존재의의 또한 조정하는 것이리라.
1Q84라는 낯선 시간, 아직 1권만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2권까지 보면 상쾌하게 알 수 있을까? 글쎄..) 이 일그러짐과 상관이 있지 않겠는가. 흥미로운 시간, 탐구대상으로 삼기에도 버거울 인간들,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도대체 하루키가 어떻게 이 소설을 풀어갈 지 기대가 만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