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4에서 신의 관념에 대해 따라 나온다라는 표현을 쓴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애매한 표현이다. 이걸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냐면, 구약성경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가 누구를 또 낳고... 이런 식의 기원, 기원을 따지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원이 없다고 말하는 스피노자의 근본철학과 맞지 않는다. 신의 관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창조론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 나온다는 말을 마치 시간적으로 어떤 큰 강의 원류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피노자의 의도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다. 그렇다면 따라 나온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을 소쉬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구조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는 뭔가 책을 써서 유명한 게 아니라 강의록 때문에 유명해진 사람인데(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제외하면 생전에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강의가 끝나면 자신의 강의 노트를 잘게 찢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습관마저 지니고 있었다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강의노트를 모아서 책으로 냈다. 소쉬르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부각된 것이 <일반 언어학 강의>인데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하려고 했던 작업을 두고 보통 사람들이 처음으로 구조 언어학을 만들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이 구조언어학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언어학/기호학이다. 그러니까 소쉬르는 언어학/기호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언어학.

 

<일반언어학 강의>를 보면 소쉬르가 언어학/기호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데 가장 장해가 되는 것으로 꼽았던 것이 언어의 목록주의적 관점이다. 언어를 마치 목록처럼 사고하는 것. 그 목록이라는 것은 사물들에 대한 명칭의 목록. 언어를 마치 사물들을 지칭하는 목록들의 집합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목록주의다. 왜 목록주의가 근본적인 장해물일까.

 

언어가 목록의 집합이라고 했을 때 거기 깔려있는 생각은 언어는 사물들을 지칭하는 기호, 명칭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이렇게 기호나 명칭으로 본다는 것에는 또 무슨 생각이 깔려있냐면 언어보다 사물이 앞선다’, ‘언어 이전에 사물이 미리 있다라는 것.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원래 있는 거 맞지 않나? 원래 미리 있잖아? 대상의 질서가 인식 주관의 질서에 따른다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떠올리게 하는 전환인데, 예전에 칸트에 대한 학위논문 심사를 할 때 교수들이 실제로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아니 근데 밖에 이미 진짜 있잖아? 주관 이전에 실제 세계에 있는데 무슨 소리야. 근데 맞다. 실제로 있다ㅋㅋㅋ 언어 이전에 사물이 있다.

 

소쉬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언어 이전에 사물이 먼저 있고, 언어라는 것을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지시하는, 인간이 서로간의 약속에 의해서 이것은 산이라고 부르자, 이것은 달이라고 부르자 라고, 사물의 질서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목록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언어는 학문이 될 수 없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든 도구, 기술일 뿐인데, 그런 도구에 학문이라는 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소쉬르가 자율적 학문으로 언어학을 구성하려고 할 때 이 목록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의 주장은- 언어 이전에는 질서가 없었다. 카오스였다. 언어 이전에는 산, 바다, 달로 구별해서 지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가 사물의 질서를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야 언어학이 비로소 학문이 된다. 왜냐면 이것을 통해 세계의 질서, 사물의 질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언어 기호는 하나의 이름에 하나의 대상을 연결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기호를 결합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시니피앙과 시그니피에로 구별했다. 매우 간단한 구별 같지만 굉장히 대단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정리다. 시그니피앙은 청각이미지, 시그니피에는 관념. 내가 나무(시니피앙)“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관념(시니피에). 정리18의 주석에 가면 소쉬르랑 아주 비슷한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기호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사물 같은 것은 없다. 소리와 소리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관념이 결합하는.

 

더 나아가 소쉬르는 기호라는 것은 하나하나가 따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쉬르의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체계라는 개념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호라는 것은 체계다. 우리가 목록주의적인 관념을 벗어나면 당연히 기호나 언어는 하나하나 성립하는 게 아니다. 다른 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구성되는, 변별적 차이가 낳는 것이 언어랑 기호다. 우리가 나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일반 개념으로서의 나무(참나무도 있고 너도밤나무도 있고), 풀하고 구별되는 개념어로서의 나무, 또 동물과 구별되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그 결과 구조언어학에서는 당연히 통시성이 아니라 공시성의 측면으로 언어를 보게 된다. 공시성synchrony은 같은 시간, 일정 시점에 존재하는 언어의 상태와 구조, 통시성diachrony은 시간에 따른 언어의 흐름. 그러니까 구조언어학에서는 언어의 기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 언어가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같은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아동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말 못하겠지만, 그래서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말을 배울 때 단어를 하나, 두 개, 세 개 이렇게 순차적으로 배울지, 언어를 형성하는 어떤 규칙이나 체계를 동시에 배울지, 그런 것도 생각해볼만한 것 같다. 어쨌든 구조언어학에 의하면 언어의 기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언어는 동시에 생겨날 수밖에 없다. 소쉬르는 이런 공시적인 언어의 집합을 랑그langue’라고 불렀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공시적인 집합.

 

구조언어학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관념이 말하자면 랑그와 비슷해서다.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는 말은 신의 관념이 기원이라든가 최초의 원인이라든가 시원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관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틀이라는 이야기다. 신의 관념으로 인해 모든 관념이 가능하다. 신의 관념을 통해 모든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의 관념 없이는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인식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장의 경우에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이 이렇다. 운동과 정지의 법칙 없이는 신체나 물체의 작용이 가능하지 않다. 운동과 정치의 법칙에 의해서 물체가 행위를 하고 서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념들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신의 관념이라는 사고의 틀, 인식의 틀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관념이다. 그러니까 따라 나온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최초의 원인에서 무언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관념들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스피노자 철학의 성격에 잘 맞는다.

 

그럼 스피노자는 17세기의 구조주의인가ㅋㅋㅋ 스피노자는 구조주의보다 훨씬 역동적인 철학자다. 스피노자는 신의 관념만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인, 사유의 역량 등의 이야기를 하니까. 이 이야기가 바로 정리5와 정리7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관념이라는 관념이 성립할 수 있는 틀, 그 틀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작용, 아주 역동적인 인과작용이 존재한다고 봤다. 아무튼 신의 관념이라는 게 17세기 철학의 문법에서는 굉장히 생소해보일 수 있지만 따져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아이디어와 통하는 바가 있다.

정리5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곧 신의 속성들 및 독특한 실재들에 대한 관념은, 관념의 대상들 자체, 다시 말해 지각된 실재들을 원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실재로서의 신 자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 관념들이 표상하는 대상으로서 보는 게 아니라,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로서의 관념.

- 사유속성.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사유속성을 통해 나타나는 신이 바로 관념들의 원인이다.

 

증명 이는 2부 정리3으로부터 명백하다. 우리는 정리3에서 신은 그가 자신의 관념의 대상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본질 및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하여 관념을 내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이나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이는 다른 식으로도 증명된다.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의 양태다(자명한 것처럼).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에 의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의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며, 따라서 (1부 정리10 ”하나의 실체의 각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에 의해) 다른 어떤 신의 속성의 개념도 함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부 공리4에 의해) 그것은 다른 어떤 속성도 아닌 오직 사유 속성의 결과일 뿐이다(관념들끼리의 인과관계는 사유 속성 안에서). 따라서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 대상이 우리를 자극해서 관념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눈앞의 컵을 인식한다. 컵이라는 물체/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컵이라는 대상이 여기 있으니까. 컵이라는 대상이 촉발돼서 내가 이것을 지각한 것. 그렇다면 컵이라는 대상이 원인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컵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

 

-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사유속성의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 : 1부에서 봤듯이, 스피노자에게 있어 인과관계라는 것은 같은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끼리만 가능하다. ,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은 관념끼리, a속성은 a속성끼리 인과관계가 있다. 속성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즉 신체는 정신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정신은 신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형상적 존재로 고려된 관념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신

다른 관념들을 생산해내는 관념들 (= 신의 속성 안의 관념들)

 

* 스피노자는 왜 자연법칙이라고 쓰지 않고 이라고 썼을까.

 

스피노자가 기독교신학적인 용어법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두고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게릴라 전술이다라고 말했다ㅋㅋㅋ 적진에 들어가서 적으로 단장하고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다. 만약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법칙’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어휘를 갖고 이야기했으면, 스피노자 적수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쟤하고 나는 어차피 노선이 다르니까, 쟤는 아예 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니까 각자 갈길 가자. 그런데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신이 무한하시고, 신이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고, 마치 교조적인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아주 철저한 신학적인 어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학하고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적의 진지 속에 들어가서 파괴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신학의 어휘를 쓰지 않았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훨씬 쉬웠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어휘를 쓰지 않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논쟁의 목적, 논쟁의 효력을 생각해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쓰는 어휘를 같이 써야 논쟁이 될 테니까.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만들지 않은 사람이다. 물론 무한양태, 직접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이런 말들은 다른 철학자들은 쓰지 않았던 어휘니까 하나도 안 썼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스피노자가 쓰는 대부분의 개념들은 다 다른 철학자들이 썼던 것들이다. 데카르트라든가 홉스라든가 스콜라 철학이라든가. 그들의 언어들을 가져다 쓰면서 그 의미를 뒤집어 버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대체 신을 찬양하기 위해 쓴 건지 헷갈리게 썼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스피노자는 아주 효과적으로, 적수들의 언어로 적수들의 철학적 틀을 흔들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의 구조주의 철학자들 가운데 스피노자에 주목한 사람들이 꽤 있다. 대표적으로 들뢰즈. 들뢰즈는 구조주의를 한편으로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 구조주의를 좀 더 다이나믹하게 변형시키고 싶어 했었다. 알튀세르. 그 역시 구조주의의 중요한 문제의식에 동의는 했지만, 구조주의가 너무 형식주의적이고 정태적이니까 만족하지 못했다. 그걸 가지고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을 가져온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에 나중에 라깡의 사위가 되는 자크-알랭 밀레도 그렇다. 자크-알랭 밀레는 라깡의 <세미나>를 비롯한 라깡의 모든 지적 성과를 관리하는 책임자이기도 해서 다른 나라에서 라깡의 책을 번역하는 것을 허락할지 말지도 관리하고, 한국어판 책을 낼 때도 다 직접 감수하고 있다. 그 말은 자신의 제자 아니면 번역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자크알랭 밀레는 알튀세르의 제자였는데 라깡이 프랑스 정신분석학계에서 쫓겨나 오도갈 데 없는 시절에 알튀세르가 라깡을 초빙해서 강의를 하도록 해준다. 이때 라깡이 했던 첫 번째 강의가 그 유명한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개념에 대한. 이 세미나 강의를 할 때 자크알랭 밀레가 단연 눈에 띄었다. 라깡이 다른 데서 강의할 때는 들어보지 못한 질문을 하는 걸 보고 강의를 마친 라깡이 알튀세르에게 편지를 쓴다. , 네 제자 되게 똑똑하다ㅋㅋㅋ 그래서 알튀세르가 라깡에게 자기 제자 몇 명을 붙여주는데 그 중 하나가 자크알랭 밀레였다. 자크알랭 밀레는 60년대에 이런 개념을 쓴다.

 

구조의 작용/ 구조의 행위

구조화하는 작용/ 구조화되는 작용

 

스피노자의 철학의 용어법,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을 가지고 와서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 개념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인과 결과가 들어가면서 가령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이 굉장히 다이나믹해진다. 60년대에 이런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전에는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60년대-70년대 프랑스 철학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인 원천을 준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정리6 ”각 속성의 양태들은, 신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을 원인으로 갖는다

 

- 각 속성의 양태들: 가령 사유 속성의 양태들로서의 관념

- 다른 어떤 속성: 가령 연장 속성

-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가령 관념은 사유속성의 양태를 이루므로, 관념들은 사유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의 원인을 갖는다.

 

증명 왜냐하면 각각의 속성은 다른 것들 없이 자기 자신에 의해 인식되기 때문이다(1부 정리10에 의해). 따라서 각 속성의 양태들은 다른 속성이 아니라 자신의 속성의 개념을 함축한다. 따라서 (1부 공리4에 의해) 이 양태들은, 신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을 원인으로 갖는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가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이는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준 바, 관념들이 사유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 실재들이 그것들 자신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도출되기 때문이다.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 가령 연장속성에 속하는 물체들

 

*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

-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 아니라 무한 양태라는 것, 곧 사유속성의 결과라는 것(1부 정리17의 주석 만약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1부 후반부에서 비판 했던 창조적 지성을 다시 한 번 비판하는 것이다. 제빵사가 미리 이걸 만들어야겠다고 구상-> 창조, 이런 식으로 미리 한 구상에 따라 물질들을 구성하는 것이 창조적 지성이다. 이것은 따라 나온다를 기원의 의미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비판하는 것이다.

-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가령 사유 속성 안에서 관념들이 생산되는 방식은 연장 속성 안에서 물체들이 생산되는 방식과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

 

-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사유속성에서 양태가 따라 나오는 것처럼 동일한 필연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속성에서 다른 양태가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따라 나온다는 말이 앞에서처럼 기원에서 따라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관념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물질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속성a에 속하는 a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이 모든 게 동일하다. 동일한 인과관계, 동일한 산출의 방식.

- 그러니까 신이라는 것은 동일한 인과 법칙에 따라서 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산출한다는 것이다.

- 정리5가 사유속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정리6은 이것을 모든 것으로 확장했다

 

- 1부 정리17의 주석 중 만약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지성은,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지성, 곧 만물을 창조하는 것으로서의 지성, 창조적 지성이라는 뜻.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니콜라 말브랑슈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 탐구>

 

- 정리31에서 주목할 만한 두 번째 지점: ”지성이라는 게 산출된 자연이다라는 것. 스피노자는 이미 정리17의 주석에서 지성도 의지도 신의 속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못 박듯이) 이야기 했다. 신의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상당히 긴 주석에서 이른바 창조적 지성 창조적 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라 말브랑슈까지해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정리31에서 그는 유한한 지성만이 아니라 무한한 지성까지도 신의 절대적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산출된 자연에 속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 정리17의 주석 강의 노트 일부분:

 

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님

- 스피노자가 논박하고 싶어하는 적수들의 주장: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의지와 지성이다 > 그러니 신의 그것은 그보다도 더욱 무한할 것이다 > 그러니 신의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지성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다!

- 신의 지성과 의지, 곧 무한지성과 무한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나중에 가면 나오지만 스피노자에게 지성과 의지는 무한양태이다)

 

2-1) 신의 지고한 의지야말로 신의 전능함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지금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가진 사람: 잠재적 인식자

지금 인식하는 것을 수행중인 사람: 현행적 인식자

- 신을 옹호하는 스피노자 적수들의 주장: 신은 (무한지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것을 현행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무한의지를 통해) 그걸 하나하나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게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신이 인식하는 대로 모든 것을 계속 창조해야한다면, 당연히 지성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신의 자유의지가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대로 다 창조해야한다는 당위에 제한을 받는 자유의지는, 이미 자유의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걸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게다가 그들의 관점에서 신이 인식하는 대로 계속 창조를 한다면, 남아있는 비장의 뭔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고, 신의 전능함을 폄하하는 것 아닌가. 신은 인식하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되겠다고 의지하는 것만 창조하신다(결국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가 없을 때는 필연적 법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함도 전능함에 들어가고, ”의지로서 필연적 법칙을 위배하고 거스르는 것도 전능함에 들어가니, 의지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것만 창조한다고 주장)

 

-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의 전능함은 여분을 남겨두고 부분만 수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현행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다. 신이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해놓고 나서는 무언가는 창조하고 무언가는 창조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거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깎아먹는 것 아닌가. 신의 잠재적 역량, 현행적 역량을 나누는 것을 스피노자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전능함인가.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있고, 발휘되는 능력이 있는 게 무슨 전능함이야.

- 스피노자에게 전능함이라는 것은 막 흘러넘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풍부함이고 전능함이지 뭐가 부족해서 아껴뒀다가 나중에 꺼내 쓰고ㅋㅋㅋㅋ 이런 게 무슨 전능함이냐는 이야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가 10년 입산수도를 하고 어느 날 해 뜨는 아침에 나와 해를 보면서 , 풍요로운 태양아, 너 어떻게 그렇게 나랑 비슷하냐ㅋㅋ 너 넘치도록 풍요로운 태양아 세상만물을 다 너의 열기로 빛으로 넘치도록 가득한 빛으로 비추는 태양아, 나의 지혜가 바로 그렇다. 내 지혜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제 나눠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전능함은 이렇게 넘치도록 주체할 수 없이 매순간 발휘되는 것이다. 넘치도록 만들어내는 게 전능한 거지, 아껴놓다가 나중에 풀어주고 그런 게 무슨 전능한 것인가.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전능함은 영원히 현행적이었으며, 영원히 같은 현행성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전능함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관념이 확립되게 된다. 더욱이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반대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무한하게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 만약 그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들에 따를 경우,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모두 소진시키고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너무 소심한 생각이다. 다 써버리고 고갈된다는. 상당히 생태주의적인 생각. 신의 전능함이라는 건 너무 넘쳐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매순간 만들어내는 것인데 너희들은 그게 고갈될 까봐 두려워하다니 신의 전능함에 대해 못 믿는 건 혹은 반대하는 건 너희들 아니냐) 따라서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도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2-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름만 같을 뿐,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과 신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르다.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 여기서도 그렇다. 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의지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비교하고 있다. 양자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지성은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아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는 신이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중세철학 근대철학의 또 다른 신학자들은 신의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지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냐면-

-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성/정신 바깥에 있는 어떤 현실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에는 항상 사물/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사물/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사물이나 대상을 인간이 나중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지성보다 먼저 있는 사물을 전제한다.

-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하면 representation. 인식이라는 것은 represent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프리젠테이션한다, 무엇을? 여기 present에 있는 presence, 현존하고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우리의 지성 안에서 다시 representation 재현하는,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인식이다. 인간의 인식의 성격.

 

- 그렇다면 신의 지성은 어떨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만약 인간의 그것과 같다면, 신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사물이 있어야한다. 그러면 그 사물은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신 이전에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는 인식이다. 그러니까 원형으로서의 관념이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에 입각해서 신의 의지가 창조를 하는 것이다.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원형으로서의 관념은 일종의 모델이다. 우리가 건물을 짓거나 어떤 것을 만들 때 모형을 만들 듯이,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 신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형, 이 시계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신의 의지. 그러니까 신의 관념= 신의 인식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실재라는 게 먼저 있고-> 실재 다음에 지성이 인식하고-> 그래서 실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사물이 먼저 있고 지성의 인식이 있다)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뭔가를 새롭게 처음으로 구상하고 처음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이 신의 지성이니까 신의 지성자체가 창조적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라는 테크니컬한 텀이 쓰였는데

-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과 지성과 독립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인간이 인식한다 = 인간이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즉 리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표상적으로 인식한다“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표상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오브젝티바. 뜻은 by representation. ”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이것의 본질을 지성 안에 담는다라는 맥락에서. 영어로는 objective지만 흔히 쓰는 객관적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 , 오브젝티바=표상적: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다는 뜻.

- 이게 바로 objective essence라는 말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 <에티카> 영역본에 objective essence라고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이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신의 경우에는 관념이 먼저 있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있고 그 관념으로부터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는 거니까.

-, 신의 경우: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먼저 있고-> 그것에 입각해서 신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그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에 합치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나중에 온다는 것.

-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는 이런 이야기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그걸 모델 삼아서 사물이 형상적 본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요약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증명해보겠다.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그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이름만 같지, 본질은 전혀 다르다. ? 우리 인간의 지성은 사물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사물의 표상이 있으니까. 사물의 재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니까. 하지만 신의 경우,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먼저 있고 여기에 입각해서 사물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념이 먼저 있고 거기서 formal essence를 가진 사물들이 창조된다, 이 이야기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인식되는 한에서의 신의 지성은 사실은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다.“ <- ? 이때 신의 지성은 사물들을 창조하는 지성이니까.

 

-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말브랑슈 Nicholas Malbranche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이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탐구>

 

- 이어지는 스피노자의 논점. 신의 지성이 실재들의 본질과 실존의 원인이기 때문에 신은 본질과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실재들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원인지어진 것(결과)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것이 원인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인해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 원인이 되는 것과 그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말.

- 이것은 정리29의 주석과도 연결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다르다. 소산적 자연은 항상 능산적 자연의 결과지 원인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항상 원인일 수밖에 없다. 원인-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두 자연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정리17의 주석에서 만물이라는 것이 산출된 자연을 가리킨다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고, 이 경우 만물과 신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인 것이다.

- , 신의 지성은 우리 지성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며, 따라서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성은 이름 말고는 우리의 지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의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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