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반 동안 그렇게 달이 뜨는 광경을 그렸다...
유난히 더운 여름날이 저문다. 들판에 나간 테일러는 밤에도 일할 준비를 한다.
근처 웨스트 버골트라는 이름의 마을 위로 달이 뜨고 있다. 테일러는 한 그루의 나무가 제공하는
풍부한 가능성으로 옮겨오기 전에는 4년 반 동안 그렇게 달이 뜨는 광경을 그렸다. 그러나 지금도
하늘에 달이 나타나는 그 정확한 순간을 잡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으며 놀란다.
달은 처음에는 머나먼 도시의 빛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은근슬쩍 먼 숲 바로 위의 자리로 온다.
그때부터 작지만 강력한 점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달은 위로 올라가면서 계속 색깔이 변한다.
자주색을 띤 주황색에서 시작해, 10분 뒤에는 마젠타의 홍조가 사라지고,
마침내, 점점 검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색은 눈부시고 순수한 하얀색으로 표백된다.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p.201,203
떠올려보려고 노력만 하면 그날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까무룩 잊히고도 남을 법한 20여년 전의 어느 한 순간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는 건
내 몸과 마음이 조건반사할 수 있을 만한 아주 결정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지만
그날의 풍경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너무나도 평범한 보통의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달라질 것 없는 그 풍경이 처음으로 마음에 와닿았다. 그만 압도되고 만 것이다.
사춘기 소녀의 두 눈을, 온 세상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엄청난 크기의 태양이
바다속으로 풍덩,하고 떨어지던 순간, 정말이지 한 순간!
언제나 하늘에 떠 있거나, 사라지고 난 후의 상황만을 보고 인지했던 내가
처음으로 바다를 향해 뜨거운 안녕을 고하듯 내려앉는 태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애틋한 연인의 기나긴 작별의식 마냥 느릿하게 입수를 준비하던 태양이
바다와 맞닿는 순간
서서히... 나 느릿하게 기울어가는... 이라는 말은 더이상 어울리지 않을만큼 매몰차게 사라져버렸다.
한 순간,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
태양은 바다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버리고 눈이 아리도록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약간의 허탈감에 젖어들었다. 동시에 놀랍도록 짜릿한 충만감을 맛보았다.
인간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중 part. six 의 '그림'편을 읽는 동안
오랜 시간 잊고 지낸 이 기억을 다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스티븐 테일러라는 어느 무명의 중년 화가.
한번도 사람이 만든 것을 그리고 싶었던 적이 없었던 화가.
우리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공감하고 상상하려고 노력을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
말 그대로 미리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측도 할 수 없는 자연환경(p.203)에 끌려
그의 온 시간을 자연을 관찰하는데 헌신적으로 몰두하는 화가.
치밀하고도 치열한 그의 작업방식 덕분에
누군가는 집 안 거실에 앉아 자연의 어느 일부를 실제인양 감상하고 감동받고 위로받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로도 누군가의 마음으로도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우리는 자연에서 채워나간다.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정말 사실이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유명인이냐, 유명인이 아니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세상의 속도전에 떠밀려 앞만 보며 달려온 사람들에게
화가는 그의 온 시간과 정성을 들인 '자연'이란 선물을 내놓은 것이다.
자연이라는 것이 우리 가까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것이다.
까마득히 잊고 지낸 나의 옛기억을 불러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