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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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이야기 속 ‘진짜’ 이야기
- 김언수, 『캐비닛』을 읽고

  든든하다. 진하게 우려낸 곰국 한 그릇에 밥까지 말아먹고 나니 영혼까지 살이 찌는 느낌이다. 나의 오랜 단골집. 43년을 매일같이 정성을 쏟다보니 맛도 제대로 우러나고 단골도 꾸준히 늘어났다며 소소한 자랑을 늘어놓으시던 00곰탕집 할머니. 어느 날 아침,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다 그만 뜨거운 국물을 입안에 적셔볼 틈도 없이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기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뜨거워서였는지 너무 놀라서였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날 뉴스에는 43년간 곰탕집을 운영해온 할머니가 그동안 소뼈가 아닌 닭뼈를 사용해 소비자를 속여 왔다는 내용이었다. 참 재주 한 번 용하시네, 라는 심드렁한 내 반응에 내가 다 놀랄 지경이었다. 외할머니같은 인정과 손맛으로 든든한 한 끼 식사를 책임지셨던 그 할머니는 아침 밥상머리에 앉아있던 나의 식욕을 단번에 싹둑 잘라버리셨다. 제대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 ‘진짜’로 믿었던 것들이 ‘가짜’로 판명 나는 순간, 인간이 겪게 되는 정신적 공황의 파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김언수 작가의 『캐비닛』이 바로 이런 느낌! 뒤통수가 다시 한 번 얼얼해져 온다.

 아, 이 능청스런 구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설마 설마하며 읽다 진짜로 믿어버렸는데 마지막에 가서 한다는 말이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거짓’이란다. 바짝 긴장하며 스텝을 밟다, 상대가 뻗은 기습 펀치에 보기 좋게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온다.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지 않으면 녹다운 될 지경. 작가의 구라가 그만큼 그럴싸하다는 이야기다. 

 『캐비닛』은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이는 사람들로 일컬어지는 ‘심토머’에 관한 이야기다. 80,90년대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자주 목격되던 우중충한 빛깔의 캐비닛을 기억하는가. 그것과 똑같은 13호 캐비닛에는 이 같은 징후들이 무려 삼백일흔마흔개나 파일로 정리되어 있다. 사십년간 이들만을 연구해온 권박사와 칠년간 자료조사 명목으로 매일 심토머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추이를 정리해온 공대리가 담당자다. 볼품없는 겉모습과는 달리 일단 13호 캐비닛은 열기만 하면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징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가 하면, 밥 대신 주식으로 휘발유라든지 유리 강철 신문지만 먹고 사는 것은 기본이다. 새끼손가락에 은행나무가 자라거나 입안에서 도마뱀이 자라는 키메라, 순식간에 몇 십 분에서 몇 년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타임스키퍼, 도플갱어를 경험하는 사람, 몇 달에서 몇 년이라는 시간동안 잠만 자는 토포러, 자신의 과거를 조작 재창조하여 그 기억에 의존하며 사는 메모리모자이커,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난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등 믿기 힘든 징후와 현상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책을 읽는 내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던 의문이 믿음으로 바뀐 것은 한 순간. 바로 다음 부분 때문이다.  

 외부의 영혼이 살아있는 한 인간의 육체를 지배하는 식으로 서로의 육체를 나눠 쓰는 사람들을 다중소속자라고 한다. 이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작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재들을 예로 들었다. 과학자인 동시에 의학자 건축가 수학자 화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생각해보라, 그러므로 천재이긴 하지만 한 사람의 능력이 이토록 방대해도 되는 것인지. 작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단수 인칭이 아닌 레오나르도 다빈치 팀이라 부른다. ‘당대의 천재와 석학들이 모여 서로의 몸을 공유하면서 끊임없는 작업을 했고 단지 논문과 작품 발표의 창구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일원화했을 뿐(p.230)’이라는 사실! 어떤가, 실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책이 단지 심토머에 관한 기괴한 흥밋거리만을 늘어놓았다면 한 번 읽고 덮어 버렸을 것이다. 공대리가 처음으로 키메라에 관한 서류를 훔쳐봤을 때의 심정처럼 ‘뭐, 이런!’하고 마음이 무진장 상했겠지. 권박사와 공대리가 기록한 내용에 주목하면서부터 생각은 달라졌다. 심토머의 진행과정과 더불어 소개된 그들만의 내면 이야기. 그 속에는 이질적인 종을 바라보는 흥미의 시선을 넘어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애정의 시선이 담겨져 있다. 어쨌든 우리는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p.204)는 것처럼 이 도시 이 나라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작가의 기상천외한 구라로 판명이 났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대리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도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갈 이유가 있는 희망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다름 자체를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권박사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키려했던 것들, 공대리가 결국 권박사의 유언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 역시 자신의 생존권과 더불어 심토머에 대한 일말의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안전가옥에 유배(?)되고 난 후 심심타파를 위해 여러 각도로 자료를 정리하는 중이니 공대리도 권박사처럼 오랜 세월 심토머와 함께 한다면 일말의 사명감이라는 것이 생길 수도 있겠거니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낯선 것들로 가득한 박물관에 들어가 한동안 길을 잃고 헤맨 느낌이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했지만 차츰 익숙해지면서 진귀한 것들의 진면목을 들여다본 기분이랄까. 흥미와 스릴 호기심으로 중무장한 엉뚱 발랄한 소설『캐비닛』. 무진장 재미있고 무진장 엉뚱하며 무진장 희한하다. 자, 이제 즐길 만큼 즐겼다면 ‘가짜’ 이야기 속 ‘진짜’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캐비닛』을 다 읽었다면 반드시 ‘주의사항’을 숙지하시길! 그래도 심토머에 관한 자료를 찾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지 모른다. 나처럼 찾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엄청난 이야기를 발설하고 싶은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면 당신은 작가의 예언처럼 보기 좋게 만인들 앞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따라붙는 ‘망신’은 덤이다.

 참, 43년간 소비자를 우롱해 드신 곰탕집 할머니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글쎄 이 자리에서 공개해도 될른지. 뭐, 정 원하신다면야……. 나도 잠시 잠깐 루저 실바리스 혹은 김언수 작가가 되어보고 싶었다고, 그럴듯하게 구라 한 번 쳐보고 싶었다고 이 자리에서 밝히는 것이 과연 현명한 판단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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