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 - 문인 29人의 춘천연가, 문학동네 산문집
박찬일 외 엮음, 박진호 사진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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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추억할만한 도시가 있었으면 좋겠다
-박찬일 외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을 읽고

 누군가 인연을 마무리한 자리에서 당신은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겠지요.
 누군가 함박웃음을 터트렸던 곳에서 당신은 깊은 슬픔을 토해내겠지요.

 가고 옴이 정해져 있지 않은 곳.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을 일정한 비율로 나눌 수 없는 곳. 도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받아들이고 또 흘려보낸다. 사연이 만들어지고 쌓이고 묻히고, 또 다른 사연이 생겨나는 동안 도시는 차츰 변해간다. 어떤 도시든 하나의 이미지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같은 곳에 살아도 같은 일을 경험해도 사람은 수십 개의 퍼즐 조각 중 자신에게 들어맞는 오직 한 조각만을 마음에 새기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움, 누군가에게는 아픔, 누군가에게는 환희의 순간으로 기억되는 ‘도시’라는 이름. 도시는 그 곳에 살고 있거나 혹은 스쳐지나간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를 그러안은 채 오랜 비밀을 지켜내느라 때로는 의뭉스럽고 때로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춘천 역시 그러한 곳!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은 스물아홉 명의 문인들이 써내려간 스물아홉 가지의 춘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문인들은 춘천(혹은 강원도)에서 태어났거나, 춘천을 스쳐지나갔거나, 한때 춘천에 살았거나, 현재 춘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자리에 다 모이기조차 힘들 것 같은 저명한 문인들이 오직 ‘춘천’만을 생각하며 한 권의 책으로 만나게 된 것은 춘천시청의 제안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시청이 춘천에 관한 책을 기획하고 문인들에게 제안한다는 것은 보통의 시청다운(?) 발상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그러나 찬찬히 되짚어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고향이 ‘춘천’이고, 수많은 문인이 제2의 고향으로 삼은 곳 또한 '춘천'이다. 바로 ‘춘천’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춘천하면 낭만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춘천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를 듣고 자란 탓이기도 하거니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봄기운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청에서 이 같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대체 춘천에 스며있는 자부심과 대중성이 어느 정도이기에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는 것일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 같은 도시 춘천은 스물아홉 명의 문인을 만나 비로소 그 은밀하고 농도 깊은 속내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책은 대부분 회상에 근거하고 있다. 젊은 날의 꿈과 낭만, 사랑의 환상과 추억을 노래한다. 때로는 죽음과 같은 고통과 억압 회한이 쓸쓸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춘천은 아무 자리에서나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추억(p.82)’의 집결체다. '팬터마임처럼 말하지 않아도 수많은 의미를 쏟아내(p.317)'는가 하면,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p.269)’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문학의 원천이 되고 정서를 키워낸 곳. 겉모습은 변해가지만 한 번 기록된 추억은 ‘언제나 진행형(P.51)'이기에 수많은 문인들이 춘천을 떠올리고 춘천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런지.

 춘천에 대한 추억담을 따라 거닐어 보았다면, 익숙한 지명을 따라 책장을 넘겨보는 것도 잊지 말자. 이 책에는 한 번쯤 들어봄직한 유명한 곳이 많이 등장한다. 더불어 지금은 사라져버린 서점과 다방,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이어오고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꼭 한 번 가볼만한 곳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특히 청춘의 보금자리, 낭만의 근원지 역할을 했던 ‘전원다방’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가 대학시절을 보낸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에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라 부럽기까지 하다. 청춘의 별 볼일 없음과 가난함까지도 보듬어주던 ‘그곳’들은 차츰 개인의 놀이를 담당하는 소위 ‘방’문화(노래방, PC방, 비디오 DVD방 등)로 변모해 왔다. 오래 추억할만한 낭만보다는 일회성으로 그칠 흥미만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는 동시대적인 공감이 부족한 것도 같다.

 공지천과 팔호광장, 소양호, 청평사, 실레마을, 문배마을도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서도 춘천에 가게 되면 꼭 한 번 찾아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바로 효자1동 신동아아파트 옆에 위치하고 있다는 ‘담 작은 도서관’. 이곳은 보통의 도서관처럼 책을 진열하는데 치중하기보다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워줄 디자인 요소를 도입했다고 한다. 단순히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라 책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곳! 어린이 도서관이긴 하지만 그 곳에 가면 어린 시절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던 나의 꿈과도 만나게 될 것 같아 설렌다.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은 제목에서부터 시(詩)적 이미지가 느껴진다. 본문에 들어서면 한 번쯤 각 소제목의 배열을 눈여겨보자. 마치 시가 흐르듯 마음속으로 제목이 흘러들 것만 같다. 문인들의 글귀 역시 춘천과 맞닿으니 한층 더 깊고 풍부해진 느낌이다. 감상적인 문장들을 따라 밑줄 긋다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끝나버린다. 이 책은 기획에서부터 출판까지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을 담당한 박진호 작가의 말처럼 사계절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지만, 춘천하면 떠오르는 아련한 물안개 같은 고즈넉함이 사진 곳곳에서 묻어난다.
 
 스물아홉 명의 문인을 따라 추억을 거니는 동안 춘천의 거리와 건물들이 친숙한 실체처럼 다가옴을 느낀다. 이 책은 나를 춘천으로 떠나고 싶게 만든다. 훗날 추억할 수 있는 도시를 하나쯤 갖고 싶게 만든다.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도시 그리고 사람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 우리를 지탱해온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나의 사연과 당신의 사연이 더해져 도시는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어떤 이야기가 기록되기를 바라는가. 오늘, 당신이 추억을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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