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나리 보리피리 이야기 3
박선미 글, 이혜란 그림 / 보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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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야야가 살던 마을 뒷산 너머 애장골에 마치 커다란 별이 떨어져 내린 듯 피어나 야야의 애를 태우던 산나리에 얽힌 이야기이다. 봄이 되어 학교 화단에 알뿌리를 옮겨 심고 담장 아래로는 꽃씨를 뿌릴 때면 야야는 늘 여름이면 눈부시게 피어날 산나리 꽃을 생각하곤 했다. 하필이면 애장골에서만 피어나 한번 가보지도 못하고 먼데서 바라보기만 하던 산나리꽃.

    유난히 산나리꽃에 끌리는 야야. 장독간 옆에는 이미 접시꽃이 자라는데, 야야는 그걸 옮겨버리고라도 산나리꽃을 거기다 심어두고 보고싶다(나는 접시꽃에 더 끌리는데). 야야에게는 별같이 예쁘고 고운 나리꽃이고, 줄기와 잎 사이에 층층이 박히는 까만 구슬 같은 씨도 신기한 것이다(실은 ‘주아’라고 하고 내겐 좀 징그럽게도 보이던데). 유난히 검고 삐죽삐죽 모난 돌이 많은 애장골, 그보다 더 두려운 건 그곳에다 어려서 죽은 아이들을 무덤도 없이 가마니로 둘둘 말아 돌로 덮어 묻는다고 떠도는 말이다. 

  야야와 동무들은 드디어 마음을 굳게 먹고 애장골로 산나리를 캐러 간다. 온갖 흉흉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피어나는데도 꾹꾹 누르며 갔는데, 막상 산나리는 돌밭에 깊이 묻혀있어 쑥 뜯는 칼로 캐내기가 어렵다. 숨을 죽이고 끝도 보이지 않는 돌을 겨우겨우 들어내는데 누군가는 여기서 독사가 나온다더라 하질 않나, 어디선가 돌은 뚜구루루루 굴러내리고, 새는 푸드득 날아오르는데 갑자기 동무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산 밑으로 내달린다. 모두들 소쿠리고 칼이고 다 내던지고 덩달아 내달리는 장면이 말로도 그림으로도 얼마나 실감나는지! 그렇게 집까지 내달아 오빠에게 철푸덕 달려드는 장면(글과 그림이 좀 다르다), 그림이 절창이다. 야야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온 참이다. 고무신 한 짝이 벗겨져 달아나고, 발은 아직 공중에서 휘달리고 있다. 닭들이 혼비백산, 병아리도 줄행랑을 친다. 오빠는 엉겁결에 야야를 받쳐 안는다. 야야의 집 마당, 담장 아래 파가 졸로리 심겨져있고 이쪽 돌담에는 자전거를 기울여두었다. 그 뒤로 우물가 사람들, 저 아래로 멀리 펼쳐진 집들과 논밭들. 더 멀리 산이 보인다. 볼수록 캬, 멋진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 속 떨리는 일 뒤로 야야는 애장골의 산나리를 고마 잊었나 싶었는데. 

  그래도 미련이 남아 6학년이 되니 또 그쪽으로 눈이 간다. 여름 되도록 망설이다가 어느새 꽃필 때가 다 되었다. 꽃이라도 꺾어야지 벼르던 어느 날, 엄마에게 옆반 동무 순복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열세 살일 뿐인데! 외따로 사는데다 늘 조용하고 아이들이 재미삼아 놀려도 그냥 고개 숙여 쫓기듯 지나가버리던 아이, 야야까지 덩달아 놀렸던 그 아이가 안타까운 사고로 그만 죽었단다. 그 순복이도 애장골로 가버렸다. 야야는 갑자기 가슴 속에서 무엇이 ‘펑’ 하고 터지는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고 순복이를 놀렸던 일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이름 한 번 불려보지 못하고, 아이들이랑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놀림만 받던 순복이는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생각한다.

  해가 바뀌고 애장골에는 어김없이 산나리가 피어난다. 야야는 이제 더는 그 꽃을 꺾을 생각을하지 않는다. 안타깝게 죽은 동무 순복이와 어린 아이들이 자꾸 떠올라서이다. 그 슬픈 영혼들이 애장골 시커먼 돌밭 위에 별을 닮은 산나리 꽃으로 피어난다는 걸, 야야는 그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박선미 선생님은, 산 아래 작은 동네에 살던 야야를 품어 키운 건 그 작은 산이라 한다. 봄이면 삘기를 뽑아먹고 찔레며 오디를 따 먹느라 샅샅이 뒤지고 다니던 그 산, 소 먹이러 가고 밤 주우러 가고 겨울이면 비탈길에 눈썰매를 타고 내리던 그 자그마한 산. 그 산의 밝고 환한 기운을 먹으며 자라던 야야에게도 애장골의 기억이 있다. 길이 닳도록 오르내리며 놀던 산과는 달리, 뒤쪽에 떨어져 꺼멓게 돌로 덮인 애장골은 아이들이 멀리하던 어두운 곳이다. 얼라들이 무덤도 없이 돌틈에 묻혀있는 곳, 이름 한 번 다정하게 불러주지 않아 늘 혼자 고개 숙이고 다니던 옆반 동무 순복이가 가버린 그곳은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던 곳이다. 야야는 어쩌면 가까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그토록 산나리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이던 애장골이, 야야가 동무를 잃고 마음에 후회와 아쉬움을 담고 살아가면서는 회한이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간다. 기회를 놓쳐버린 안타까운 일들, 하지 말았어야 했던 그 많은 어리석은 일들, 그런 일들을 마음속에 쌓아가며 삶의 그늘을 알아가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살도록 풀지 못한 채 남아있던 그 한 가지를 이제 책으로 풀어낸 박선미 선생님의 마음은 그래도 쓸쓸하지만 조금은 가벼워졌겠지. 

  산나리 이야기를 쓰면서 야야는 순복이를 꼭 불러보고 싶었어. 살았을 때 한 번도 따뜻하게 불러 주지 못했던 그 이름을. 순복아! 내 동무야! 
 

  이혜란 작가의 그림도 볼수록 정답다. 야야는 <달걀 한 개>와는 살짝 얼굴이 달라져버렸는데, 이 책에서는 이 야야의 얼굴과 분위기가 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표지에서부터 별 같은 산나리를 말끄러미 바라보는 야야, 봄이 되어 알뿌리를 심는 아이들과 선생님, 유리창에 얼굴 갖다붙인 채 팔을 괴고 있는 야야의 모습 들을 보면서 글의 내용을 설명하는 이상의 감상에 젖는다. 애장골 검은 돌은 무섭게도 보이고, 달음박질쳐 내려가는 동네길도 생생하고, 야야가 엄마랑 참빗나무에 홀잎을 훑는 모습도 마치 보고 그린 것 같다. 그 뒤로도 여러 장의 그림에서 그림은 그저 글을 보충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생동감을 가지고 글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림만 찬찬히 들여다봐도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솔솔 풀려나온다. 야야의 <산나리> 이야기는 깡똥한 단발머리에 말간 눈의 야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런데 야야는, 이번에는 노랑 긴 팔 블라우스 하나랑 또 노랑 짧은 팔 블라우스 하나밖에 없는 걸까? ( <달걀 한 개>에서 야야는 줄창 분홍색 블라우스만 입었지 ^^) 홀잎을 훑을 때 야야가 세 번 다른 모습으로 나올 때를 제외하곤 이 책에서 야야는 늘 노란색 블라우스다. 야야는 역시 노란색도 그렇게 좋아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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