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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쟁이 톨로키
자케스 음다 지음, 윤철희 옮김 / 검둥소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아프리카 문학을 접한 건 최근의 일이다. 생각해보면 그림책으로 말고는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었다. 맨처음 나이지리아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그리고 2부에 해당하는 <더 이상 평안은 없다>를 읽었다. 이어 남아공의 루이스 응꼬씨의 특별한 소설 <검은 새의 노래>를, 그리고 이제 자케스 음다의 <곡쟁이 톨로키 Ways of Dying>를 읽은 것. 지금까지의 아프리카 문학 작품들이 모순적이지만 대개 그러하듯, 이 작품은 1995년에 영어로 출판되었다. 지금은 망명하여 미국에서 영문학부 교수인 지은이가 만일 이 작품을 아프리칸스어로 썼다면, 아직은 결코 세계적인 작품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역시나 씁쓸하다. 하지만 아프리카 문학을 번역한 많지 않은 책 중에서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모순에 기댄 행운이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으니.
책은 기이한 톨로키의 생을 따라간다. 어린 시절의 톨로키와 어른인 톨로키가 교차한다. 어린 시절의 톨로키의 생에도 죽음이 있고, 어른인 톨로키의 생에도 죽음은 지천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간극을 더듬어보면, 어린 시절 톨로키의 주변에 널려 있던 죽음은 대개 자연적인 것이었다. 병에 걸리고, 물에 빠지고, 늙어서 죽는 그런 죽음들. 하지만 지금 톨로키의 주변에 널린 죽음들은 거개가 비명횡사다. 총에 맞아 죽고 폭력적으로 불에 타서 죽고, 싸우다 죽고.. 어쨌든 정치, 사회적인 죽음들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황이 그러했다.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자연사하기도 어려운..존엄한 죽음이란 생각도 해보기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맞고 누군가 휘두른 칼에 맞고, 누군가 지른 불에 타서 죽게 되는 상황이라니. 비극적인 생존의 방식이고 죽음의 방식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의 원제가 바로 그거였다. 그렇구나.
모두들 죽는다. 그리고 죽음과 더불어 살아간다. 톨로키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무시, 차별, 왕따를 당하고 결정적으로 아버지에게 철저히 거부당하고 짓밟히지만, 어느 날 홀로 집을 나와버림으로써 스스로를 더이상 누군가에게 매인 채로 살아가게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의 생을 택함으로써 그는 존엄성을 잃지 않는다. 그는 비범하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평범하거나 혹은 특별히 딱하게 보인다. 비범과는 반대의 특성... 그의 특별한 외모, 그의 과묵함, 부모에게조차 무시당하는 자식의 입장 등이 그를 하류 인생으로 단정짓게 만든다. 그러나 톨로키는 늘 자신의 길을 찾고 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이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숱한 역정을 거친 뒤에 그는 자신의 특별함을 자신의 생존 방식으로 삼게 된다. 남에게서 슬픔을 끌어내는 특별한 능력.. 모두가 애도하는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을 더욱 더 신랄하고 신산스럽게 느끼게끔 하는 곡쟁이의 역할이 그것이다. 호상이 고인의 생을 풀어 젖히는 긴 시간 사이에 톨로키가 곡을 하면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더욱더 슬픔을 느낀다. 그는 마치 수도승과 같이 숭고한 마음으로 이 생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을 쓴다.
톨로키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고향 마을의 노리아가 있다. 노리아는 타고난 마술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 신비로운 영감을 부여하는 노래를 하는 여자아이, 모두가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기쁨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힘을 가진 아이였다. 그 여자아이의 신비롭고 특별한 능력은 톨로키 아버지에게 강력한 창조적 에너지를 불러일으켜 그들의 관계는 얽혀든다. 톨로키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또한 역시 노리아를 보며 기쁨을 얻지만 한쪽으로 일그러진 기쁨일 뿐이다. 노리아에게는 톨로키가 그저 불쌍한 인생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톨로키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깨닫고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최초의 어른이었다. 맹목적인 추종과 숭배에 가까운 톨로키 아버지의 특별한 구애는 노리아에게 자신의 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예견하게 한다. 이 무슨 비극적인 관계란 말인가... 그러나 톨로키가 집을 나가면서, 노리아는 노리아대로 새로운 관계로 발을 딛고 나아감으로써 비극은 거대한 비극적 힘을 더이상 유지하지 못한다. 이제 세 사람에게 각자의 삶은 각자의 방식대로 흘러간다. 어린 사람들은 자라고 젊은이가 되고 어른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어른이었던 톨로키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상실한 채 고스란히 죽음에 이른다. 그렇게 삼각관계는 어긋져서 더이상 삼각이 아니다.
톨로키는 폭동과 부패와 부조리로 가득한 남아공의 시간을 살아간다. 노리아도 마찬가지로 고난의 시간을 살아왔고, 살아간다. 그들은 너무나 상이한, 아니 정반대의 인생을 부여받아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듯한 생을 살아왔으나, 서른과 마흔의 사이 쯤, 인생의 절반 쯤에서 한 지점에서 만난다. 노리아는 마치 새벽부터 노을이 지기까지의 시간을, 톨로키는 황혼부터 여명까지의 시간을 살아온 것 같지만 그들은 결국 한 지점에서, 어떠한 가식도 허식도 없이 맨몸 맨마음으로 만난다. 그들의 앞선 인생 역정이 그토록 상이했으되, 이제 그들의 고갱이는 그토록 공명한다. 그들은 마치 음과 양이 필연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듯 그렇게 서로를 느낀다. 기구하고, 기이하다. 마술과 같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소는 신비적인 체험이기도 하다. 남아공의 처절한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이 신비로운 체험은 둔중함 가운데 예리한 아픔을 준다. 이 책의 마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독서 체험이다. 150쪽에서 156쪽까지 이어지는 정원 산책의 판타지는 절정이고 절창이다.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언제 어디서 달리 이런 순간을 체험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만 자케스 음다의 팬이 되어버렸다.
분명 아프리카에는 고통이, 아픔이 널려있다. 앞서 읽었던 책들에서 그것은 더욱 두드러져서 내게 우울한 확신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거기에 널린 것은 결코 그것만이 아니다. 그걸 깨닫는다는 것이 내게는 이 책을 읽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