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의 위대한 점은 그가 저 필연의 영역, 경제에 대해 비판을 시도했다는 점, 그것도 필연의 영역에 대한 힘없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자본의 필연적 법칙 그 자체를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저 자본의 운동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붕괴에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밝히는 방식의 비판을 시도했다는데에 있다.

 먹고 사는 문제로서의 경제의 영역이, 그 어떤 비판으로부터 면제받고 있는 오늘날 마르크스의 '비판'의 방법은 그 어느때보다 더 음미해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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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프르트에 있던 발터 벤야민 아키브가 베를린에 있는 예술 아카데미로 옮겨오고 난 후 처음으로 5월 30일 월요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에선 발터 벤야민 아키브가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거기엔 발터 벤야민이 프랑스로 떠나면서 베를린에 남겨두어야 했던, 그리하여 1933년 게스탸포에 의해 압수된 원고들과 1945년 베를린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가 이후 1957년 동 베를린에 보관되어오던 원고들, 그리고 1940년 벤야민이 파리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을때까지 지니고 있다가 이후 그가 죽은 이후 우여곡절 끝에 아도르노에게 도달된 원고들, 또한 아래에서 소개한 바 있는, 1940년 조지 바타이유에 의해 파리 국립도서관에 숨겨져 있다가 전후 부분적으로 발견된 원고와 이후 1981년 이탈리아 철학자 죠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발견된 원고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벤야민 아키브에 근거해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는 2007년부터 매년 두권씩 총 20 권에 해당되는 벤야민 전집 Kritische Gesamtausgabe를 발간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새로 발간되는 벤야민 전집 역시 Shurmap 출판사에서 출간되며 Christoph Gödde,와 Henri Lonitz 가 편집과 발간을 맡게된다. 새롭게 발간될 이 벤야민 전집은 이전의 Rolf Tiedemann과 Hermann Schweppenhaeuser에 의해 발간된 벤야민 선집 Gesammelte Schriften 과는 달리 판형을 확대하고,모든 페이지마다 벤야민이 손으로 쓰고 또 고쳐쓴 수고를 직접 함께 인쇄함으로써 벤야민 원고의 육체적 흔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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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내게 독일어는 나를 전 세계의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는 ‘만국 통용어’다.

여기서 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대만 등에서 온 아시아인은 물론, 프랑스, 영국, 스페인, 헝가리 등 유럽인, 러시아, 터키, 그리스, 이집트, 수단, 모로코, 페루 등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모두 독일어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독일어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말 한 마디 나누어보지 못했을 이 다양한 나라의 많은 사람들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언어 같다.

나처럼 학업을 위해서건, 일 때문에 머무르는 직업인이건 타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자의식을 통해 같은 처지의 다른 외국인들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동류의식을 갖는다. 이러한 동류의식은 그러나 그들 사이의 서로 다른 피부색,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의 이질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그저 막연한 동정으로만 머물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질성과 차이를 넘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언어가 있을 때 비로소 동류의식은 하나의 구체적인 연대 감정으로 발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통의 언어는 그들을 이방인으로 만드는 바로 그 타국의 언어다.

언어가, 한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를 그와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구별시킴으로써 배타적 소속감을 강화시키는 매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로 인해 언어는 인종과 종교의 차이와 더불어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촉발하고 유지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는 또한 문화 간 대화와 이해의 매체로 기능하기도 한다. 반목하고 경쟁하며 눈을 흘길지도 몰랐을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태어나 자라난 곳의 모국어가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를 통해 국경을 초월하는 연대감을 경험한다는 것이 좋은 예다. 여기서 언어는 배타와 차이가 아니라 결속과 통합의 역할을 한다.

케밥 가게의 맘 좋은 터키 아저씨는 독일인에겐 어림도 없는 덤을 아시아인에게 주기도 하고, 베트남 상점 아줌마는 외국인에겐 물건값을 깎아주기도 한다.

주말이면 집 앞 놀이터에선 불가리아의 빅키와 중국아이 올리버, 러시아 출신의 자미르, 포르투갈 태생인 아드리아나, 팔레스타인의 모하메드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우리 아이들과 평화롭고 사이좋게 뛰논다. 집에선 각자 모국어를 쓰는 저 아이들을 서로 어울려 놀 수 있게 하는 것도 저 마법의 언어 독일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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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5-05-15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에게는 마법의 언어가 일본어라서 그걸 못봐주는 인간들도 있지만, 세계 곳곳에 일본어 좀 하는 사람들이 꼭 있더라구요.

김남시 2005-05-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어와 관련해서 저도 재미있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 군대시절 청주 근교의 한 허름한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는데, 군인으로 보이는 미국인들이 그 가게에 들어왔었지요. 재미있었던 건, 그 중 한 명이 영어로 가게 주인 아저씨에게 무언가를 물어보자 50대 중반의 그 가게 아저씨는, 전혀 꺼리낌없이, 거기에 "일본어"로 대답하더군요!! 그 아저씨에게 자신을 다른 외국인들과 통하게 해주는 언어는 바로 "일본어" 였던 거지요. 그 아저씨에겐 자신이 알고있는 유일한 '외국어'인 일본어가 모국인이 아닌 '외국인' 모두와 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통로'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황당해 하던 그 미국인들은 아저씨의 유창한 대답을 듣고는 곧 자리를 뜨더군요.
 

구지 미셀 푸코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지식은 역사적으로 늘 권력을 수반해왔다. 고대 사회의 제사장은 자신만이 신에게로 이르는 통로를 독점함으로써 그 사회 속에서 배타적인 권력을 누려왔다. 중세의 수도원은 일반인들에겐 다가갈수 없는 지식들을, 언어를 통해서, 혹은 종교적 금지를 통해 차단하고 독점함으로써 그 지식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권력에 참여해왔다. 특정한 지식이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힘으로 전화해 실질적이자 물질적 권력으로 전화한 경우를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프랑스 혁명의 사상가들에게서 나아가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에서 경험한다. 지식은 그에대한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힘으로 전환되고, 그를통해 실지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인터넷의 등장과 더불어 지식이 권력과 물질적 힘으로 전환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은 엄청난 규모로 단축되었다. 한권의 책이 혹은 사상과 이념이 출판되어,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읽히게되는 시간을 인터넷은 제거해버렸다. 이제 누군가의 생각과 이념과 지식은 인터넷을 통해 거의 실시간에, 그것도 출판된 책과는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전파된다. 이를통해 인터넷은 지식과 권력 사이에 놓여있던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한계를 제거해버렸다. 누군가의 생각과 이념은 이제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에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공간적 범위로까지 확장되어 그를 권력화시킨다.

권력화되는 지식은 사람들의 인정을 필요로한다. 인터넷은 그 어느 매체보다 저 권력을 지향하는 지식들이 얼마나 타인의 인정에 의존되어 있었던 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돈벌이가 아니라, 자신의 정보, 지식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와 사진들을 모아 공개한다. 단 한번의 클릭으로 이루어지는 추천혹은 댓글이라는 형태로 인터넷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지식과 그렇지 못한 지식을 가시화시킨다. 인터넷을 통해 인정받은 지식은, 그를 인정한 사람들을 통해 또다시 전파되고, 확산되고, 그를통해 그 지식과 그 지식의 제공자는 인터넷 속에서의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게 얻어진 권력은 그 지식의 제공자에게 공짜 영화표를 혹은 공짜 책이나 연극표를 제공하게도 하며, 책을 출판하거나, 오프라인에서의 사회적 진출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게도 하며,  나아가 실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위나 데모의 형태로 물질화되기도 한다. 인터넷이 이전 시대의 독점적인 권력을 해체하고 분산시켜, 보다 민주주의적인 권력과 소통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는 초기 인터넷 예찬자들의 유토피아에 내재되어 있던 아나키즘의 이상은 여기에서 좌절되게 된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인터넷은 지식을 탈권력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지식과 권력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를 현격히 단축시킴으로써 지식의 권력화에 더 기여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속에서 권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분산되어 편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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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5-0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지금 지그프리트 J. 슈미트의 [구성주의 문학체계이론]을 읽고 있는데, 님의 글과 관련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물론 이전에도 님의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앞에 제가 언급한 책을 읽으면서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좀 정리가 되면, 다시 코멘트 하겠습니다. ^^; 근데, 이거 추천해야 말아야 되나 망설여지네요. ㅋㅋ 그래도~
허걱, 아래 페이퍼에 루만이 나오네요! 이, 이게 대체 뭔 일이래요? @,.@ 시상에나~

김남시 2005-05-03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슈미트를 읽고 계시군요. 루만의 시스템 이론은 사회학보다 오히려 문학이론이나 미디어 이론에 더 생산적으로 적용 된다고 생각합니다. 슈미트는 그런 점에서 시스템 이론의 적용에 아주 큰 역할을 한 인물이지요. 구성주의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분이 생겨서 기쁘군요.

'추천' 고맙습니다 ^^
 

대학시절 세미나 교재 중 하나였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서문엔 이 책을 저자의 지명도와 제목만 보고 구입했을 독자들을 위한 경고 - 내게 그건 '조롱'으로 느껴졌었는데 - 가 쓰여있었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따위의 실용적 지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 인간관계에 대한 철학적 숙고를 다루고 있음을 마치 변명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책이 바로 그 '제목'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많이 팔리는 책 중의 하나가 되고 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이 책 역시 그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저명한, 세계적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저자와 Passion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선정적 제목'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고도 추상적인 시스템 이론의 주창자 루만의 이 책이 몇판을 거듭할 수 있게 했다.  

루만에 의하면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의 비개연성 (Unwahrscheinlichkeit)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가 만들어낸 소통의 코드다. 그리고 이는 특히 서구에서 18세기 이후 커뮤니케이션의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열정과 낭만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의미론으로 발전했다.

18세기 말엽 소통이 개인화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 관찰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세계연관의 준거점으로 삼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는 유용하고, 가치있는 사실들에 준거하는 대신, 그러한 사실들 혹은 사태들이 개인에게 갖는 개인적, 사적 의미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이처럼 소통이 개인화됨에 따라 서로 관찰할 수 있는 전달된 정보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통은 그 한계에 봉착하고 힘들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루만에 의하면 새로운 ‚상징적으로 생겨난 소통매체’인 ‚사랑’을 등장시키게 된 원인이었다. 사랑이라는 소통의 코드는 이제 사람들에게 관찰될 수 없는 타인의 ‚체험’의 차원을 관찰이 아닌 추측과 소망 등을 통해 추구하게끔 만든다.  

열정이자 열병, 광기, 기적, 설명되지 않는 그리고 이유없는, 불가항력의, 한마디로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법칙과 사회적 통제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있는 이런 사랑의 코드가 사회 속에서 용인되고 특별한 지위와 위치로써 미화되고 찬양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루만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러한 특별한 소통적 코드인 사랑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소통적 매체라는데에서 찾는다. 사랑은 그를통해 정체된 소통을 활성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사회의 유지와 재생산에 기여하는 소통적 코드라는 것이다.

만일 사랑을 다만 성적욕구와 성적 본능의 충족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소통 코드로부터 그것의 광기적, 열정적, 비이성적, 충동적, 설명되지 않는 불가항력적 감정이라는 의미론을 제거해버린다면, 사랑은 애초에 사회의 소통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소통적 매체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상실해버릴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회는 사랑이 이처럼 비이성적, 광기적, 충동적 의미론을 통해 기능하기를 원한다!

사랑이 일상적인 관찰과 소통의 차원에서는 요구되지 않는 상대, 즉 타자의 체험의 차원에의 동참을 요구하는 코드라고 한다면, 섹스와 육체적 접촉은 이러한 코드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유기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관찰되지 않는 상대의 개인적, 사적인 체험에의 참여는 서로에게 함께 있고, 함께 나누고, 함께 모든 사적이고 내밀한 체험을 공유하게끔 요구한다. 섹스와 육체적 접촉은 사랑이라는 소통 코드의 이러한 요구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나만의 체험이 곧 동시에 내 파트너의 체험이 된다’고 하는 섹스에서의 경험은 바로 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섹스, 육체적 접촉은 이를통해 곧 개인의 내적인 체험의 차원을 공유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 매체로서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 매우 힘든 커뮤니케이션의 상황들을 발생시킨다. 루만에 의하면 그건 크게 두가지 사정때문이다.

첫째,  친밀한 소통관계의 조건으로써 이 사랑이라는 소통에의 참여자는 자신이 파트너와 그 파트너와의 관계로 인해 이전의 오랜 습관과 이해와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을, 한마디로 그 사랑이라는 관계로 인해 자신이 '변화' 했음을 파트너에게 읽히고 보일 수 있도록 해야하는 행위자다. 그는 사랑으로 인한 자신의 변화를 '행동'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점에서 행위하는 자로써의 나는 나의 파트너로부터 관찰당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와 관찰 사이에는 커다란 편차와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행위하는 자가 자신의 행위를 주로 상황들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보는 반면에 관찰자는 그를 행위자 개인의 특성으로 귀속시킨다고 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루만은 자동차 운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오늘날 사랑의 의미론을 이루는 개별적, 친밀한 관계라는 소통의 코드가 위 두 조건 속에서 어떻게 복잡하고도 힘든 상황을 연출하는지 보여준다. 차를 운전하고 있는 자는 운전하고 있는 상황의 조건들에 따라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반면 차에 함께 타 그를 관찰하고 있는 파트너는 그의 운전방식에 불만을 갖고 그것이 상황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파트너 개인적 속성으로부터 귀결된 것이라고 여긴다. 행위자를 관찰하고 있는 관찰자는, 사랑의 코드의 의미론이 요구하듯이,  그 행위자의 행동이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를 비난하는 것이다.  

행위와 관찰 사이의 간극과 편차,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랑관계의 갈등은, 관찰자로써의 파트너가 나의 행위를 특별한 사랑의 징표로 간주하는 한, 그러나 한편으로 행위자가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상황의 요구들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규정받게 될수록 더욱 벌어지고 심해진다. 행위자의 입장에선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했던 행위들이 관찰자인 파트너에 의해선 그의 무관심과 배려없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의 징표인 것으로 비난받는다.  

이러한 사랑의 의미론 속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사랑을 늘 행위를 통해, 그것도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행위가 아니라 늘 새로운 행위를 통해 관찰자인 파트너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 그만의 내적 체험, 그만의 독특하고 구별되는 내적 세계의 특수성,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보여주어야 함을 요구받는다. 그리하여 예를들어 유부남 혹은 유부녀는 파트너로부터 남편 혹은 아내로부터의 이혼을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표로써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코드는 개인화된 커뮤니케이션의 조건 속에서 커다란 딜레마를 낳는다. 관찰자의 주관적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관찰될 수 있도록 보여주어야 하는 행위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자의 고유한 세계와 자신에 대한 이해를, 사랑받는 자의 그것으로 대체하기를 요구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애초에 사랑이라는 관계가 형성되게 되었던 사적인 개인들의 개별적 정체성을 포기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남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받고 소통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하게된 행위자는 이제 그를통해 오히려 자신의 개별성을 포기하거나 타협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하는 것이다.

루만은 이런 딜레마의 해결책으로, 사랑이라는 소통의 참여자들이 이러한 '행위자'와 '관찰자'의 역할을 균등하고 적절하게 서로 공유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저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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