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미식수업 - 먹는다는 건,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후쿠다 가즈야 지음, 박현미 옮김 / MY(흐름출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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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만남과 같다. 특히 한국 사람 사이에서 '언제 밥 한 번 먹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에 맞춰 건네는 인사 말이기도 하고, 정말 언제 한 번 약속을 잡아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 친해지고 싶다는 의사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과 밥을 함께 먹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애초에 친구가 적어서 고등학교 시절 급식을 먹을 때 말고는 타인과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잘 없다. 정말 1년에 다섯 손가락으로 그 수를 세어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로 타인과 함께 밥을 먹는다.


 여기에서 사교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나는 그게 편하다. 혼자 돈까스를 시켜 먹으면서 주변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글의 소재를 찾고, 밥을 먹으면서 글을 구상하는 일을 즐긴다. 조금 이유를 붙이자면 그렇고, 그냥 혼자가 좋다.


 1인 가구 세대가 되면서 이렇게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은 이제 우리에게 정말 흔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래도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며 먹고 싶은 게 욕심인지, 한창 먹방이 유행한 적이 있다. 먹는 모습을 아프리카 TV를 통해 보여주며 온라인 상에서 교류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동을 통해서 적막함을 깨고, 쓸쓸함을 덜 느끼고, 재미있게 혼자서 밥 먹는 행위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행동이 썩 보기 좋지 않다. 정말 딱 보기에도 혼자서 무리해서 먹는 모습이고, 식습관 예절이 조금 좋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책 <나 홀로 미식수업>은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질을 신경 쓰고, 단골집을 만들거나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저자의 경험담을 적어 놓은 책이다. 그냥 우리가 보는 흔한 먹방과 달리 좀 더 예의를 갖추고, 자신을 위해서 먹는 것. 그리고 사람과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다.


 나는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횟수가 1년에 1회도 되지 않을 정도이기에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공감이 조금 어려웠다. 일본의 라멘집 같은 경우는 일본에 가본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가게가 늘어나고 있어 공감할 수 있었지만….


 아무튼, 그렇다. 혼자서 밥 먹기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책 <나 홀로 미식수업>이라고 보면 된다. 그냥 혼자서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 먹거나 빵, 패스트 푸드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약간의 경고가 담긴 책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하지만 책은 딱히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저자가 일본의 저자라 우리와 조금 공감대가 다르기도 하고, 레스토랑은 나 같은 사람과 너무 멀어 너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자신의 음식 소비 수준이 높다면, 공감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미리보기를 통해 어떤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읽어본 이후에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괜히 오늘 저녁에 야구를 보며 치킨 먹을 돈으로 책을 구매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를 탓하여도 소용이 없으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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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괜찮은 당신
장하오천.양양 지음, 신혜영 옮김 / 이야기나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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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과일은 에틸렌을 내보내 주위의 덜 익은 과일까지 숙성시킨다. 달지 않은 감도 단 배와 함께 두면 곧 달콤해지기 마련이다. 예쁘지 않은 그릇도 화려한 요리를 만나면 빛을 발한다. 누구나 사람을 잘못 만나 어두웠던 과거가 있다. 어둠 속에서는 곁에 누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둠이 걷히고 밝은 하늘이 드러나면 곁에 있는 열정적이고 꿈이 크며, 반짝반짝 빛나는 그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나와 근시남은 캐나다에 갔다 온 친구를 만났다. 저녁 내내 이어지는 친구의 여행담을 들으면서 그는 테이블 위에 팔을 괴어 비스듬히 기대앉아 자기만의 상상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왼손은 핸들을, 오른손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꼭 잡고 토론토의 국도를 신나게 달리는 자기 모습을 말이다. 근시남은 그 친구가 정말 부럽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도 그런 장면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미래를 향해 가는 길이 힘겹게 느껴진다면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자.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받는 영향도 꽤 클 것이다.


여러분이 꿈 꾸는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자. 우주는 폭발과 동시에 은하수를 만들기도 했지만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자기장, 그리고 그들 간의 비슷한 운명도 만들어냈다.

모두 모두 더 멋진 사람이 되기를! (본문 200-201)


 우연히 책을 알게 되어 읽은 장하오천과 양양 두 저자가 함께 만든 <지금 이대로 괜찮은 당신>은 정말 좋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이었다. 우리가 평범하게 만나는 힐링 도서로 분류하는 에세이, 자기계발서 같은 책과 달리 마음 속에 온기가 자연히 샘솟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꽤 긴 글이지만, 윗글을 가져온 이유는 오직 하나다.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 곁에 두는 소중한 사람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괜히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게 아니다. 내가 패배주의에 빠져있다면 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이 모두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꿈 꾸는 사람을 곁에 두고, 도전하는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면, 우리도 저절로 도전할 수 있게 된다. 잘 익은 과일은 덜 익은 과일까지 숙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분명히 나는 인생을 잘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당신>은 내가 글에서 이야기한 것보다 더 평범하게 사람의 사는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내 이야기 같다. 내 친구 이야기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처럼 쉬는 날에는 이런 책을 읽으며 잠시 낮잠을 청하고 싶어진다.


 한 장의 사진, 한 장의 글, 그리고 이야기. <지금 이대로 괜찮은 당신>이라는 책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그냥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나도 이런 사진, 이런 생각, 이런 글을 통해서 나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자 지금 살고 있다.


 삶에 지쳐 있다면, 괴롭다면, 힘들다면,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 위로하며 축 쳐진 고개를 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법 같은 힘을 이 책은 가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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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의 힘
은지성 지음 / 황소북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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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희망을 버릴 뿐이다."

이 말은 리처드 브리크너의 <망가진 날들>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 소설은 불의의 사고로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그는 꿈과 희망을 잃은 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하루는 주인공이 자신의 간병인에게 물었다.

"내게 미래가 있을까요?"

간병인이 대답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로는 희망이 없죠.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무한대의 희망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만 120여만 부가 팔린 '행복한 부자' 시리즈의 저자 혼다 겐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잘 모르고 종종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혼동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정의 가계부를 쓰기를 권햇다.

하루 중 기뻤거나 유쾌했던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집중했던 순간, 남이 자신에게 잘한다고 한 일, 겁이 나고 부담스러웠던 순간,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지루했을 때 등 감정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결산해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덧붙여 꿈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강조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인생을 즐긴다. 어려움이 닥쳐도 기꺼이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꿈이 없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남에게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삶이 무미건조하다면, 꿈을 리모델링 할 때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라."

직관은 목표가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꿈이 구체적이거나 그 열망이 강할수록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본문 121)


 도서 <직관의 힘>을 통해 읽을 수 있었던 짧은 이야기. 하지만 이 짧은 이야기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디에서 휘몰아치는 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무심코 고독해지고, 점점 내 삶에 대한 회의가 휘몰아치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울거나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나는 꿈을 잠시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언제나 내 직관에 따라서 선택을 했고,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흔들리는 이유는 분명히 내가 가는 이 길을 스스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히 오늘 내가 한 일, 즐거운 일, 우울한 일, 그런 일을 떠올려보면서 잠시 생각의 늪에 빠지고 싶다. 천천히 울리는 가을 빗소리는 등을 돌리고 있던 마음 속의 어둠과 마주하게 해준다. 그리고 나와 대화를 통해서 오늘 힘든 이유를 찾고, 지친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싶다.


 책 <직관의 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지 못했던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단지, 그냥 읽어보는 것으로 좋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직관의 힘을 믿고,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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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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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떠나고 싶다. 가을 단풍이 절정에 달한 지금 이 시기에 나는 유독 그런 감정을 강하게 느낀다.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유럽 도시의 풍경을 보고 싶고, 아직 내가 보지 못한 계절이 다른 일본의 풍경이 보고 싶다. 가을의 단풍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여행은 그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래서 여행은 누구나 가슴 속에 묻고 있는 꿈이다. 하지만 부끄러운 꿈이기도 하다.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면, 곧장 떠나면 되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어디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면, 우리는 '네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이라는 핀잔을 들으며 '그러니까.'라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으니까.


 적금을 해제하고, 가진 물품을 처분해서 유럽 혹은 일본으로 가는 최저가 항공의 비행기 값을 예약할 수 있다고 치자. 만약 우리 중에 몇 명이 과감히 지금 가진 것을 다 처분하고, 다짜고짜 여행을 떠나려고 할까? 아마 정말 간절히 여행을 떠나고 싶거나 용기가 있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다. 모으고 있는 적금을 해제하면, 곧장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다. (운 좋으면 유럽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후일이 걱정되어 막상 떠나려고 하니 '나는 도대체 왜 가고 싶어 하는 걸까? 정말 가고 싶어?'라는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라딘 신간 평가단 활동으로 읽은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여행기의 저자는 그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우연히 만난 하나의 욕망을 채우고자 무턱대고 몽골의 알타이로 여행을 떠났다. 알타이의 갈잔은 저자에게 '당신은 여기를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했으니 오죽했을까.


 저자가 알타이로 여행을 떠난 이유는 특별하다고 하면 특별하고, 특이하다고 하면 특이하다. 책의 저자는 '갈잔 치낙'의 소설 '귀향'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읽은 후에 스스로 이유를 잘 알지도 못한 채 갈잔 치낙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일을 처리하고, 떠난 것이었다.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에서는 그렇게 무작정 알타이로 떠난 그녀가 여행 과정에서 느낀, 그리고 생활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평범한 여행기다. 하지만 이유가 특이했고, 한 번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몽골이라는 나라에 속한 알타이의 풍경은 저자의 눈과 귀를 통해 신비롭게 느껴졌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생각한 것은 오직 하나다. 과연 나는 <처음 보는 유목민>의 저자처럼 막연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에펠탑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파리로 떠날 수 있을까, 도쿄 아키하바라의 메이드 카페에 가고 싶어 일본으로 떠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나는 높은 확률로 떠나지 못할 것 같다. 바보 같은 이유를 핑계 삼아 과감히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를 나는 갖고 있지 않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통해서 보는 유럽의 풍경은 나에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지만, 나는 그 손에 '그래!' 대답하며 짐을 쌀 용기가 없다.


 언제나 나는 나약한 변명을 하면서 '운이 좋지 않아. 언젠가 떠날 수 있을 거야.'는 위로를 스스로 건넬 뿐이다. 통장 잔고에는 십만 원이 채 들어있지 않고, 글을 통해 조금씩 들어오는 돈은 달을 거듭할수록 줄어들고, 가장 배우고 싶은 피아노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나는 여행자가 되지 못한다. 도전자가 되지 못한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일임에도, 나는 나를 잊어버리는 용기를 갖지 못한다. 겁 많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방문을 잠근 채, 불이 꺼진 방 한구석에서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뿐이다.


 여행은 스스로 내가 모르는 장소에,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나를 드러내 나를 잊어버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여행을 선택하지 못하기에 나는 스스로 고독한 공간에 나를 집어넣고, 스스로 혼자가 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그러하며,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이 그러하다.


 오늘 읽은 책 <유목민의 여인>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오스트리아 관광객은 다음날 이른 아침에 지프를 타고 뽀얀 먼지와 함께 사라졌는데, 그들은 울란바토르에 폭우가 내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남기고 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미 일주일 이상이나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지 않고 살았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늘이 도대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사실상 알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또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거의 절반쯤은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그건 예상치 못하게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다. (본문 139)


 여행을 통해서 우리가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관광과 다른 여행. 우리는 제각기 다른 인생에서 모두 고독한 여행을 떠나고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너무 평범해서 우리는 새로운 일탈을 꿈꾼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 알지 못하는 곳에 가려고 한다.


 여행은 누구의 마음속에나 자리 잡고 있는 꿈이다. 나는 이 꿈을 실천하지 못한다. 통장 잔고를 보며 한숨을 쉬고, 책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상상할 뿐이다. 세상에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용기 있는 자다. 오늘따라 유독 나는 그런 용기가 부럽게 느껴진다.


 비록 에펠탑을 보기 위해 파리로 떠나지 못하고, 아키하바라에 있는 메이드 카페를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지 못하지만, 오늘 나는 여기서 여행을 떠난다. 살며시 눈을 감고, 생각을 멈추고, 잠시 내 몸속,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낡은 문을 열어본다. 나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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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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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국내에 금수저와 흙수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와 권력, 혹은 스타성을 잇는 자제를 금수저라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자제를 흙수저라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금수저가 아니다. 밥벌이를 위해서 흙수저로 맨땅의 흙을 파는 인생이다.


 하지만 금수저와 비교하여 과연 이 인생이 불행한가는 질문을 해보면, 솔직히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부와 권력, 스타성을 물려받아 남보다 더 유리하게 기회를 잡아 성공하는 금수저가 부러울 때가 있지만, 지나친 대중의 관심 속에서 종이탑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 전혀 부럽지 않다.


 비록 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어디에서 '여기는 특정 계급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는 말을 듣더라도 타인의 신경을 쓰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좋다. 때때로 내가 돈과 권력을 가지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크게 묻어나기도 하지만, 세상만사 좋기만 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배가 고파서 집에 사다 놓은 라면을 끓이다 보면 이렇게 잡다한 생각을 한다. 라면은 산업화 시기에 우리나라에 보급되어 부모님 세대를 먹여 살린 음식이었고, 오늘날은 고급 라면과 일반 라면이 생겨나며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든 제품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가 한 젓가락 드는 라면에 우리의 수저가 있지 않을까. 자연 친화적이라며 홍보하는 비싼 라면을 먹는 사람은 금수저이고, 그런 홍보와 상관없이 값싼 라면을 먹는 사람은 흙수저이다. 대중적으로 좋아하는 라면에도 계급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으로 쓰리기도 하다.


 왜 내가 느닷없이 금수저와 흙수저, 그리고 라면에 관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얼마 전부터 천천히 작가 김훈의 산문 <라면을 끓이며>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시작은 제목 그대로 라면에 관해 이야기를 하시며 라면에 담긴 지나간 혹은 이어지는 삶의 모습을 들려주신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짬뽕 값의 양극화는 시장의 자유로운 질서이며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라고, 다들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게끔 되어 있다. 강제로, 채찍을 휘두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없는 자들은 스스로 3500원짜리 짬뽕을 먹고, 아직도 견딜 만한 자들은 8000원짜리를 먹게 된다. 음식을 파는 쪽에서도 값을 올리고 또 내려서 양극화된 격차 안에 양쪽 모두를 편안하게 수용함으로써 시장의 질서는 자유롭고 조화롭다.

나는 3500원짜리 짬뽕이 어떤 식재료를 쓰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국물은, 3500원짜리나 8000원짜리나 똑같다. 그 국물의 맛은 식재료를 우려낸 맛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루를 섞어서 만든 맛이다. 그 국물은 몸에 스며서 몸을 위로하는 기능이 없었고, 목구멍에 불을 지르는 듯이 날카롭고 사납게 달려든다. 그런 식당에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젊은이들로 붐빈다. 인근 상가에서 알바를 마치고 나왔거나, 알바를 시작하려고 새벽참을 먹는 젊은이들, 근무교대하는 전경들, 소방대원들, 외출 나온 병사들, 여러 배달부들, 비틀리고 게걸거리는 술 취한 젊은이들, 여관에서 막 나왔는지 눈이 퀭하고 넋이 빠진 젊은 남녀들이 3500원짜리나 8000원짜리 짬뽕을 먹고, 목구멍 쥐어뜯는 국물을 마신다. 국물은 무한리필이다. 일회용 컵에 담아서 얼마든지 가져다주는데, 대부분 한 컵 이상 마시지 못한다. 배달통을 든 젊은이는 도시락에 밥을 담아와서 짬뽕 국물에 말아먹는다. 먹기를 마친 젊은이들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 거리로 나간다. 길바닥에는 마사지룸, 키스방, 안마방의 나체 전단이 깔려 있다. 이 거리의 라면, 짬뽕, 짜장면 값은 어디로 가려는가. (본문 26)


 짬봉값의 양극화는 금수저와 흙수저 논란과 닮았다. 비싼 짬뽕을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그 가격이 부담스러워 값싼 짬뽕을 먹는 사람. 평소의 입맛이 아니라 사용할 수 있는 돈이 달라서 입맛이 달라진 것인데,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는 이런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비싼 짬뽕과 값싼 짬뽕, 비싼 라면과 값싼 라면, 일반 돼지국밥과 모듬 돼지국밥 등 가격에 따라 우리는 천차만별의 선택을 한다. 입맛에 따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냥 우리는 지갑 속의 돈과 보이지 않는 통장 속의 잔액을 계산하며 비싼 라면과 값싼 라면 사이에서 선택한다. 당신은 어떤가.


 김훈 선생님의 <라면을 끓이며>는 라면을 통해 엿보는 우리의 세상사로 시작하여 선생님이 보내는 하루하루를 기록한 책이었다. 솔직히 나는 선생님과 달리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적어 감상을 느낀 대로 잘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데, 책은 딱 우리가 편하게 먹는 라면 한 그릇 같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솔직한 감상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는 감탄이었다. 꾸준히 블로그를 통해서 글을 쓰고, 때때로 브런치에 자칭 작가라며 어쭙잖은 글을 쓰면서도 쉬운 단어와 문장으로 한 편의 글을 완성하지 못하기에 책으로 읽는 선생님의 글은 경이로웠다.


나는 수감중인 대기업 총수에 대한 가석방 결정이 법무장관의 '고유권한'이라는 언설에 반대한다. 장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유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사금이 아니고 마립간이 아닐진대, 어찌 직무에 따른 권한이 그 직위에 '고유'하게 귀속될 수가 있겠는가. 장관은 다만 그 가석방이 법치주의의 원칙과 절차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공적으로 판단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은 풀어주면 이 나라가 얼만큼 더 잘 먹고 잘살게 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장관의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무법천지의 관례도 장관이 참조할 전례가 되지 못한다. 저 사람을 지금 풀어주면 이 나라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무너져내리며, 후세의 더 큰 무너짐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앞날이 닥쳐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장관의 일이기를 나는 바란다.

지금, 그날 벌어 먹거나 한 달 벌어서 한 달을 먹거나, 사람들은 먹고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다. 이 겨울에 살기 위한 아무런 방편도 마련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중생고가 수감중인 대기업 총수의 석방 주장을 정당화하고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지만, 기막히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본문 167)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렇게 쉬운 단어와 간결한 문장으로 쓰인 산문은 항상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내 문장에 큰 도움이 된다. 지금도 불필요하게 문장이 길어지고, 하고 싶은 말이 꼬이는 게 아닌가 싶어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도시에 사는 우리가 여름마다 볼 수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선생님은 흔히 나와 같은 젊은 세대가 '대박이다.' 같은 단어가 아니고, 일부 인터넷 신문에서 보는 '아찔한 뒤태'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여자의 모습을 간단명료하게 잘 표현하셨다. 나는 절대로 이렇게 못 한다.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젊은 여자가 그의 젊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 여름 여자들의 그 손바닥만한 탱크톱과 핫팬츠, 그리고 그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 사이에서 나는 흔히 아득함을 느긴다.

여자들의 여름패션이 아무리 바뀐다 하더라도 탱크톱의 긴장감과 해방감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탱크톱은 하나의 자족한 세계를 이룩한 패션이다. 드러내기와 감추기 사이에서 탱크톱은 가장 긴장된 타협을 이루어낸다. 그래서 헐렁한 탱크톱과 꽉 끼는 탱크톱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유혹적인가 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탱크톱은 감추려는 가슴 부분을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드러난 어깨와 팔을 거꾸로 감추는 듯하다. 탱크톱이 어룩한 그 긴장된 타협이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경계를 허물어내는 것이다. (본문 248)


 도대체 나는 언제 이렇게 내가 바라보는 삶을 글로 적을 수 있을까.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한사코 제자리걸음을 하는 까닭은 소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일을 찾아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이것뿐이니 어찌하겠는가.


 책을 읽으며 글을 쓰다 김훈 선생님과 손석희 앵커가 인터뷰한 동영상을 찾아보았는데, 김훈 선생님은 자신의 글로 여론 형성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다고 하셨다. 오직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과 추함, 악과 억압 등의 감정을 전하고자 글을 쓰신다고 한다.


 나는 김훈 선생님의 그 말씀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였고, 내가 느낀 일상 속의 여러 감정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점을 꼭 지적해야 한다는 허영심에 빠져 못난 글에 지나치게 힘을 준 것 같다.


 어제도 국정 교과서와 패배주의를 연결해서 한국의 청년을 비판하는 한 명의 정치인과 고집불통 대통령을 비판했다. 과연 그 글에 내가 느낀 감정이 얼마나 담겼을까. 헬조선에 살아가는 한 명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요 없는 허영심이 지나치게 들어갔다.


 김훈 선생님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읽다 보니, 글 하나로 뭘 해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내 글을 나답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글로 적고 싶은 것은 많고, 글로 적지 못하는 것은 더 많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항상 먹는 값싼 라면을 끓이며 잊어버린 글을 떠올려보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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