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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오스카, 네 열정을 응원해!
이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한다?
‘파란만장’이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기묘하고도 기막힌 이야기.
자신의 생활 영역 어느 구석에 외계의 공간 하나 떡 하니 마련해 놓고 혼자만 알 수 있는 비밀의 문을 통해 이곳(현실)과 저곳(외계)을 자유롭게 오갈 것 같은 오스카 와오. 요정어와 외계어를 툭툭 내뱉는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일단 돌진하고 본다. 소설쓰기와 책읽기에 빠져들면 지구가 두 쪽이 난다해도 꿈쩍하지 않을 녀석. 오스카 와오는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지금껏 체계화시켜왔던 일반적인 혹은 복잡다단한 소설 속 주인공의 계보를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느,쪽,에 이 녀석의 자리를 배치해야 한담? 참 난감해진다.
오스카를 만나는 즉시 당신은 정신을 ‘완전무장’하거나 혹은 ‘무장해제’ 해야 할 것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넘쳐나고, 여기저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 사건이 축제날 폭죽처럼 마구 잡이로 펑펑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언제 마지막 한 방이 당신 코앞에서 갑작스레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짝 경계를 하거나, 아예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어떤 놀라움이 당신을 소스라치게 만들지라도 예상했다는 듯 싱긋 웃어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벼랑 끝에 몰려도 살아날 궁리를 하지 않는 오스카 와오. 대신 끝없는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가장 멋들어진 오기를 선보인다. 살아있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후회 없이 죽기 위해서였을까? 결론이 궁금하다고? 그렇게 급할 건 없지 않은가. 이미 제목에서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라고 밝혔으니 결론은 짐작한 바와 일치한다. 다만 이 녀석이 살아온 과정이 얼마나 놀랍기에 ‘놀라운 삶’이라고 단정 짓는지 그 과정부터 음미해 보는 게 순서일 듯하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아벨라르(할아버지)-벨리시아(엄마)-오스카 와오(나)와 롤라(누나)로 이어지는 데 레온 가문의 3대에 걸친 저주(이하 푸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푸쿠의 발로인 트루히요 정권과 그로 대변되는 어긋난 남성성이 맞물리면서 ‘사랑’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부각한다. 도미니카 공화국을 독재로 다스렸던 트루히요 정권 하에서라면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가정이 하나도 없다. 여자라면 누구나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트루히요의 여자일 수 있는 시대였으므로. 지나치게 아름다운 부인과 딸을 지켜내기 위한 아벨라르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여기서부터 데 레온 가족에게 뻗치는 푸쿠의 역사가 시작된다. 마지막에 태어난 벨리시아 역시 가문의 우성 유전인자를 부여받아 푸쿠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철저하게 버림받는 벨리시아. 그 중 단연 으뜸은 갱스터에게서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이 그 악명 높은 트루히요의 여동생 남편이라니. 사탕수수밭에서 벌어진 무자비한 푸쿠의 정체는 앞으로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함구해 두겠다.
그렇다면 오스카는? 가문의 유전적 혜택과는 동떨어진 14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비호감 외모의 청년으로 자라난다. SF에 심취한 꼴통(p.32)에 장르소설 절대 마니아(p34)다. 종말론적 공상(p.41)을 즐기고, 롤플레잉게임과 만화책, 판타지 소설(p.311)에 빠져 산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까지 키스 한 번 못해본 숙맥,을 가장한 여자 밝힘증 환자다. 아무 여자한테나 성급하게 들이댄다. 그것도 여자가 아연실색할만한 ‘독수리 오형제’에 나오는 대사를 읊어가면서. 믿기지 않겠지만 오스카는 그런 녀석이다. 자신의 상황과 상대방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단 부딪쳐 본다. 열이면 열 아니 백이면 백, 그를 아는 모든 여자들은 그를 싫어한다. 죽는 날까지 한 번도 여자를 품어보지 못할 거라는 공포를 늘 안고 살지만, 표면적으로 오스카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 놈의 무모한 용기는 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여자들 앞으로 불쑥불쑥 존재를 드러낸다.
책을 읽노라면 오스카의 이런 외형적 악조건에서 시작된 애정 불운의 운명(p.30) 역시 푸쿠의 서막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트루히요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그가 휘두른 푸쿠 또한 사라졌다 할지라도 푸쿠는 세대를 걸쳐 여러 가지 형태로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이본 피멘텔과 같은 운명의 여인 같은 모습으로.
이본은 푸타(창녀)계의 퇴물에 해당하는 서른여섯 살의 여인이다. 그녀에게는 마치 트루히요를 연상케 하는 카피탄이라는 경찰관 남편이 있다(물론 처음엔 그저 그렇게 주위를 맴도는 남자친구들 중 한 명이었지만). 늘 사랑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오스카가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이본을 놓칠 리 없다. 이번만큼은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느릿하게 접근을 시도한다. 경찰관이 몇 번이나 경고(사실은 협박과 폭력)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오스카 앞에 화려하게 등장한 사랑의 실체는 그의 눈과 귀를 모두 멀게 한 것인가. 라 잉카(할머니)의 말도 벨리와 롤라의 말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어도 좋아’라는 일념으로 앞으로만 돌격하는 오스카의 사랑은 극(단)적이다. 사탕수수밭에서 처절하게 외쳐댄 사랑고백을 듣고서야 오스카가 바라던 진정한 사랑이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가 꿈꾼 사랑은 트루히요처럼 욕정을 채우는 사랑이 아니었다. 연인들만이 알 수 있는 친밀한 조우(p.389), 누군가의 절대 권력으로 어쩔 수 없이 결박당하는 사랑이 아닌 꿈결 같은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망하던 ‘더 강력하고 따뜻한 세상(p.385)'을 죽음 직전에야 깨닫게 된 오스카 와오. 진작 그 황홀경을 경험했더라면 오스카는 과연 끝까지 저돌적인 정면 승부를 펼쳤을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됐다.
오스카라는 캐릭터가 독특하다는 것 정도는 처음부터 알았지만 이렇게 ‘똘’기로 똘똘 뭉친 녀석일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남은 자의 가슴에 선명한 아픔을 새기고 떠난 오스카 와오. 전 생애를 걸쳐 사랑을 향해 고군분투한 그의 열정에 나름 고귀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쯤에서 롤라의 과거 연인이자, 한때 오스카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이 책의 화자 유니오르를 소개해야겠다. 그의 눈을 통해 속속들이 드러나는 데 레온 가문의 3대에 걸친 저주는 분명 공포스럽고 극악무도하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독자는 이 저주 앞에서 벌벌 떨기보다 오히려 흥미롭게 빠져들게 된다. 바로 유니오르의 유쾌한 화법 덕분이다. 바로 옆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담꾼처럼 때론 거칠고 때론 진솔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스카의 삶 전반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은 아픔을 승화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가 배어있다. 급박하게 소용돌이치는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벨리시아를 악인으로부터 구출하면서 데 레온 가족의 사파(안전하게 지켜주는 주문)역할을 자청한 라 잉카의 조용한 행보 역시 눈길을 끈다.
이처럼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와 주술적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도 중심에는 아벨라르, 벨리시아, 롤라, 오스카, 유니오르의 연애사가 있음을 잊지 말자. 사랑 앞에서라면 무턱대고 용기를 발휘하는 기묘한 녀석, 그럼에도 지지리 연애운이 없는 녀석. 그의 삶에 이렇게 기막힌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래서 조금은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당신이 꿈꾸는 사랑에도 반전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정말이지, 목숨까지 내놓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마음속에 그득 들어찬 사랑에 대한 열망을 당신은 어떻게 감당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 오스카 와오를 만나 그 길을 찾아 나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