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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평점 :
어느 작가의 오후
작가 _ F. 스콧 피츠제럴드
번역 및 편집 _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랑한 작가
피츠제럴드의 후기 작품집
여덟 편의 단편 소설과
다섯 편의 에세이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어느 작가의 오후는 어떤 책일까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 편집한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가가 되기 전부터 영미문학 번역가로 활동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여러 작가의 작품을 번역해 왔는데요, 특히 피츠 제럴드의 작품에 애정을 쏟았다고 해요.
《어느 작가의 오후》는 2019년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편집하고 번역해 일본에서 화제가 된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북펀딩을 통해 출간되었는데요, 피츠제럴드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남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 같아요. 사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위대한 개츠비》 외에는 잘 모릅니다. 그마저도 개인적으로 호감 가는 작품은 아니고요. 그런데 하루키라니!
하루키는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알아가고 싶은 작가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은 건 아니지만 일단 소장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다 마음이 동하면 읽기도 하고요.
가장 탐독했던 시기가 《1Q84》 때이니 좀 오래되긴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하루키를 다시 읽게 되었지요.
무슨 심리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루키는 곁에 두고 싶은 작가임에는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 그가 애정한 작가라니. 피츠제럴드에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답니다.
한 권의 책을 알아가기 위해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 소개를 이렇게 찬찬히 읽은 적은 처음입니다. 책 소개를 읽고 또 읽으며 피츠제럴드에 대해 피츠제럴드를 애정하는 하루키에 대해 점점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어요.
피츠제럴드가 이른 나이에 작가로서 명성을 쌓은 후 빠르게 쇠퇴해갔던 그 면면들이 텍스트를 넘어 거대한 형상화로 저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가를 이해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지요.
무엇보다 하루키의 몫이 큽니다. 하루키가 번역한 후기 작품들이, 하루키가 남긴 작품 해설이, 그 속에 담겨 있는 작가에 대한 애정이 피츠제럴드를 알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작가를 알아간다는 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는 마중물이 되어 준다는 사실을 《어느 작가의 오후》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읽어볼 일 없다 생각했던 《위대한 개츠비》를 오랜만에 꺼내놓아야겠습니다.
수록 작품을 살펴볼까요
피츠제럴드의 전성기 작품이 아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후기 단편들을 직접 발굴하고 수록한 책.
누구보다 화려했던 삶을 살았던 그의 말년(이라 해도 고작 마흔 초 중반)은 암울하고 내리막길에 가까웠습니다. 아내는 정신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며 혼자서 딸을 양육해야 했지요. 거대한 빚까지 그의 나날을 압박해왔습니다. 후배 작가 헤밍웨이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고 해요.
생활 기반 글을 써왔던 그에게 추락하는 삶은 더 이상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할 만한 매력적인 글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그의 후기 소설과 에세이에 담겨 있습니다. 작가의 상황을 알고 작품을 읽으니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피츠제럴드가 써 내려간 한 글자 한 글자가 그의 스산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처연하고 쓸쓸하게 다가왔어요.
이 책을 위해 내가 고르고 옮긴 작품은 주로 그가 말한 그대로 '자기 몸을 축내며' 살았던 암울한 시대에 내놓은 작품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깊은 절망을 헤치고 나아가려는, 그리고 어떻게든 희미한 광명을 움켜쥐려는 긍정적인 의지가 줄곧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피츠제럴드의 작가로서의 강인한 본능일 것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 엮은이의 글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년의 피츠제럴드에게서 '어떻게든 희미한 광명을 움켜쥐려는' 긍정의 희망을 엿봅니다. 작품을 번역하고 해설을 더하면서 하루키는 앞선 시대의 작가를 다시금 세상과 조우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1900년대 초중반 미국의 시대상과 맞물려 소용돌이치듯 변해가는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들은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쇼의 규모는 더 커졌고, 빌딩은 더 높아졌으며, 도덕은 더 느슨해지고, 술은 더 싸졌다. 하지만 이 모든 편의가 사람들의 즐거움에 기여한 바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일찍 지치고 쇠잔해졌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벌써 딱딱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갔다.
(…)
이제는 도시의 모든 구역이 얼마간 유해한 독소를 내뿜었다.
_ 에세이, 〈나의 잃어버린 도시〉 중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서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채 책을 읽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싶어요. 수년이 지나 다시 만난 그의 작품 《어느 작가의 오후》에 수록된 〈이국의 여행자〉가 이해되는 걸 보면 말이지요.
책 속 몇 작품을 살펴봐 드리겠습니다.
단편 소설 <이국의 여행자>
마치 유령과도 같은,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와 맞닥뜨린다면 어떨까요?
눈에는 평온함이 깃들지 않았고 끔찍이도 자기중심적일 것 같은 사람. 빰은 핏기 없이 창백하고, 눈 밑에는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암시하는 흔적이 있습니다. 어딘가 무기력해 보이는 건강하지 못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 약간의 혐오감마저 드는 그녀!
또 한 사람, 너무 나약하고 야비해 보일 만큼 방종해 보이는 얼굴의 그!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결국 마주해 버립니다. 그리고 알게 되죠. 그들이 누구인지를!
<이국의 여행자>는 1920년대 유럽을 자유롭고 우아하게 여행하는 유복한 젊은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순수하고 행복했던 그들이 이국 땅에서 점점 더 변해가는데요, 하루키는 이 이야기를 조용하면서도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불온함을 담은 소설이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이 소설이 좀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마지막 장면은 섬뜩할 만큼 압권입니다. 지나온 삶을 자연스레 떠올려볼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앞으로의 삶도 함께. 이 소설을 하루키가 책의 처음에 배치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국의 여행자> 중에서
인생은 그 어떤 쇼보다 더 좋으니까 (21)
인생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뭔가가 손상되었고, 둘 사이에도 의견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는 선례가 생겼다. (24)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끼어들었어.(55)
"우리가 계속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면 -진실로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면- 우린 뭔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거야. 이젠 그렇게 해보자. 그럴 거지, 넬슨?" (55)
"우리는 왜 평온함과 사랑과 건강을 차례로 잃어버렸을까?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누가 우리에게 그 이유를 말해준다면, 우린 분명 노력할 수 있을 거야. 난 정말 열심히 할 거야."(60)
단편 소설 <어느 작가의 오후>
《어느 작가의 오후》의 주인공은 언뜻 보아 성공한 듯한 작가입니다.
잡지에 실을 단편 소설을 쓰는 중이지요. 소설이 막히자 오랜만에 외출을 합니다. 2층 버스에 올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서 영감을 추출해 냅니다. 그러다 대학 풋볼 경기장에 시선이 머뭅니다. 사람들이 롤러를 밀어 잔디 고릅니다. 그 장면을 보며 소설의 큰 줄기를 써버립니다. 거리를 걸으며 눈에 들어오는 것들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 없습니다. 단골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는 것으로 오후 한나절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지요.
그런데, 이 짧은 소설 속에 피츠제럴드가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쓸 당시 그는 딸과 함께 볼티모어 시내 아파트에 살았다고 합니다. 신경쇠약에 걸린 아내 젤다가 현지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입니다. 글도 잘 써지지 않고 몸도 좋지 않았으며 거액의 빚까지 지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형식은 어디까지나 픽션이지만 그 안에 그려진 심경은 대부분 피츠제럴드 자신의 것이었으리라'라는 하루키의 설명이 이 소설을 그냥 흘려 읽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래 인용문에도 있지만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모든 것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을 무렵, 피츠제럴드의 심경이 담겨있는 것 같아 이상하게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사실 저는 피츠제럴드를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로밖에 모르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랑했던 하루키의 시선에서 <어느 작가의 오후>가 얼마나 아픈 소설이었을지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키가 덧붙인 설명이 하나의 작품을, 한 명의 작가를 더 깊고 풍부하게 느끼게 해주는 책입니다.
<어느 작가의 오후> 중에서
"완벽한 신경증 환자로군." 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디어의 부산물이자 꿈의 찌꺼기인 인간이야."(205)
그는 전쟁 중 순전히 허세로 기관차 한 대를 징발해, 무단이탈로 벌받는 일을 피하려고 정식으로 그 기관차를 몰고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간 일이 있다. 그렇게 호기로웠던 그는 지금 거리 모퉁이에 얌전히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206)
문득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208)
마지막으로 춤을 춘 지도 꽤 오래되었다. 아마 지난 5년 동안 춤을 춘 건 이틀 밤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낸 최근 책에 대한 서평을 보면, 그는 나이트클럽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언급되었다. 서평은 그를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마음속에서 울리는 그 말의 무언가가 순간적으로 그를 아프게 했고, 눈 안쪽에서 나약함의 눈물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것은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15년 전의 상황과도 비슷했다. 사람들은 그때 그가 '치명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했고, 그래서 그는 타고난 재능만 있는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해 모든 문장에 노예처럼 땀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210)
《어느 작가의 오후》를 마무리하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이 매력적인 소설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까요?
작가가 사랑한 작가!
마흔넷,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난 피츠제럴드를 일흔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시 세상과 조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집은 생각보다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솔직히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한 책이 두 명의 작가와 그들의 수많은 작품을 더 깊이 알고 싶게 만들다니요!
당시 격변하던 미국 상황. 그 속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작가 피츠제럴드는 그의 쓸쓸히 퇴장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그에게 그 마지막 작품이 희망의 불씨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츠제럴드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 혹은
두 작가 모두를 애정 하시거나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보고 싶은 독자라면
《어느 작가의 오후》를 권해드립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와 작별을 고할 때면 플라자 호텔 옥상에 올라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둘러보는 것이 나의 습관이었던 것처럼, 나는 이번에는 가장 높고 가장 최근에 지어진 마천루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옥상에 올라갔다. 그때 나는 이해했다.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이 도시의 가장 큰 오류를, 판도라의 상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뉴요커로서 가슴 가득 차오르는 자부심을 느끼며 이 빌딩에 올랐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뉴욕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빌딩숲이 아님을, 끝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어느 방향을 보아도 뉴욕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결국 전원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유일하게 끝이 없는 것인 녹색과 푸른색의 드넓은 자연 속에 묻혀버리는 것을 나는 가장 높은 빌딩 옥상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결국 뉴욕은 하나의 도시일 뿐, 우주가 아니었다는 오싹한 깨달음과 함께, 내가 상상 속에서 키워온 그 빛나는 거대한 구조물이 통째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에세이<나의 잃어버린 도시> 중에서
인플루엔셜 출판사, 도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