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강의들이 그랬지만 22강은 특히 내가 이런 강의를 매주 듣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무척 감사했던, 살다보면 이런 강의들을 만나는 날들이 있구나 세상에는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파고들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하구나 싶은 생각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꽉 채웠던, 그런 강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강의라 그 어떤 날보다 몰입도가 커서 끝나고 나니 마치 2시간짜리 중요한 PT를 혼자 진행하고 나온 직후의 상태가 되어 홀가분한 마음에 술을 마시며 신나게 놀았다. 새벽까지 이날의 수업과 스피노자 이야기만 계속 했던 것 같다.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에 대해 평소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존재론-신학적 의미,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정치학적 의미로 나누어서 살펴봤던 것도 좋았고, 그러는 와중에 잠시 뻗어갔던 다른 철학자들의 세계와의 접점을 살펴봤던 것도 좋았고, 번역에 대한 선생님의 조용한 분노ㅋㅋ와 그에 따른 고민도 좋았다.

 

존재론-신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는 항상 현행적인 힘이지만(신은 항상 능동적일 뿐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의 인간의 문제가 되므로 인간은 신처럼 항상 능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현행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 대신에 이 포텐샤가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되는 코나투스로 표현되고, 그러면서 포텐샤가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의 문제가 되는 것, 그래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가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쟁점을 갖게 되는 것, 그 쟁점의 핵심이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의 문제이며, 이것이 던져주는 목표가 인간의 수동적인 정서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동성을 얻는 길이라는 것. 이렇게 죽 이어지는 흐름이 참 좋았다. 그 이전까지는 나도 포텐샤와 포테스타스를 막연하게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텐샤와 포테스타스가 그 원 개념의 코어는 유지한 채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의미를 얻어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이 두 단어의 세계가 내 안에서 확장되면서 좀 더 살아 움직이는 개념들로 다가왔다.

 

그런데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이 주장한 신체에 대한 정신 내지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은 들을 때마다 마치 요즘 시대의 노오~~!” 만능주의 같아서, 이건 또 다른 맥락 내지는 지나치게 1차원적 대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많은 사회구조적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고민을 덮어버리고 개인의 삶을 수동화 보수화시키는 노오~~!이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신체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를 반비례로 생각하면서 했던 말 중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믿는다는 조금 흥미로웠다. 학문적인 흥미는 아니고 그 예로 든 게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 그러니까 수다스러움과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하는 문제여서. 뭐야, 너 비밀 지키기로 해놓고 안 지켰어? 역시 넌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해! 이런 거 중22한 먹물 룸펜 캐릭터의 대사로 꼭 써보고 싶다ㅋㅋㅋ

 

그러면 상대방은 아니,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한 게 아니라 나의 코나투스의 발현이었을 뿐이었어라고 대답하는 캐릭터여야겠지?ㅋㅋㅋ 지난 강의에서 선생님도 이야기하셨지만 이런 부분들이 정말 프로이트나 행동심리학의 이론들과 비슷한 것 같다. 그냥 부주의해서 한 실수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비밀을 발설해버린 것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냥 한 말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리고 대개 그 무의식은 욕망과 바로 이어져있다. 저 위의 상황, 수다스러움이나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대입해서 데카르트와 비교해보니 스피노자의 해석이, 가상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인과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고 꼬집은 것이, 인간들의 자유의지의 허상을 지적한 것이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8년인 지금도 아직도 한 인간의 행동을 두고 데카르트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아닌 게 아니라 엊그제도 친구와 결국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동시에 누군가의 욕망과도 관계를 맺는 것과 같고, 그 욕망과 어떻게 지내는지가 결국 관계를 결정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욕망을 빼놓고는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존재론-신학적 의미,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와 포테스타스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정치학적 의미를 따라가는 과정이었다. <을의 민주주의>의 어떤 부분들도 겹쳐서 생각났고, 시에예스의 pouvoir constituantpouvoir constitué를 거쳐 벤야민을 거쳐 네그리, 우리의 네그리ㅋㅋㅋ 그래도 네그리의 포테스타스 노선과 포텐샤 노선을 나눠 근대사회까지 관통하려드는 패기어린 담론도 흥미로웠다(이런 사람은 절대 정치가가 되면 안 될 것 같다....). 법 정초적 폭력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정의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선생님의 예로 드신 민족 해방운동을 통해 독립을 이뤘지만, 제국주의를 물리쳤더니 독재를 맞이하고 내전에 휘말려 더 큰 비극을 겪는 나라들도 그렇고(제국주의에서 독재로 빠지게 되는 맥락들을 다시 생각해보니 새삼 너무나 씁쓸했다) 한국 현대사도 그렇고 당장 페미니즘 운동부터가 그렇고 개개인들의 개인사만 살펴봐도 포텐샤가 포테스타스가 되었을 때 단지 제헌적‘ ’제정적의미로서만이 아니라 내면의 본질도 포테스타스가 되는 경우들, 너무 많으니까.

 

그나저나 역능같은 너무나 기괴한 말로 한 분야에서 이어져오는 말의 계보를 흐뜨려버리는 거, 내가 학계 사람이었으면 진짜 질색했을 것 같다. 예전에 석사논문 쓸 때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외국 원서보다 한국 학자들의 박사논문이 읽는 게 훨씬 어려웠다는 점이다. 물론 공부를 시작한 게 외국이었다보니 전문 용어나 전문 개념들을 애초에 영어로 익혀놨기 때문에 번역된 용어나 개념들이 눈에 익지 않아서도 있었겠지만 너무나 생경하고 대체 왜 이렇게 번역했지?? 싶은 용어들이 너무 많았다. 언어의 계보가 그렇게까지는 상관없는 그쪽 분야도 그랬을 진데, 철학 같은 학문은 번역 하나가 좌우하는 것이 너무나 많을 것 같다. 특히 한국의 학계 규모에서는 더욱. 그래서 가끔 선생님이 단어 하나를 두고 고민을 하시거나 이건 왜 이렇게 번역을 하는 게 좋은지에 대해 설명해주실 때 좀 좋다. 저 단어를 최근 몇 년 갑자기 보신 것도 아닐 텐데 아직까지, 최소 몇 년 길게는 십 몇 년 이상의 두께를 가졌을 고민을 내비치실 때 반성도 좀 하게 된다. 한 땀 한 땀을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기우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기울 옷이 없더라도 어쩐지 내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역량이라는 번역에 대해 강의록 마지막에 덧붙이신 글이 무척 좋았다. 역량이라는 단어에 이런 세계가 숨어있는지 몰랐다. 너무나 당연한 듯 가져다 써온 역량이라는 단어에는 과학혁명의 시기에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해온, 심지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까지 양적인 세계 안으로 들여놓기 위해 노력해온 철학자들의 뜻에 대한 존중과 리스펙트도 함께 담겨있는 거였다. 학자로서의 당연한 고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거 좀 멋지다고 생각한다. 대문자P와 아포스트로피에 달라붙어있는 고민 같은 것.

 

<<< 우리가 포텐샤를 역량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이나 실재성” “완전성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완전성의 정도또는 포텐샤의 차이”(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비교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날의 잊지 못할 피날레. 정리4의 미스테리. 최근 몇 년간 머리를 풀가동해서 풀어봤던 수수께끼 중 가장 근사한 수수께끼 아니었을까. 평범해 보이는 정리4의 저 한 문장을, 단어들의 배치를 살짝살짝 바꿔가며, 정체를 감추고 조용히 숨어있던 대명사 하나하나를 파헤쳐 수면 위로 올려놓아가며, 미스테리한 문제적 문구로 조금씩 만들어나가던 선생님의 추리를 따라가며 약간의 서스펜스마저 느꼈다.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나의 안일한 생각: 아니, 신으로부터도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니까, 그냥 관념도 아니고 바로 그 대단한 신의 관념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1부에 나왔던 정리들과 슐러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비교 대조해보니 검은색 물감이 묻은 두꺼운 붓으로 도화지를 슥슥 그은 자리마다 흰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밑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이상한 점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특히 신의 관념의 자리에 한 쌍으로 볼 수 있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운동과 정지를 놓고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까지 따져볼 때는 브라보! 외치고 싶었다ㅋㅋ

 

이렇게 평범해보이던 문장이 의문투성이의 수수께기가 됐는데 그 실마리를 찾아오는 곳이 <에티카>의 다른 정리나 주석도 아니고 하필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초기저작인 <소론>의 한 페이지라는 점도 너무 극적이지 않아? 무슨 고문서에서 실마리를 찾아 암호해독하는 것도 아니고ㅋㅋ 게다가 그 열쇠가 표상적으로였다니 진짜 좀 감동받았다.

 

저 문장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서 그 답까지 찾아가는 이 과정 전체와 그 답이, 철학을 잘 모르고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해봤다 싶은 경험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이런 게 철학의 매력인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수수께끼의 답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지만, 표상적으로 보면 모든 것은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가, 내가 처음에 했던 안일한 생각인 아니, 신으로부터도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니까, 그냥 관념도 아니고 바로 그 대단한 신의 관념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와 언뜻 보면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다ㅋㅋㅋㅋ 하지만 이제 알지, 저 두 문장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형이상학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 정말 아름다웠다 정리4의 미스테리.

 

정리4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정리4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신의 관념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관념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스피노자 용법대로 하면 신의 관념은 직접적 무한양태니까 다시 바꿔서 말해보자.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에티카 원문을 봐도 대명사로 표현되어있지 지정이 되어있지 않다. 일단 1) 상위개념인 실체나 속성은 아니라는 것, 2) 양태로부터는 양태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무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만 따라 나오기 때문에 유한양태도 아니라는 것(무한한 것에서 유한한 것이 나온다라고 하면 이건 그 이전의 창조론으로 가야한다ㅋㅋ)

- 그렇다면 무한양태인가? 그런데 그러면 또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는 결론이니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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