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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은 없다 - 2008 대표 에세이
김서령 외 41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인사를 건넵니다,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네요. 고맙다고!
- 김서령 외, [약산은 없다]를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보는 만큼 알아지기도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그 속내를 다르게 드러낸다는 뜻이다. 사람은 일생동안 한두 번의 시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큰 변화 없이 살아간다. 어린 시절 쓰던 일기를 떠올려 보라.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로 하루를 기록하고 싶은데 돌아보면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그나마 흥미진진하던 세상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특별한 건 꿈도 꾸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만 하루가 지나가기를 바라게 된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재미없는 일들만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천만에! 우리네 삶은 특별함으로 가득하다. 단지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다.
[약산은 없다]는 2008년을 대표하는 수필 42편을 엄선하여 수록한 책이다.
수필은 우리에게 친숙한 문학이다. 많은 작가들이 소설과 더불어 수필집을 출간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최근 들어 일반인도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에세이를 내놓고 있다. 굳이 ‘수필’이나 ‘문학’ 이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타인의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들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읽어나갈수록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시원한 바람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상쾌하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신선한 공기에 마음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수필을 읽고 있자니 삶이 파릇하게 돋아나는 것 같다.
잘 돌보지 않아 축 쳐져 있던 화초에 물을 주는 순간, 줄기부터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탱글탱글 이야기가 솟아오른다. 즐겁고 유쾌한 주제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모든 이야기에 생동감이 넘쳐난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나간다. 허나, 작가들의 세상은 에너지로 가득하다. 차이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읽고 또 읽어본다. 결론은 삶을 대하는 세밀한 시선에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 속에 의미가 있고 이야기가 있음을 작가가 놓칠 리 없다. 무심코 넘겨 버릴만한 일도 작가의 눈에 포착되면 ‘이야기’가 된다. 특별한 사연이 된다. 삶을 대하는 애정과 디테일한 관찰! 무엇을 대하든 세밀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밋밋한 일상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자잘한 개인사에서부터 시대를 반영한 이야기까지 이 한 권의 책에 우리 사는 이야기가 풍성하게 들어차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반백년의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이다. 과거 한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음에도 생생하기 그지없다. 마치 그 일이 일어난 시간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간 것처럼 읽는 나까지 감정이 오롯해진다. 연륜만큼 넉넉함도 묻어난다. 재미도 있고 아픔도 있다.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다. 단순하거나 복잡한 일들이 얽히고설켜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 이미 지나와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기억이 때로는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이 수필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본격 수필에 이런 묘미가 숨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 더 많은 수필을 만나볼 수 있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추억을 사진으로 대체하고 있다. 무엇을 먹든, 어디를 가든 눈과 마음에 담기 전에 카메라 셔터부터 눌러댄다. 최근 몇 년간 다녀왔던 장소를 떠올려 보면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남는 장면이 많지 않다. 그 자리, 그 상황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예쁘게 조각내어 따로따로 담아낸 탓이다. 사진을 뒤적이며 맞춰보지 않는 한 추억은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 수필집을 읽는 동안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기억은 사진이 없어지면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 새겨진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것은 감정을 동반한다. 감정은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감정의 날을 무디게 만든다. 포커페이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적절한 자기방어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나를 가둬둔 틀 안에서 한 발짝만 비켜 서 보리라 다짐한다. 자유가 찾아들 것이다. 마음에 새록새록 감정이 들어차고 삶은 생동감 있게 변해갈 것이다. 큰 사건이나 위대한 변화를 겪지 않더라도 인생은 많은 이야기 거리를 담고 있다. 작가만큼 일상을 세밀하게 관찰하지 못하더라도 찬찬히 둘러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매일 엇비슷하게 흘러가는 생활도, 무미건조해져 버린 감정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애정의 눈길이 일상을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렵더라도 노력을 기울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일 년, 이 년이 금세 지나가버린 것 같다면 자신의 생활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보자. 그러한 노력이 얼마나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지는 [약산은 없다]를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수필은 일상을 담아내는 위대한 그릇이다. 그릇을 어떻게 채워나가느냐는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작고 사소한 것들에 인사를 건네 보자, 환하게 웃으며 화답할 것이다. 이제라도 관심을 기울여줘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