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황홀한 여행
박종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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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사는 나라, 이탈리아
-박종호,[박종호의 황홀한 여행]을 읽고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만 살아갈 것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들!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피사, 밀라노 등 이름만 들어도 도시 자체가 나라로 기억될 만큼 유명한 곳이 많은 이탈리아. 그 곳 현지인들은 꿈같은 이 도시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황홀한 여행』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이 좀 밋밋하다 생각했다. ‘황홀’이라, 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단어던가? 허풍과 과장이 살짝 가미된 듯 멋없는 이 단어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온돌처럼 나를 달뜨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과장도 포장도 없다. 이 책에는 오로지 이탈리아에 대한 감격스러운 마음과 진심어린 사랑이 있을 뿐이다.

 15년 동안 20여 차례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박종호.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어떤 이유로 이탈리아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직업은 정신과 의사. 이력을 살펴보니 음악평론가 겸 오페라 평론가로 음악과 관련한 책을 이미 여섯 권이나 출판한 작가이기도 했다. 불쑥 선입견이 고개를 든다. 서점에 즐비한 여러 여행서적처럼 『황홀한 여행』역시 지나친 감상과 들뜬 마음만 가득한 그저 그런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우려를 보기 좋게 무너뜨린 건 이탈리아에 대한 저자의 남다른 사랑이었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죽은 후 묻히고 싶은 나라, 아니 그렇게 될 나라다.

 나는 내가 죽거든 유골을 베네치아 앞 바다,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에 뿌려달라고, 그때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해두곤 한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유언이며 지금 내가 바라는 마지막 사치이다. 지상에 왔던 흔적 같은 것은 필요 없다. 다만 내 영혼이 아드리아 해에 누워서 그 핑크색 가로등의 고독을 계속 음미하고 싶을 뿐이다. (p.67)

 기존에 출판된 여행서적 중에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그에 반해『황홀한 여행』은 예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의 이력을 통해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어느 곳을 펼쳐 읽더라도 예술에 대한 지식과 정보로 가득하다. 단 몇 번의 방문으로 느낄 수 있는 감탄을 넘어 도시 곳곳의 매력과 고대의 예술혼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까지 더해져 읽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런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탈리아 속으로 흠뻑 빠져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같은 곳을 15년 동안 무려 20여 차례나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를 이처럼 자주 찾게 된 배경에는 어린 시절 저자가 접했던 음악, 미술, 영화, 책 등 예술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를 여행사의 상품으로 처음 접하고 깊은 실망감에 빠졌다는 박종호 작가. 그때부터 그는 가이드 없는 혼자만의 여행을 철저히 준비해왔고, 이탈리아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섭렵했다고 한다. 이 말은 허언이 아니다. 저자는 차근히 쌓아올린 내공을 책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덕분에 독자는 앉은 자리에서 이탈리아 도시 곳곳의 역사와 오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행운을 만나게 된다.

 산마르코 광장의 300년도 더 된 카페에 앉아 그 옛날 바그너가 바라보던 풍경을 똑같이 볼 수 있다면, 카사노바가 투옥 중에도 간절히 맛보고 싶어 하던 플로리안 카페의 아라비카 커피를 직접 혀끝으로 느낄 수 있다면……. 이런 짜릿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 이탈리아는 고대 예술가들의 걸음걸음을 그대로 따라가 볼 수 있는 감격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련되지도 않고 부유해 보이지도 않으며 키가 크지도 않고 많이 배운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주눅들게 하는가? 그들의 배경이다. 그들은 남루하고, 때로 버릇없고 종종 시끄럽지만, 조상들이 만든 이 도시는 그들로 하여금 가슴을 펴고 걷게 만든다.(p.181)

  우연히 발걸음을 옮겼다가 나머지 일정은 모두 취소한 채 며칠씩 한 마을에 머물러 버린다. 작곡가 푸치니를 만나기 위해 택시기사도 잘 모르는 작은 마을을 찾아 무작정 달려가 본다. 현지인조차 운전하기를 꺼려하는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의 아찔한 도로를 직접 운전하다 뒤늦게 후회하기도 한다.

 그렇게 15년의 세월이 쌓이는 동안 이탈리아는 저자의 가슴 속으로 알알이 박혀 들어와 그를 살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어 버렸다. 여행사를 통한 여행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세밀한 부분까지 눈 귀 머리 가슴은 모두 기억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탈리아를 떠올리는 저자의 마음이 얼마나 황홀한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황홀한 여행』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황홀’이란 단어가 얼마나 생생한 황홀경을 담고 있는지 이제서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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