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
고바야시 요리코 외 지음, 최재혁 옮김 / 돌베개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빛이 말을 걸어오다

 마치 멈춰있는 듯 움직임을 절제하는 화폭 속 인물들. 그림 전체를 감도는 온화한 빛이 미세한 움직임마저 제어하고 있는 느낌이다.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멈춰있는 듯 간결하게! 베르메르의 작품에는 오묘한 절제의 미학과 탁월한 빛의 마술이 숨어 있다.

 [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를 처음 읽게 된 건 이 년 전 회사 동료의 권유 때문이었다. 빛의 거장이라 하면 누구나 렘브란트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자신은 주저앉고 베르메르를 꼽겠다던 동료의 말에 호기심이 동해 읽게 된 책. ‘진주 귀고리 소녀’ 외에는 베르메르의 작품을 몰랐던 당시 이 책은 흥미로움 자체였다. 우연한 기회에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 보게 되었다. 다시 만난 베르메르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일까.

 이 책은 시작이 아닌 것처럼 시작해서 끝이 아닌 것처럼 끝을 맺고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1장부터 8장까지는 고바야시 요리코가, 마지막 9장은 구치키 유리코라는 저널리스트가 집필을 맡았다. 그러다 보니 첫 시작과 끝맺음이 불분명한 듯 보인다. 급작스럽게 시작해 급작스럽게 이야기를 끝맺고 있어 다소 당혹스럽지만, 차례를 따라 읽다 보면 베르메르를 만나 델프트를 거닐 듯 자연스럽게 그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중의적 의미와 군더더기를 배제한 채 최소한의 표현만을 고집한 베르메르와는 달리 그를 설명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작가는 베르메르에 대한 기존 연구를 소개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단정’보다는 근거 있는 ‘추측’을 통해 가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덕분에 다 읽고 나면 베르메르에 대한 여러 가설 중 어느 것이 옳다고 손을 들어줄지 고민하게 된다. 베르메르에 관한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 가며 나름의 판단 기준을 세우고 싶게 만드는 책. 유수의 미술학자와 연구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화가, 베르메르. 남겨진 작품이 얼마 없기에, 수많은 위작 시비에 휘말렸기에 더 매력적인 베르메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에는 베르메르의 특징적 화풍을 보여주는 것을 시작으로 베르메르가 평생을 살았던 도시 델프트를 소개하고,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 및 시대적 상황을 보여준다. 20여년에 걸쳐 변모된 그의 작품 세계를 시대 순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베르메르에 얽힌 위작 시비와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17세기 화가의 작품을 21세기 첨단 장비를 통해 재해석한다는 점이다.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는가 하면, X선 사진을 이용해 그렸다 지워진 그림의 원형을 재현해 내기도 한다. 최소한의 등장인물과 최소한의 소품만을 그리고, 등장인물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베르메르의 절제의 흔적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작업실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해 보이는 장면을 그대로 그렸을 거라는 기존의 가설을 반박하는 의견도 흥미롭다. 건축가들이 재현해낸 베르메르의 집과 작업실의 구조, 베르메르가 선택했던 원근법의 조작 등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반박하는 좋은 예가 된다.

 베르메르의 작품을 보면 유사한 구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 작가가 만들어낸 디지털 유작(p.160)만 보더라도 베르메르가 선호한 구도를 짐작할 수 있다. 베르메르는 한 명의 인물을 근접 묘사하거나 창이 있는 안쪽으로 깊이 있는 실내 공간을 만들어 인물을 배치하는 구도(p.55)를 즐겼다. 네덜란드의 흐린 날씨로 인해 창문과 빛의 의미가 각별했던 만큼 베르메르의 그림에서도 창과 빛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주로 왼쪽에 위치한 창을 통해 서서히 번져오는 빛은 화폭은 물론 보는 사람의 마음에까지 스며드는 느낌이다. 특히 그가 여러 차례 그려낸 노란색 의상은 빛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은은한 (노란 빛깔의) 후광이 느껴진다. 베르메르의 작품을 통해 한 줄기 빛이 내 마음에도 스며들었다. 무심하게 지나쳤던 노란색이 온화한 햇살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기분이다.

 43년을 사는 동안 20여 년 간 화가로 활동한 베르메르는 우리에게 3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남겨진 작품이 얼마 없기에 잦은 위작 시비에 휘말렸던 화가 베르메르.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사라진 작품들. 200년이 지나서야 재조명된 베르메르는 그 존재가 알려지고 난 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견이 엇갈리는 화가다. 그에 대한 기록과 정보가 부족하고, 알려진 작품이 몇 점 되지 않기에 더 심도 있는 연구와 관심이 필요할 것 같다. 어쩌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베르메르의 작품이 어딘가에서 세상 빛을 갈구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책에 소개된 작품을 찬찬히 다시 보고 있다. 무심한 듯 우리를 바라보는 화폭 속 인물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표정 없는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그 속에 특별한 표정이 담겨 있음을 뒤늦게 눈치 챈다. 화폭을 감도는 빛이 수만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일까. 빛이 말을 걸어온다. 마음을 녹여 이야기를 쏟아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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