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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한창 국내에 금수저와 흙수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와 권력, 혹은 스타성을 잇는 자제를 금수저라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자제를 흙수저라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금수저가 아니다. 밥벌이를 위해서 흙수저로 맨땅의 흙을 파는 인생이다.
하지만 금수저와 비교하여 과연 이 인생이 불행한가는 질문을 해보면, 솔직히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부와 권력, 스타성을 물려받아 남보다 더 유리하게 기회를 잡아 성공하는 금수저가 부러울 때가 있지만, 지나친 대중의 관심 속에서 종이탑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 전혀 부럽지 않다.
비록 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어디에서 '여기는 특정 계급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는 말을 듣더라도 타인의 신경을 쓰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좋다. 때때로 내가 돈과 권력을 가지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크게 묻어나기도 하지만, 세상만사 좋기만 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배가 고파서 집에 사다 놓은 라면을 끓이다 보면 이렇게 잡다한 생각을 한다. 라면은 산업화 시기에 우리나라에 보급되어 부모님 세대를 먹여 살린 음식이었고, 오늘날은 고급 라면과 일반 라면이 생겨나며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든 제품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가 한 젓가락 드는 라면에 우리의 수저가 있지 않을까. 자연 친화적이라며 홍보하는 비싼 라면을 먹는 사람은 금수저이고, 그런 홍보와 상관없이 값싼 라면을 먹는 사람은 흙수저이다. 대중적으로 좋아하는 라면에도 계급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으로 쓰리기도 하다.
왜 내가 느닷없이 금수저와 흙수저, 그리고 라면에 관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얼마 전부터 천천히 작가 김훈의 산문 <라면을 끓이며>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시작은 제목 그대로 라면에 관해 이야기를 하시며 라면에 담긴 지나간 혹은 이어지는 삶의 모습을 들려주신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짬뽕 값의 양극화는 시장의 자유로운 질서이며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라고, 다들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게끔 되어 있다. 강제로, 채찍을 휘두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없는 자들은 스스로 3500원짜리 짬뽕을 먹고, 아직도 견딜 만한 자들은 8000원짜리를 먹게 된다. 음식을 파는 쪽에서도 값을 올리고 또 내려서 양극화된 격차 안에 양쪽 모두를 편안하게 수용함으로써 시장의 질서는 자유롭고 조화롭다.
나는 3500원짜리 짬뽕이 어떤 식재료를 쓰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국물은, 3500원짜리나 8000원짜리나 똑같다. 그 국물의 맛은 식재료를 우려낸 맛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루를 섞어서 만든 맛이다. 그 국물은 몸에 스며서 몸을 위로하는 기능이 없었고, 목구멍에 불을 지르는 듯이 날카롭고 사납게 달려든다. 그런 식당에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젊은이들로 붐빈다. 인근 상가에서 알바를 마치고 나왔거나, 알바를 시작하려고 새벽참을 먹는 젊은이들, 근무교대하는 전경들, 소방대원들, 외출 나온 병사들, 여러 배달부들, 비틀리고 게걸거리는 술 취한 젊은이들, 여관에서 막 나왔는지 눈이 퀭하고 넋이 빠진 젊은 남녀들이 3500원짜리나 8000원짜리 짬뽕을 먹고, 목구멍 쥐어뜯는 국물을 마신다. 국물은 무한리필이다. 일회용 컵에 담아서 얼마든지 가져다주는데, 대부분 한 컵 이상 마시지 못한다. 배달통을 든 젊은이는 도시락에 밥을 담아와서 짬뽕 국물에 말아먹는다. 먹기를 마친 젊은이들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 거리로 나간다. 길바닥에는 마사지룸, 키스방, 안마방의 나체 전단이 깔려 있다. 이 거리의 라면, 짬뽕, 짜장면 값은 어디로 가려는가. (본문 26)
짬봉값의 양극화는 금수저와 흙수저 논란과 닮았다. 비싼 짬뽕을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그 가격이 부담스러워 값싼 짬뽕을 먹는 사람. 평소의 입맛이 아니라 사용할 수 있는 돈이 달라서 입맛이 달라진 것인데,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는 이런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비싼 짬뽕과 값싼 짬뽕, 비싼 라면과 값싼 라면, 일반 돼지국밥과 모듬 돼지국밥 등 가격에 따라 우리는 천차만별의 선택을 한다. 입맛에 따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냥 우리는 지갑 속의 돈과 보이지 않는 통장 속의 잔액을 계산하며 비싼 라면과 값싼 라면 사이에서 선택한다. 당신은 어떤가.
김훈 선생님의 <라면을 끓이며>는 라면을 통해 엿보는 우리의 세상사로 시작하여 선생님이 보내는 하루하루를 기록한 책이었다. 솔직히 나는 선생님과 달리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적어 감상을 느낀 대로 잘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데, 책은 딱 우리가 편하게 먹는 라면 한 그릇 같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솔직한 감상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는 감탄이었다. 꾸준히 블로그를 통해서 글을 쓰고, 때때로 브런치에 자칭 작가라며 어쭙잖은 글을 쓰면서도 쉬운 단어와 문장으로 한 편의 글을 완성하지 못하기에 책으로 읽는 선생님의 글은 경이로웠다.
나는 수감중인 대기업 총수에 대한 가석방 결정이 법무장관의 '고유권한'이라는 언설에 반대한다. 장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유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사금이 아니고 마립간이 아닐진대, 어찌 직무에 따른 권한이 그 직위에 '고유'하게 귀속될 수가 있겠는가. 장관은 다만 그 가석방이 법치주의의 원칙과 절차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공적으로 판단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은 풀어주면 이 나라가 얼만큼 더 잘 먹고 잘살게 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장관의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무법천지의 관례도 장관이 참조할 전례가 되지 못한다. 저 사람을 지금 풀어주면 이 나라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무너져내리며, 후세의 더 큰 무너짐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앞날이 닥쳐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장관의 일이기를 나는 바란다.
지금, 그날 벌어 먹거나 한 달 벌어서 한 달을 먹거나, 사람들은 먹고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다. 이 겨울에 살기 위한 아무런 방편도 마련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중생고가 수감중인 대기업 총수의 석방 주장을 정당화하고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지만, 기막히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본문 167)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렇게 쉬운 단어와 간결한 문장으로 쓰인 산문은 항상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내 문장에 큰 도움이 된다. 지금도 불필요하게 문장이 길어지고, 하고 싶은 말이 꼬이는 게 아닌가 싶어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도시에 사는 우리가 여름마다 볼 수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선생님은 흔히 나와 같은 젊은 세대가 '대박이다.' 같은 단어가 아니고, 일부 인터넷 신문에서 보는 '아찔한 뒤태'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여자의 모습을 간단명료하게 잘 표현하셨다. 나는 절대로 이렇게 못 한다.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젊은 여자가 그의 젊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 여름 여자들의 그 손바닥만한 탱크톱과 핫팬츠, 그리고 그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 사이에서 나는 흔히 아득함을 느긴다.
여자들의 여름패션이 아무리 바뀐다 하더라도 탱크톱의 긴장감과 해방감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탱크톱은 하나의 자족한 세계를 이룩한 패션이다. 드러내기와 감추기 사이에서 탱크톱은 가장 긴장된 타협을 이루어낸다. 그래서 헐렁한 탱크톱과 꽉 끼는 탱크톱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유혹적인가 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탱크톱은 감추려는 가슴 부분을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드러난 어깨와 팔을 거꾸로 감추는 듯하다. 탱크톱이 어룩한 그 긴장된 타협이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경계를 허물어내는 것이다. (본문 248)
도대체 나는 언제 이렇게 내가 바라보는 삶을 글로 적을 수 있을까.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한사코 제자리걸음을 하는 까닭은 소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일을 찾아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이것뿐이니 어찌하겠는가.
책을 읽으며 글을 쓰다 김훈 선생님과 손석희 앵커가 인터뷰한 동영상을 찾아보았는데, 김훈 선생님은 자신의 글로 여론 형성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다고 하셨다. 오직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과 추함, 악과 억압 등의 감정을 전하고자 글을 쓰신다고 한다.
나는 김훈 선생님의 그 말씀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였고, 내가 느낀 일상 속의 여러 감정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점을 꼭 지적해야 한다는 허영심에 빠져 못난 글에 지나치게 힘을 준 것 같다.
어제도 국정 교과서와 패배주의를 연결해서 한국의 청년을 비판하는 한 명의 정치인과 고집불통 대통령을 비판했다. 과연 그 글에 내가 느낀 감정이 얼마나 담겼을까. 헬조선에 살아가는 한 명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요 없는 허영심이 지나치게 들어갔다.
김훈 선생님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읽다 보니, 글 하나로 뭘 해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내 글을 나답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글로 적고 싶은 것은 많고, 글로 적지 못하는 것은 더 많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항상 먹는 값싼 라면을 끓이며 잊어버린 글을 떠올려보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