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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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맺어진 인연과 기억을 지울 수 없다면
- 김진규,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을 읽고

 삶의 고단함은 무엇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일까.
 관계.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하물며 친구와 연인 관계라 할지라도 고단함이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관계란 언제까지나 서로를 보살피고 이끌고 사랑하고 보듬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자신을 둘러싼 관계로 인해 힘든 시기가 찾아온다. 그것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거나 혹은 쉽게 떼어낼 수 있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 관계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오직 죽음, 뿐 이라고 화율은 생각했다. 나 역시.

 죽어서도 관계에 휘둘려야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죽음일 수 없었다. 죽음은 모든 관계의 끝이어야 했다.(p.27)

 화율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비가 그치지 않아 왕까지 나서서 기청제를 지내야 하는 때. 호역(돌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조정에서는 청나라 주린이 지은 역사서(왕의 근간을 흔드는 내용이 수록)를 몰래 들여와 유통시키고 베껴 쓴 자들을 색출해 형을 집행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죽음이 범람하는 때. 바야흐로 죽음의 시기(p.21). 저승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람한 걷이의 때(p.28)’에 이른 것이다.

 저승차사에도 수습차사가 있다는 신선한 발상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온통 검은 색으로 중무장하고 시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이미 스모키 화장을 선보였던 저승차사들. ‘전설의 고향’을 보고 자라서인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저승차사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난 저승차사는 조금 어리버리하다. 죽음을 걷으러 올 때는 쇳빛부전나비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칙칙하고 눅눅한 분위기 대신 산뜻하고 발랄하기까지 한 느낌. 눈부시게 아름다운 저승차사를 만났다.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승을 넘어 저승으로 향하는 시기에 명부가 있을 리 만무하다. ‘부디 신중하라’는 한마디 말만을 새긴 채 이승으로 내몰린 수습차사들. 그 중 한 명이 화율이다. 자신이 죽은 것조차 이제 겨우 실감했는데,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다른 이의 목숨을 거둬들여야 할 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모든 게 혼란스러운 때 그만 실수로 연홍의 눈을 멀게 한다. 저승의 첫 칙을 깨고 감히 상관하지 말아야 할 이승의 일에 상관하게 된 것. 정작 찾아야할 사람은 보이지 않고 연홍에게서도 눈을 뗄 수 없다.

 정쟁에 휩쓸려 온 가족을 잃고 하루아침에 홀로 남게 된 연홍,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혀를 잃고 평생 왕실의 색을 만들어야 하는 연홍의 정혼자 수강, 수강과 연홍 등 상처 입은 이들을 돌보게 되는 염색장 채관, 형이 범하고 만 연홍을 끝까지 지키고자하는 검송. 그리고 끝  끝내 떳떳할 수 없었던 화율과 정인 설징신, 왕비전 별감과 세자궁 주우의 이야기까지. 전생과 현생의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순식간에 압도당해 버렸다. 연홍이 애처로워 뒤를 밟는 사이, 정인을 찾아 헤매는 사이, 저승에서조차 관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화율은 이 기막힌 인연의 고리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게 된다. 처음 맺은 잊을 수 없는 인연을 찾아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부유하듯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영혼들. 관계란 무엇이기에 죽음의 길을 넘어서도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저승에서는 이승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지만 어떤 것에도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상관하려 드는 순간, 죽음 너머의 죽음으로 가닿게 된다. 죽음이 모든 관계의 끝이라 믿었던 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모든 관계의 끝은 죽음 너머의 죽음, 바로 영면에 들어서야 완성된다. 치명적이라 끝끝내 당당할 수 없었던 정인 징신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화율은 이승을 상관하려 한다. 아가. 가시가 물위를 떠돌며 끝끝내 찾아 헤매는 아가. 채관이 몇 번이나 이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인 아가. 연홍이 치욕을 겪으며 품게 되었지만 지키고 싶은 아가. 어쩌면 모든 인연과 얽혀 있는 가여운 아가를 화율은 상관하려 한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면서.

 인연의 고리는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살아있는 자가 느끼는 극한의 공포 죽음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 한 편을 만났다.  전생을 믿는다고도 믿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을 읽는 내내 마음이 몹시도 저려왔다. 정인과 아이를 찾아 윤회를 거듭하는 채관이 애달팠고, 저승에서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화율과 섭지의 운명이 애달팠다. 아이를 찾아 끊임없이 강을 오가는 가시가 그랬고, 눈먼 연홍도, 혀가 잘린 수강도,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검송 역시 마찬가지로 애달프다.

 팔랑팔랑 한들거리는 나비의 날개짓에 취해 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승과 저승을 오고 간 느낌. 한 번 맺은 인연 한 번 각인된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면 좋은 인연과 기억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싶다. ‘인연’과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 ‘내 이야기의 팔 할은 공부에 의지한다.’는 작가의 말이 사실이라고 볼 때, 작가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 사람 같다. 문장력과 이야기의 흡입력이 상당하다.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재미있다. 슬픔이 훅- 하고 가슴을 후벼 파지만 감히 아름답다고도 말할 수 있는 책!


- 주로 소설과 에세이를 읽는다. 사랑, 이 중심에 자리한 책은 잘 읽지 않는다. 배경이 현대, 를 벗어나도 잘 읽지 않는다. 책을 고르는 나의 기준으로 보면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은 당연히 위시리스트에 조차 올려두지 않는 책이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전생과 현생을 넘나들며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시공을 초월한 사랑과 운명에 대한……’이라고 말하고 있다. 달가워하지 않는 분야의 책이니 신경 끊으라는 듯 요약이 선명하다. 그런데도 책이 읽고 싶어졌다. 『달을 먹다』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김진규 작가를 진작부터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내놓은 소설은 하나같이 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내가 졌소’ 라는 심정으로 이 세 번째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실은 이제 그만 독서편식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좋아 소설과 에세이를 고집하면서 ‘사랑’을 배제하는 건 모순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스스로 정한 시공간의 한계도 벗어던지고 싶었다. 무엇보다 ‘저승차사 화율’과 표지가 상당히 매혹적이다. 내용은 더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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