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의 짧은 여행에서 가장 잊지못할 음식이 일본 친구가 꼭 가보라길래 첫날 저녁에 바로 갔지만 웨이팅만 두 시간인 바람에 다음날로 예약해두고 다시 찾아갔던 야끼니꾸와 생맥주였다면(아 정말 입에서 살살 녹았다!), 가장 잊지못할 곳은 호텔에 들어와 씻고 유카타까지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려다가 아무래도 그냥 잠들기 아쉬워서 "한 차 더 가자!" "내 말이! 내일 피곤해서 고생하든 말든!"하고 극적으로 의기투합,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날듯이 밖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가 소박하고 조촐한 입구가 마음에 들어 무작정 문을 열었던 이자카야일 것이다. 왜 그런 곳 있잖아. 딱히 음식이 되게 맛있는 것도 딱히 스페셜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그 모든 것이 당시의 나의 기분과 마음상태와 딱 맞아떨어지면서 최고의 공간으로 바뀌는 곳. 한눈에 봐도 전혀 유명한 곳도 아니고 요즘 후쿠오카는 포장마차에만 가도 영어 메뉴, 심지어 한국어 메뉴도 다 있는데 그런 것도 전혀 없었고(없을 줄 알았다) 열 테이블이 채 안 되는데 그 중 세 테이블에 어느 정도 취한 내 또래의 사람들이 "마지데에에에에?!!!!" "조또 욥빠라짯단데스께도!" 라는 추임새를 사이사이 넣으며 취한 일본인 특유의 업된 억양으로 엄청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고 서버들은 그 시간에 갑자기 들어온 한국인 두 사람을 지나치게 반기지도 않았지만 은근하게 신경 써주는, '마시고 취하는 암자'라는 가게 이름답게 너구리 굴처럼 짱박혀 아늑하게 술마시기 참 좋은 곳이었다. 아마 너구리굴 같은 느낌을 주는 것에는 적당히 침침하고 적당히 작아서도 있겠지만 솔솔히 피어올라오는 담배연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명란 계란말이와 함박스테이크를 시켜놓고 서비스로 가져다준 닭요리도 앞에 놓고 쿠로키리시마 대신 주문한 시마비진을 연거푸 비워대며 세상에 뭐 아직도 그리 할말이 많이 남아있는지에 서로 놀라며 오래오래 이야기했다. 오래 전 요코하마에 살았을 때, 요코하마를 떠난 이후에는 어쩌다 일본에 출장다녀올 때, 가끔씩 HOPE를 사서 서랍 속에 넣어두었었다. 야자키 히토시 영화에서 이케와키 치즈루가 침울하게 꺼내 물어 피던 장면이 마음에 강하게 남아 일부러 찾아 사서 피웠던 날, 세상에 너무 독해서 게다가 사래까지 들리는 바람에 기침을 해대느라 네 모금도 다 못 피우고 껐었던 담배. 썩 좋은 첫만남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기분이 매우 울적하거나 말 그대로 희망이 다 날아가버린 것 같은 날에 이 독한 맛이 자꾸 생각났다. 그래서 늘 비상약처럼 한 갑 사서 서랍에 넣어놨었지. 어떤 때는 일주일만에 다 피운 적도 있고 어떤 때는 한 개와 그 다음 한 개 사이에 몇 개월이 흐르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에게 HOPE는 늘 아주아주 슬프고 아주아주 씁쓸하고 아주아주 절망적인 순간에만 꺼내드는, 그게 독한 기운이 됐든 담배 이름과 연결한 말장난 같은 희망이 됐든 나에게 뭔가 주문 같은 게 필요한 날에 내 아지트 같은 곳에 가서 혼자서, 꼭 혼자서 꺼내드는 담배였다. 시마비진 언더록을 네 잔째 주문했을 때였나. 문득 HOPE 생각이 났다. 그래, HOPE가 있었지! 일본, 담배를 필 수 있는 이자카야, 시마비진 언더록, 여행 마지막 밤. 너무 좋은 조건이잖아. 물론 제1조건인 '절망'이 빠져있기는 하지만 뭐 어때. 벌떡 일어나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근처 편의점에 가서 HOPE를 샀다. 아아 오랜만이야 호프. 담배를 끊기도 훨씬 전에 이미 어느 순간부터 HOPE를 찾지 않게 되었는데 그래서 마지막이 2009년이었지 아마? 취기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 담배갑을 보는 순간 저 담배갑 뚜껑을 열던 과거의 내 마음들이 스쳐지나가서, 그 씁쓸했던 순간들을 함께 넘었던 한 때의 회사동료를 객지에서 불시에 만난 것 같은 기분에 아, 나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했네. HOPE를 사들고 신나게 돌아와서 시마비진을 한 잔 더 시키고 정성을 들여 HOPE를 열고 한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내 평생 처음으로 굉장히 행복해서 피우는, 누군가와 함께 피우는 HOPE였다. 무척 좋은 밤이었다. 다음날 숙취로 매우 고생했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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