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숲
고은 지음 / 신원문화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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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 권의 책에 기뻐하라
 - 고은, [개념의 숲]을 읽고

  ‘오늘도 나는 가르치는 자이기보다 배우는 자의 축복 속에 있다(p.209).'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낸 책 [개념의 숲]. 여기에는 세상 개념에 대한 단상을 모아 놓은 ‘개념의 숲’과 철학적 에세이를 담은 ‘지평선’이 수록되어 있다.

 고 시인 이전에도 여러 작가들이 개념을 재해석해 정리한 책을 집필한 바 있다. 몇 권의 책을 읽어 봤지만, 솔직히 이번처럼 어려웠던 적은 처음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전을 뒤적이게 만드는 책. 한 줄 이해하고 나면 다른 한 줄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잠시 쉬었다 가기를 청한다,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할라치면 다시 첫 줄로 돌아가게 만든다. 시인의 메시지는 개인과 한 국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주와 맞닿아 있다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의 경험과 사유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자유의 날개를 달고 경계 없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는 듯하다. 이 거대한 메시지는 마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고귀한 성역과도 같다.
 한 마디로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게 된다. 바로 시인이 보여주는 사유의 깊이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세계를 초월한 듯 우주와 영적인 영역까지 넘나들고 있다. 시인의 체험과 깨달음이 알알이 박혀있는 글들이기에 쉽게 손에서 눈에서 내려놓을 수 없다. 단번에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내 경험과 사유의 세계가 깊어지는 어느 날, 이 에세이가 삶에서 하나의 지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편의 그림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다. 글과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한 사람의 영혼을 온전히 투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가벼이 보고 넘길 수 없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은 없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생각을 붙들어 두게 만드는 그림들.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표지에 등장한 ‘인내’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에세이에 나오는 ‘라이보리’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고 제멋대로 해석해 본다. 사방 30cm, 깊이 50cm의 모래 상자 안에서 라이보리가 살아남기 위해 3개월 동안 뻗어 내린 뿌리의 길이는 무려 1만1,200km라고 한다. ‘그 네모진 상자 안에서 영양분을 필사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그 기나긴 뿌리의 헌신적인 역할이야말로 한 생명의 숨은 바탕이었다(p206)고 시인은 말한다. 땅위로 보이는 굵은 가지와 탐스런 열매, 무성한 잎들을 피워내기 위해 땅 밑에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로 우뚝 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고와 열정이 필요한 지 ‘인내’라는 작품이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반성을 하게 된다. 존재를 드러내기에 급급하지 않고 그저 무언가의 배경이 되어 내면을 다스려본 적이 있었던가. 민족을 위해 투쟁하신 애국지사를 위해 최소한의 예우라도 갖춰본 적이 있었던가. 보는 이 하나 없어도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기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깨닫지 못하고,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지나친 일들이 많기만 하다.

 고전속의 금언들이 이처럼 이토록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고전을 넘어서는 힘이다(p.220)라고 시인은 말한다. [개념의 숲]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온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고 시인의 세계를 살펴본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려 했다. 그랬더니 받아들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읽고 또 읽을수록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에세이를 수록한 ‘지평선’에서는 느낀 바가 실로 크다. 오랜 연륜이 묻어있지 않다면, 그 세월보다 더 깊은 억 만 겹의 사유가 있지 않았다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이치들. 빈곤한 내 영혼이 고 시인을 통해 융숭하게 대접받은 기분이다.

 살아 있는 동안 읽은 것보다 읽을 것이 얼마나 더 많은지.
 읽을 것이 없는 것.
 더 이상 읽어 행복할 필요가 없는 것.
 읽어 오늘의 영혼이 어제의 영혼이 아닌 경지로 나아가는 축복이 제거된 것.
 그것들이 내 지옥이리라. 한 권의 책 기뻐라.(p.245)

 시인의 말처럼 나는 [개념의 숲] 한 권에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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