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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그루 열두 가지
박정미 지음, 김기란 그림 / 책읽는수요일 / 2021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그루 열두 가지
박정미 쓰고 김기란 그림
책방 밭 책방지기님의 계절 담은 편지
약 3여 년 정도 매달 블라인드 책을 받아본 적이 있다. 간단한 개인 정보와 관심사 등 몇 가지를 기재하면 취향 저격 책을 보내주는 시스템이다. 매달 책이 도착할 때쯤 되면 그 설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책 한 권으로 인해 한 달이 즐겁고 설렐 수 있는 값지고 귀한 경험을 했다.
『 한그루 열두 가지』는 순창의 작은 서점 '책방 밭'에서 책 정기구독자분들에게 일명 '보따리'라고 이름한 책꾸러미를 보내면서 곁들인 편지글을 모아 펴낸 책이다. '보따리'에는 책방 지기가 선정한 책 한 권과 그 지역의 농작물도 함께 배송된다고 한다. '책방 밭'의 운영자이자 농부의 삶을 살고 계신 박정미 작가의 전직은 카피라이터. 그래서일까? 매달 정기구독자에게 보내는 글귀들이 마음을 두드린다. 꼭 '보따리'를 받아보고 싶게 말이다.
1월부터 12월까지 때마다 다른 농작물과 그 농작물을 수확한 농부에 관한 이 이야기는 자연의 품에서 멀어진 나의 삶에 생기로움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하필 책을 읽은 시간이 새벽이었고, 따뜻한 차 한 잔이 좋았고, 혼자 느껴보는 고요함에 온전히 빠져들어서였을까. 마음이 활자 속으로 들어가 바지런한 농부의 발걸음을 따라다니며 자연의 시간과 사람의 진심에 가닿은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분들이 수확한 농작물을 받아보고 싶고, 이런 따뜻한 글을 쓰시는 책방 지기님의 편지가 궁금해졌다.
알라딘 북펀드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어 펀딩에 참여했었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책 정기구독 서비스를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 다양하다. 그런데 책과 농작물이라니. 이 생경한 조합이 신선했고 궁금해서 북펀드에 참여했었다. 『 한그루 열두 가지』는 기대 이상으로 따뜻한 책이다. 마음이 헛헛할 때 한 번씩 꺼내 읽고 싶게 말이다. 여기에는 책방 지기님의 글과 더불어 그림을 담당한 공방 '달실' 김기란 작가님의 판화도 한 몫을 차지한다. 책장만 스르륵 넘겨봐도 예쁜 엽서를 보듯 기분 좋아진다.
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진심이 느껴지는 글귀들에 마음이 일렁인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면서도 그 변화무쌍함을 이겨내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오늘 식탁에 오른 한 끼의 밥상에 얼마나 많은 분들의 노고가 녹아들었을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책방 지기님을 통해 농사를 지으며 삶의 터전을 지키고 계신 분들의 고단함 너머의 단단한 내공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
『 한그루 열두 가지』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살아본 적이 오래인 도시 사람들에게 그간 잊고 지낸 자연의 변화 과정을 매달 달라지는 수확물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농촌과 도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책방 지기님의 정성 어린 편지는 농작물을 수확하기까지 농부의 삶에 경의를 표하게 한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바로 '책방 밭'을 검색했고, '보따리'를 신청했다. 2월에 받아볼 첫 보따리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책방지기님께서 보내주시는 책과 농작물과 편지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조금은 더 세심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2022년은 자연의 시간을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다. 책방 밭 보따리를 통해서!
책 속 밑줄 긋기
겨울입니다. 땅이 얼면 사람 손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지요. 세 계절 동안 부지런했던 몸과 마음에 휴식과 위로를 줍니다. 저기 온통 하얗게 눈에 덮인 논밭은 언제 푸르렀었나 싶습니다. 빈 겨울 논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때를 놓칠까 동동거리던 봄도, 태풍과 장마에 잔뜩 겁을 먹던 여름도, 이만하면 됐다고 욕심을 내려놓던 가을도, 전부 저기 쌓인 눈 아래에 있습니다. 저 눈이 다 녹으면 또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겠지요. 자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저 자연의 일부로 그 속에 내가 거기 있습니다. 사계절 열두 달을 내 삶으로 잘 살아내었구나 싶습니다. (17p)
무엇을 짓도록 시골이 우리를 자꾸 부추기는 이유가 혹시 직접 만들어가는 '시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24p)
내가 어디에 사는지에 따라 계절은 달리 살아집니다. 이제 나에게 봄은 꽃을 찾는 계절이 아니라, 꽃피울 씨앗을 심는 계절이 된 것입니다. 아쉬운 겨울을 붙들고 있지 않고 때를 지켜 심어둔 씨앗들이 싹을 낼 때면 이렇게 서툴고 모자란 농부에게도 봄이 와주는 것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다시 돌릴 수 없는 올해의 봄을 놓치지 않은 것에 마음을 쓸어내립니다. (29p)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밭을 이어가며 쌓이는 이야기까지 키울 수는 없겠지요. 그것이 농촌의 '밭'이 그저 흙이 아닌, 살아 있는 '품'일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계속 지켜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요. 농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눈앞에 펼쳐진 논과 밭들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허투루 보아지지 않습니다. 혹여 수확을 놓친 밭을 만나면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도 되고, 아끼는 마음도 저절로 생겨납니다. (51p)
햇빛이 길게 드는 좋은 조건의 자리에 자리한 2천 평 규모의 감 밭을 농부님들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직접 풀을 베었습니다. 값을 더 받기 위해 이른 수확을 하는 대신 서리가 두 번 내릴 때까지 기다려 제맛을 품은 대봉감을 보냅니다. 열매를 맺기까지 고군분투한 낯설지만 재미있는 모양의 감도 함께 넣었습니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다들 애쓰며 살고 있는 농부들 모습 같기도 합니다. (6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