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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ㅣ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랩걸 Lap Girl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
랩 걸, 이 방대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나가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소개한 사실들은 내가 정말로 풀어내고 싶어 안달이 나는 미스터리들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는 작가 호프 자런의 말이 무색할 만큼 이 책은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실 접해본 적이 없는 과학도서라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때때로 순식간에 책장을 넘겨야 했고 놀랍도록 깊이 빠져들기도 했다. 다소 생소하긴 했으나 천천히 공을 들여 읽고 싶은 책이다. 적어도 나처럼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초록 생명체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충분히 매력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개인적으로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한 해에 나무 한 그루씩 심자. 마당이 있는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나무를 한 그루 심고 집주인이 눈치채는지 기다려보자. 만일 눈치를 채면 그 나무가 늘 거기 있었다고 주장해보자. 환경을 위해 나무를 심자니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하는 칭찬까지 더해보자. 집 주인이 그 미끼를 물면 나무 한 그루 더 심자. (#과학도서, 랩걸, p.400-401)
호프 자런은 이 방대한 이야기 끝 에필로그에 이와 같은 당부를 건넨다. 모든 것을 정확한 데이터에 의한 수치로만 환산하는 것이 과학자일 거라는 일종의 편견을 깨게 해 준 대목이다. 사실 과학자에 대한 편견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여지 없이 깨진다. 그녀는 여성과학자라는 직업이 보여줄 것 같은 알파걸의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는 대신 상당히 인간적인 면모를 선보인다. 과학과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이 어떻게 광적인 존재로 바뀔 수 있는지 솔직하다 못해 스스로의 치부까지도 가감 없이 드러내 독자를 놀라게 한다. 마치 소설 같기도 한 자전적 이야기와 나무와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교차 편집 방식으로 들려주면서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했다.
'좋은 글을 쓸 줄 아는 과학자의 등장'으로 학계와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이 책의 작가는 '호프 자런'이라는 여성과학자다. 호프 자런은 2005년 가장 뛰어난 지구물리학자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매클웨인 메달을 수상했고, 풀브라이트 상을 세 번 수상한 유일한 여성 과학자로 '타임'선정 2016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가 쓴 랩걸은 '스미소니언 매거진' 선정 최고의 과학책 10, '뉴욕타임스' 추천 도서, 아마존 선정 최고의 책 20에 선정된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그녀와 그녀의 책 앞에 붙는 이 화려한 수식어만으로도 이 책은 상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끈기를 가지고 읽어볼 만한 책이다. (결코 지루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흙은 참 묘하다.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은 아닌데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서 생긴 산물이라는 점에서 묘하다. 흙은 생물의 영역과 지질학의 영역 사이에 생긴 긴장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낙서 같은 것이다. (중략) 두 극단의 상태, 즉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들 사이에 물리적으로 놓인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가 '흙'이라고 부르는 물질이다. 흙의 맨 위층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의 영향이 가장 많이 보인다. 죽은 식물이 시들고 썩고 점액들과 섞여서 어두운 갈색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물들인다. 흙의 맨 아래층은 바위들이 남긴 유산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물은 바위를 조금씩 조금씩 녹여서 반죽으로 만들고, 말랐다-젖었다-말랐다를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그 밑에 놓인 손상이 가지 않은 암석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광재slag를 발생시킨다. 그 둘 사이의 중간층에서는 위와 아래 두 층의 물질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화려한 색단층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교양과학, 랩걸, p.153)
#랩걸(lab girl) 은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이 세계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게도 만든다. 재미있고 놀랍다. 지금까지 나에게 흙은 그냥 흙이었다. '흙'을 달리 생각할 이유도 필요성도 전혀 없었는데 랩걸에서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흙'이 단순히 '흙'으로 보이지 않는 놀라운 마법이 펼쳐진 셈이다.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과학도서 랩걸, p.203) 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신선했다. 이런 부분들이 랩걸의 주를 이룬다면 이 한 권의 책이 얼마나 다양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호프 자런의 연구는 대부분 '호기심에 이끌려서 하는 연구' 들이기에 재정 마련이 늘 문제였다. 그 누구도 제품이나, 유용한 기계, 환자에게 처방할 수 있는 약, 가공할 만한 무기 혹은 직접적인 물질적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녀의 연구에 예산을 편성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그녀가 하는 연구들이야말로 인류의 미래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눈으로 드러나는 실질적인 이익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인류의 생명과 직결되는 나무와 식물에 관한 연구에 혜안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투자해 줄 나라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과학계 성차별 역시 그녀를 절망케 했다. 호프 자런은 마을 유일의 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실험실에서 자랐다. 과학자인 아버지의 삶을 늘 가까이서 보며 자라긴 했지만 여성과학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가 임신을 했을 때는 자신의 실험실임에도 불구하고 출입을 제한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기도 한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원을 쉽게 받을 수 없는 과학 분야를 그녀는 여전히 열정을 다해 연구하고 있다고 하니 존경스럽다.
만약 그녀가 혼자였다면 험난한 과학자의 길을 지금처럼 곳곳이 걸어갈 수 있었을까?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누이? 영혼이 통하는 친구? 동지? 수사와 수녀 관계? 공범? (중략) 일지도 모르는 '빌' 이 존재한다. 빌은 이 책과 그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집합이자 동반자 역할을 한다. 랩걸은 #호프자런 이라는 여성과학자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두 명의 #과학자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프자런과 빌이 꾸며낸 합작품들은 그 자체로 대단히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과학자들의 광적 집착에 가까운 연구 열정을 지켜보는 것 역시 색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북유럽 정서를 안고 태어나 자란 호프 자런.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웃 사람들의 삶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친오빠들과도 거의 말을 섞지 않고 자랐다고 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 북유럽의 정서라니! 가까운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타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북유럽의 휘게 라이프는 다 뭐지? 지금까지 익히 알고 있었던 북유럽의 정서와 사뭇 다른 환경에서 자란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 역시 태어나 자란 마을을 벗어난 후 놀랍도록 따스한 환경과 마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북유럽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건 아닌가 보다. 어쨌든 그녀는 그리 따스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 마주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며 애정을 표현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했던 탓일까? 처음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아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무척 난처했다고 한다.
아이에게 하는 입맞춤 하나하나는 내가 그토록 절실히 원했지만 받지 못했던 모든 입맞춤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제는 내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건 아닐까 걱정한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알 필요가 있고, 나는 내가 느끼는 이 풍요로운 사랑을 모두 표현할 능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내 아들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아이는 불가능한 동시에 불가피했다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과학도서, 랩걸, p.366)
호프 자런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면서 아이라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아들을 사랑해나가면서 자신의 상처를 보듬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랩걸은 과학도서인 동시에 자기성찰과 치유를 담아낸 책이기도 하다. 마음이 따뜻한 여성과학자 호프 자런이 바라보는 식물의 세계는 그래서인지 어머니 품 같은 지긋함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인류를 향한 고단한 열정을 이어가는 여성과학자에게 마음속 깊이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 함께 나누고 싶은 『랩걸』 속 한 구절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로 자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드물다. 발자국 하나마다 수백 개의 씨앗이 살아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모두 그다지 가망은 없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절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기회를 기다린다. 그 씨앗 중 절반 이상은 모두 자기가 기다리던 신호가 오기 전에 죽고 말 것이고, 조건이 나쁜 해에는 모두 죽을 수도 있다. 이 모드 죽음은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머리 위로 우뚝 솟은 자작나무 한 그루당 매년 적어도 25만 개의 씨앗을 만들어내기 때무이다. 이제 숲에 가면 잊지 말자. 눈에 보이는 나무가 한 그루라면 땅속에서 언젠가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를 열망하며 기다리는 나무가 100그루 이상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과학도서 랩걸, p.50)
뿌리를 내리는 작업은 씨 안에 들어 있던 마지막 양분을 모두 소진시킨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고, 거기서 실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성공할 확률은 100만 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박이 성공하면 수확도 엄청나게 크다. 뿌리가 필요한 것을 찾게 되며 부피가 커져서 주근이라고 부르는 곧은 뿌리로 자란다. 커지면서 기반암을 쪼개는 힘까지도 발휘하는 주근은 식물 전체의 닻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내내 하루에 몇 갤런(1갤런은 약 3.79리터- 옮긴이)의 물을 빨아들인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명해낸 어떤 기계적 펌프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교양과학 랩걸, p.81)
이 가루가 오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넒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나만의 독특하고 별난 유전자들이 모여서 생긴 존재일 뿐 아니라 창조에 관해 내가 알게 된 작은 진실 덕분에, 그리고 내가 보고 이해한 그 진실 덕분에 실존적으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팽나무의 씨를 강화하는 광물질이 바로 오팔이라는 확실한 지식은, 누군가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그것이 알 가치가 있는 지식인지 아닌지는 오늘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느꼈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 나는 서서 그 사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싸구려 장난감이라도 새것일 때는 빛나 보이듯, 내 첫 과학적 발견도 그렇게 반짝였다. (과학도서 랩걸, p.105~106)
우리가 사는 집에 있는 목재 한 조각 한 조각(창틀에서 가구, 서까래에 이르기까지)이 한때는 살아 있는 생물의 일부로, 탁 트인 야외에서 수액으로 고동치며 활기에 넘친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목재의 나뭇결을 살펴보면 나이테 한두 개 정도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섬세한 선들은 그 나무가 살았던 한두 해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을 줄 안다면 각가의 나이테들은 비가 어떻게 왔는지, 어떻게 바람이 불었는지, 어떻게 날마다 해가 여명을 앞세우고 나타났는지를 이야기해 줄 것이다.(교양과학 랩걸, p.118)
도시화는 식물들이 4억 년 전에 고생 끝에 푸르게 만들었던 곳에서 식물의 흔적을 없애고 땅을 다시 딱딱하고 황폐한 곳으로 되돌리고 있다. 미국 도시 지역 면적은 향후 40년 사이에 두 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와 있어서 펜실베이니아 주 크기만큼의 보호 수림 지역이 없어질 전망이다. (과학도서 랩걸,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