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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이야기 - 아주 특별한 사막 신혼일기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야 알았지만, 싼마오는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라고 한다. 사실 그의 이력은 남달라서 흥미롭다. 이 책의 서문을 대신해서 붙인 어머니의 편지글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그이의 부모님은 '이해심 많은 부모님'이다. 유복하게 자랐지만, 획일적인 학교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힘겨운 소녀 시절을 보내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교육을 받았다는 것, 스물 네 살 부터는 세계 각국을 떠돌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떠돌이 생활 중에 문득, 어느 날 갑자기,
사하라에 꽂힌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사하라 사막의 사진을 보고 그랬다고 한다.
나는 늘 사막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내 말이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비교적 잘 이해해 주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막을 향한 내 마음을 속세의 무상함을 깨달아 더 이상 미련이 없는 거라고, 또는 스스로를 멀리멀리 추방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이 모두 정확한 견해는 아니었다.
다행히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분석하든 나 자신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막에서 1년쯤 살아갈 준비를 틈틈이 해 나갔다. 그녀와 사막의 관계는 그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 계획을 격려하는 사람은 아버지 뿐이었다,고.
아니, 실은 그 밖에 단 한 친구가 그런 그녀를 비웃거나 막지 않았고, 오히려 묵묵히 짐을 챙겨 먼저 사막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그녀가 홀로 아프리카에 갔을 때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한 거다. 그 친구가 사랑을 위해 사막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녀는 하늘끝 땅끝까지 한평생 그와 함께 떠돌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 친구가 바로 남편 호세였다. (대단한 러브스토리다..)
그러나 그럴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그녀가 단지 모험을 위해, 인생을 멋스럽게 겪어내기 위해서만 그곳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물론 사하라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챙겨준 목돈-꽤 컷던 것 같다-을 질끈 묶어 은행에 입금해 버리고, 남편 호세가 벌어오는 많지 않은 돈으로 생활을 하기로 하고(게다가 그 돈을 벌기 위해 그 역시 사막의 이방인이었을 스페인 사람 호세는, 정말 애처로울 만큼 열심히 일한다) 그가 구해 놓은 아마도 정말 허름했을 집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에게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고,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든든한 남편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에게는 낙천성과 위트와 아름다움을 스스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커다란 잠재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문명 인식은 확실히 남달랐고, 자유로웠다.
"여기가 라윤 시의 변두리야. 우리 집은 저 아래 있어."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구멍투성이 천막 수십 채가 줄지어 있었고, 함석으로 만든 작은 집들도 보였다. 모래땅 위에는 단봉낙타 몇 마리와 산양 떼가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드디어 짙푸른 옷을 즐겨 입는 민족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새로운 환상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바람결에 소녀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사는 곳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생기와 정취가 있었다.
생명은 이렇게 황폐하고 낙후되고 빈곤한 곳에서도 똑같이 무럭무럭 활기차게 자란다. 결코 생존을 위해 안간힘 쓰고 발버둥치지 않는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 생로병사란 이렇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노라니, 그들의 안온함이 우아하게까지 느껴졌다.
내 관점으로는,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생활이 곧 빛나는 문명이었다.
마지막 그 한 줄, 그 한 줄의 문장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명, 자연스러움에 대비되는 인공적인 그 무엇,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해온 그 무엇, 문명에 반하는 것이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온 인식의 틀을 깨버리는 한 줄의 문장. 그녀는 물질이 아닌 정신으로 문명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 자신 온갖 문명의 세례를 듬뿍 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그렇게 받은 물질의 혜택, 혹은 억압적인 교육 제도, 이런 것들에게서 그녀는 진정한 문명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문명이란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생활이었다. 소유와 집착으로 얽매여 있는 '문명세계'가 인생을 얼마나 좀먹어들어가는지를, 그녀는 알아채고 떠돌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녀의 문명이란 그래서, 사하라에서 발견한 자유로운 생활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내가 속한 이 아등바등한 세계가,
거기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안도감, 자신감과 함께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듯하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진정한 문명이 아닐 수도 있다, 는 것.
자유로운 생활이 곧 문명이다.
사하라 이야기에 실린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매이지 않은 그녀의 정신을 만난다. 거침없는 그녀의 행보는 거기 원주민들과 부딪치며 끌어안으며 자기 무늬를 만든다. 때로 이질적이며 때로 동화되며 만들어내는 무늬는 그녀만의 것이다. 살아온 삶의 방식을 포기할 수 없어- 책상을 만들고 소파를 꾸며놓고 살아가는 것도 거슬리지 않는다. 버려진 판자떼기를 갖고 만들어낸 가구들이 필요와 충분이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이 설산의 수도와 고행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필요하면 하고, 필요 없는 데는 매이지 말고, 그 모든 것을 떨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조차 자유로운 것, 그런 그녀가 자연스러웠다. 이질적인 세계의 간극을 그녀는 낙천성과 위트로 슬슬 걷고, 때로 뛰어다닌다. 그녀의 주변으로 마치 투명 빤짝이들이 통통 튀고 있는 것 같다.
'사막의 중국 반점' '의술로 세상을 구하다' '사막의 샘' '황야의 밤'
제목만 들여다봐도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소설도 꽁트도 아닌 생활의 기록인 산문일 뿐인데, 이야기들이 선명하다.
'불나비 사랑''풋내기 어부' '죽음의 부적''사막의 이웃들'들은 사하라위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이제 그녀의 말을 새기며 살아갈 날들이 남아있다. 나로서는 대단한 수확이다..
"나는 잘 알고 있어.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는 걸.
아주 진실한 한 번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날이 갈수록 안타까워.
더 용감하고 유쾌하게 인생과 대면하지 못한 게 참 아쉬워."
그런 그녀가, 48세의 나이로, 아마도 자살한 것 같다는 내용의 역자 후기를 보고는 정말 안타까웠다. 역시나 인생은 불가사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