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스피노자와 연관시켰을 때 스피노자가 부각시킨 작용인과 스피노자가 질색했던 목적인개념이 흥미로웠다. 나도 많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촘촘한 결들을 목적으로 소급해버릴 위험이 다분한 목적론이 질색인데(‘먹고사니즘같은, 천박하지만 강력한 원인소급도 결국 이런 맥락), 과거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 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으로 삼는 것, 이 시간의 혼란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혼란이 흥미로웠다.

강의에서 목적인의 예로 든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는 사실 산책은 건강의 원인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목적인적인 논리로서 우리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으므로 건강이 산책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이미 산책이 건강의 원인이 된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기에 명사의 순서를 반대로 뒤바꾸어도 말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후자는 뻔하지만 전자는 나의 의지가 좀 더 강조되기 때문에 보다 능동적인 느낌이 나고, 거기에 시간을 살짝 헝클어놓는 맛이 나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재미를 위해 약간의 맥락을 지우면 건강의 결과가 산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살짝 비트는 표현, 재미있잖아.

게다가 건강 때문에 산책을 시작했다 같은 단순한 상황묘사에서 좀 더 나아가면 별 의미 없었던 과거의 어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여지조차 있다. 이를테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려고 그동안 (시행착오인) 연애들을 계속 해온 것 같다” “내가 (현재 너무나 의미 있는) 이 일을 하게 되려고 그동안 많은 기회들을 놓쳤나보다같은 것.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이나 후회나 회한으로 남겨진 사건들에, 그 당시에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기 위한, 나에게 커다란 충만함을 안겨주는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게 만든 결과라는 의미를 덧대면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조금 더 그럴듯해진다.

매력적이자 기만적인. 스피노자와는 다른 이유지만 역시 나도 목적인이 마음에 안 든다ㅋㅋ 하지만 그런 기만적인 위안이나마 적절히 섞는 게 필요할 때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 나 스스로가 목적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격하게 경계하되, 누군가의 목적인적 태도를 함부로 기만이라고 폄하하지는 말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2. 스피노자가 라틴어로 쓴 <소론>의 원본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했다고 하는데 누군가 이 책에 얽힌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나 로랑비네 풍의 소설을 써주면 좋겠다. 아 근데 둘 다 프랑스 작가들이네. 30대 초반까지만해도 나는 프랑스 특유의 어떤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특히 영화. 에릭 로메르 정도가 마지노선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취향이 조금 변한 것 같다. 심지어 미셸 뷔시 같은 프랑스 대중 추리소설도 좋아하기 시작한 걸 보면.

 

3. 자유개념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를 비판하는 의견들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일단 우연에 대한 여지를 두는 것과 자유의 여지의 상관관계에 커다란 의문이 있다. 그래서 비판자들의 “(스피노자는)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라는 의견을 들을 때 의아했다.

일단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라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물리는 어떤 법칙에서 벗어났을 때, 즉 톱니바퀴의 제약에서 벗어난 상태를 자유로 생각하는 맥락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아무 것에도 제약받지 않는 상태에서의 자유에 대해 평소에도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일단 나 스스로를 가장 많이 제약하는 것은 결국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유체이탈을 하지 않는 한은 뭐...).

차라리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에 맞닿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고작해봐야 예외’ ‘의외성정도가 아닐까(‘우연이라는 단어와 예외’‘의외성이라는 단어의 의미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만 봐도 나는 우연이 전제된 상황 뒤에 나올 결과에 대해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회의적인 것 같다. 뭐가됐든 우연뒤에 나오는 단어가 자유인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제약을 디폴트로 안고 살기 때문에 이 제약에서 잠시 풀려나는 순간, 혹은 이 제약이 원래의 시스템 트랙을 따라 돌아가지 않고 잠시 법칙에서 벗어난 경로로 빠질 때 의외성을 느끼고 이 예외적인 상황을 자유로 착각하기 쉬운 것 같다.

갑자기 제약이 사라져도, 그래서 우연이 발생해도, 자율적 역량에 따라서 그 제약이 사라진 상태가 자유에 가까운 상태로 바뀌기도 하고 더욱 속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일단은 우연자유의 잠재성을 포함한, 자유의 잠재태로서의 밀도가 더 진하다고 생각하느냐하면 그것도 솔직히 아니다. ‘자유의 잠재태로서의 밀도가 진한 건 외부적 상황보다는 내부적 상황인 것 같다. 제약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롭고, 제약 밖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니까. (물론 전쟁중이라든가 국가가 선포하는 거시적 제약에 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냥 세속적 의미로서의 평범한상황에서)

아무튼 비판자들의 의견을 들었을 때 이미 동의할 수 없었으므로 앞으로 나올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대가 된다.

 

- 스피노자에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연적인 게 없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체계에서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필연적으로 규정이 돼서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정론 철학이다, 필연성 철학이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이런 비판들이 상당히 많이 제기된다

- 그래서 어떤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주 실천적인 비일관성이 있다”, 한편으로 필연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를 굉장히 강조하는. 그런데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 그러니까 스피노자 철학은 비일관적인 철학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다수는 아니지만 꽤 있다.

 

4. 3번까지를 메모해 놓고 나서야 이사야 벌린의 자유개념에 대해 들었다. 맞다, 이런 분류가 있었지. 그래, 자유라는 개념은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인데 나는 나대로의 자유개념만을 가지고 다른 자유개념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리고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 모두 어느 것 하나에 더 동감한다고 고를 수 없을 정도로 골고루 다 동감했다. 번호가 다른 골프채들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앞에 놓인 상황에 따라 골라서 빼어들. 하지만 "적극적 자유"의 개념,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를 들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가장 마음이 크게 반응했다는 점은 솔직히 고백하겠다...


 

*** Negative liberty & Positive liberty

 

-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개념을 가장 명료하게 분류한 사람은 바로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 그가 1958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정치사상사 석좌교수로 취임하면서 했던 굉장히 유명한 강연이 있는데 바로 자유의 두 개념에 관한 강연이다. 거기에 나오는 자유의 두 개념이 굉장히 유명한 개념이다. NL(소극적 자유) PL(적극적 자유)

- 이사야 벌린 같은 사람은 자유개념의 진짜 핵심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생각한다. 소극적 자유말로 진짜 자유의 핵심이고, 자유주의의 규범적인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뜻은 아주 간단하다. 간섭을 받지 않는 것. 간섭이 없는 것. 그래서 흔히 이것을 “~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liberty from-

-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특히 자유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자유개념의 핵심은 이 소극적 자유개념이다. 어떤 장애물이 없거나 간섭하는 게 없을 때 그때를 두고 우리는 자유롭다라고 한다. 이사야 벌린이 이런 소극적 자유개념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존 스튜어트 밀과 칸트를 꼽았는데, 실제로 존 스튜어트 밀이나 칸트보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의미의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하고 명시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다. 바로 홉스

홉스가 자유 개념을 정리할 때 딱 그렇게 정의한다. “장애물이 없는 것이 자유다물체가 운동을 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으면 계속 운동을 하지 않는가? 그에게는 이게 바로 자유다. 장애물의 부재.

 

- 이사야 벌린은 스피노자나 루소는 PL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적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는 Liberty to- ~을 향한 자유/~로 될 자유/ ~을 할 자유.

-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

- 그런데 이사야 벌린은 이 적극적 자유를 아주 위험한 자유 개념이라고 말한다.

 

- 신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 : 1990년대부터는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철학도 나오는데 그게 바로 신공화주의. Pettit 페팃 교수는 이 신공화주의의 주창자. 그는 자유의 반대 개념을 지배와 예속이라고 정의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연구하는 미국의 석학이다. 그는 원하는 일을 뜻대로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권리가 침해당할 가능성(지배, 예속)이 있다면 완벽한 자유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 왜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르는가. 이걸 주창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고전적인 공화주의자들과 다르다. 고전적인 공화주의는 positive liberty를 수반한 자유주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화주의는 형식적 자유개념에 입각한 공화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네오 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장: “자유주의는 우리와 다르다, 자유주의는 간섭의 부재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지배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비지배야말로 negative liberty의 핵심이지, 간섭의 부재만으로는 부족하다.”

 

5. 데카르트의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는 문구를 듣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혼자 살짝 웃었다. 신의 무관심이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라는 말에도, 인간의 어떤 특성을 신에게 투사해서 신을 설명하는 오류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의 투사들이 너무 1차원적인 투사였다면, 이 투사는 약간 레이어가 있는 투사라서 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인간세계에서 무관심은 전능함의 증거기도 하지. 목적인적 논리도 첨가할 수 있다. 전능해서 무관심할 수 있기도 하지만(그러니까 무관심의 원인은 전능함) 좀 더 전능하기 위해서는 무관심해야하기도 한다(전능의 원인은 무관심). 무관심할수록 승리자가 되는 그 많은 상황들.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에게서 바로 나온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뜻은 아니고 좀 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데카르트 철학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네 번째 성찰에서 그는 의지는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 즉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고, “여섯번째 성찰에서는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뒤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6.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저기에서 그리고 신학자자리에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다. 사주나 별자리 같은 미신, , luck, 그밖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능을 부여하는 것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렇게 주석까지 붙여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개념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인 이유와도 직결되어서기도 하다. 마치 신을 인간처럼, 인간과 같은 의지를 갖고 있고, 왕국의 법률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없앴다 무시했다가 내키면 권한을 실행할 수도 있는 왕처럼 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반박. 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대중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된다. 내 기도를 들어달라면서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며, 스피노자가 보기엑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신의 말을 아무나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신의 말을 전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목사나 신학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누구의 권력이 커지는 것인가. 목사나 신학자들이 그 수혜를 입는다. 대중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이나 삶을 개척해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고 하는 대신에 전능한 초월자에게 다 맡겨버리려고 의지하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스피노자가 보기에 신을 인간이나 왕 같은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결국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게 되고 절대군주와 결탁한 신학권력을 정당화하게 되고 백성들의 미신과 무지를 강화하게 된다. 이게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논박하려는 주요 타깃이다.

 

저런 문제의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이런 논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원인은 필연적인 원인이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사물들을 생산하고 행위 하는 자유원인으로서의 신.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17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건조한, 형이상학적 이야기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정치적 윤리적인 함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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