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주의 선언 -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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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라는 이름의 자기계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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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매체철학 -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철학의 정원 12
심혜련 지음 / 그린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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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가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매체에 대한 사유에 있어 중요할 수 있는 몇몇 이론적 쟁점들에 대해서는 오해나 오독의 여지가 많은 책이다.  

일단 눈에 뜨인 두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저자는 벤야민이 말하는 촉각적 수용을 '시각적 촉각성'으로 제한시킨다. 

 

엄격히 말해서 벤야민이 말하는 촉각성이란, 시각적 촉각성을 의미한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지각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마치 촉각성과 유사한 지각의 체험을 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67면)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집합체의 신체의 신경감응 수단으로서 제2기술의 잠재성을, 벤야민이 사진, 영화와 같은 기술 매체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혁명적 잠재성'을 '시각'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잘못된 이해이다. 오히려 벤야민은 촉각적 수용을 분명히 '시각'과 대비시키고 있다.  

 

 

 

 

역사의 전환기에 인간의 지각기관에 부과되는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서는 전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과제는 촉각적 수용의 지도에 따라,

익숙해짐을 통해 극복될 것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발터 벤야민 선집 2, 91면. 번역 일부수정) 

 

 

 

 

 

이러한 방식의 오독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논의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도 발견된다. 저자는 키틀러에게서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인간의 두뇌가 기억하던 것들을 대신 기억하는 매체로 이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록이 기억을 대신하고, 또 기록을 위해 매체가 사용되는 한, 매체와 기억은 긴밀한 관계를 맺게된다. 기록(기록매체)와 기억, 그리고 의식적 기록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기록(무의식)의 상관관계, 바로 이것이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특히 주목하는 매체철학적 주제다...그가 주로 분석하는 매체는 축음기, 영화 그리고 타자기다. 이 세 개의 아날로그 매체들은 각기 기록하는 내용과 지각방식이 다르다. 축음기는 청각적 지각내용을, 영화는 시각적 지각내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자기는 사유의 내용을 기록한다. 그는 이 세 개의 기록매체들이 인간의 두뇌 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주목해서 분석한다." (153-154면)

 

키틀러의 매체이론이,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인간의 두되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이라면, 사실 그의 매체론은 그 이전 다른 매체이론과 크게 다를바 없게된다. 키틀러 매체이론의 특징은, 기억 혹은 기록해야 할 '내용'이 선재하고, 그것을 어떤 매체 - 인간 두뇌? 축음기? 타자기 등 - 가 기록/기억하는가라는, 매체 이론의 패러다임 자체를 넘어서 있다. Claude Shannon 의 정보이론에서 출발하는 키틀러에게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들은 감각적 데이터 흐름이며, 그것은 특정한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각각의 채널은 감각 데이터흐름을 서로 다르게 필터링하며, 그를 통해 의미있는 정보와  노이지를 구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전달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두뇌 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주목해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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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섬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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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자가 만든 <책 섬>은 책으로 만들어진 섬이면서, 책을 만드는 섬이자, 책을 만드는 재료이면서 동시에 그 섬으로 가는 책이기도 하다. 그 섬에서는 힘들고 오래 걸리는 삽질’ - “파는 게 반이야, 책은” - 과 단어들의 조립을 통해 시를 붙잡을 수 있는 문장을 만든다. 책 섬에서 책을 만드는 그는 시인이다.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나는 그에게 묻는다. “시가 뭔데요?” 그러면 그가 말한다. “시는 단어로 된 함정이야. 문장으로 꼬은 올무. 볼래? ! 행 하나만 망가져도 바로 도망가지. 하지만 고도의 집중력과 산만력을 발휘하면 정교한 함정을 설치할 수 있어. 보여? 이렇게. 단 한 개의 문장으로도 포획할 수 있고 수십개의 문단으로도 놓칠 수 있어.” ! 무언인가가 보여? 내가 여기 인용할 수 있는 건 그의 문자 뿐이다. 그를 인용하려면 난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을 인용할 수 없다. 그의 책은 그가 이야기하는 숙련공들의 게임원리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문장하나 이미지 하나 문장 둘 이미지 셋,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고 이미지의 띠를 잇고, 문자, 그림, 그림, 문자...” 그의 문자와, 그의 이미지는 핑퐁을 치듯 서로 관계를 맺는다. 그림이 받아주지 않으면 문자가 쳐낸 공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 때문에 김한민은 결국 나 혼자 이쪽갔다, 저쪽갔다 북치고, 장구치면서 문자와 이미지가 쳐 넘긴 공을 다 받아낸다. 그에게 기록한다는 건’, 쓰는 것이면서 또 그리는 것이다. 쓰기의 근원을 이루던 쓰기와 그리기는 그렇게 결합되어 있다. “문자와 이미지로 짬뽕된우리의 뇌에 새겨지는 건, 글자들만이 아니다. 그래서 이라는 단어로 그의 책을 지칭해 말하는 건 너무 적거나 너무 크다.

책 섬에서 만들어진 책은 두루마리처럼 말려져 있다. 문장 속으로 들어갈 만큼 작아진 저자가 거기 새겨 놓는 건, 아직 펼쳐져 있지 않다. 그 책을 탄 아이가 뭍에 도달한 후에도. 그렇게 저자는 자신이 만들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 “책은 만든 사람 게 아니니까” -‘ 갓 지어놓은 책을 떨구어 놓았다. 그건 미끼일까? ’책이 쇠락하는 시대‘, 책을 좋아하기 보다는 책속에서 처방을 찾기를 좋아하는 시대지만, 입질을 할 독자를 기다리는? 난 미끼를 물고, 덮여있는 그의 책을 펼쳐 타고는 그의 섬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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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 지각의 병참학, 패러다임 총서
폴 비릴리오 지음, 권혜원 옮김 / 한나래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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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책인데, 정말 중요한 책인데, 번역이 그리 매끄럽지 않다. 오역이 아닐까 의심되는 부분도 적지않게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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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림보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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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림보>는 한겨레 신문에 "감수성 전쟁"을 연재하고 있는 김한민 작가의 신작이다. 처음에 감수성 전쟁을 보았을 때 나는 이건 아니지 않는가라고 느꼈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패러디하는 것이 아니라 난 네 삶의 방식이 혐오스러워라고 말하는 직설법. 그것이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고 어떤 인식에 도달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카페 림보>를 읽고 그 생각이 바뀌었다. 비판이나 패러디는 비판하고 패러디하는 대상에 대한 내적 거리감을 전제한다. 그건 비판과 패러디를 행하는 자신을 그 대상보다 '우월한' 인식의 위치에 세우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도달한 그 자리로 달려오기를 권유한다. 그렇기에 비판은 더 합리적이고, 더 이성적인 보편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고귀한 명분을 얻는다. 거기에는 감수성의 문제, 감성적 차원에서의 '불일치'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감성과 감수성은 이성적, 합리적 비판이라는 외적 명분 속에 은밀히 숨어있거나 공공화시키기 힘든 취향의 문제로 사유화되어왔다. 감성과 감수성은 혼자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며 눈물을 찔끔거리는 지극히 사적인 감정 분출의 문제로만 여겨져 왔다. <카페림보>는 사적 개인의 아름다운 감옥속에 갇혀있는 감수성을 탈출시키려 한다. 이 책은 점점, 아니 우리 사회 전체를 잠식해버린 바퀴족들에 대한 역겨움과 혐오감을 공공화한다. 바퀴족들, 결국 우리 자신인 이 바퀴족들이 스스로 만족하며 혹은 자위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감성적으로 얼마나 끔찍하게 치명적이고 역겨운 가를 보여준다. 논리와 규범, 명분과 이론의 차원에서 점잖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 감수성적 차원에서 그에 명확한 분리를 긋는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네 삶의 방식, 지긋지긋하고 혐오스러워라고 이야기하고 그를 향해 전쟁을 선언한다.


바퀴족에 대한 전쟁을, 아니 전쟁이라기보다는 테러를 테러는 미약한 소수가 거대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 방식이다! - 기획하는 여섯 명 림보족 대원들은 바퀴족의 세상을 견디지 못한 감수성의 피해자들이다. 그들의 힘겹고 처절한 작전은 애초부터 실패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을 림보족 대원으로 만든 그들의 민감한 감수성은 거대하게 시스템화된 바퀴족의 질서를, 철저히 그 속에 편입되어 버린 우리의 공격적 삶의 방식 앞에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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