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무래도 눈 감고 귀 막고 사는 모양이다.
[마시멜로 이야기]가 장장 1년 가까이
최고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책의 옮긴이 이름이 정지영인지도 몰랐다.
정지영 씨가 이 책을 들고 책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다는데. ㅠ.ㅠ
‘이런 책이 왜 그렇게 오래도록 잘 팔릴까’ 하고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좀머 씨 이야기]가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듯이
출판 시장에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좀머 씨 이야기]는 물론 매우 좋은 책이다.
그러나 초베스트셀러인 책은 고급이든 저급이든
전달하는 뜻이 명확하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좀머 씨 이야기]는 그런 책이 아니다.
사실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좀머 씨 이야기]가 많이 팔린 것은
상뻬의 그림이 귀엽고 친근한―우리는 꼬마 니콜라를 기억한다!―데다
당시 책값이 쌌기 때문에 호기심만으로도 부담 없이 살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해 본다.)

그제 옆지기에게서 ‘정지영 대리번역 사건’에 대해 언뜻 들었을 때는
(어떻게 출판계 이야기를 옆지기에게 듣냐... ― ―;;)
초벌번역가가 문제를 제기한 줄 알았다.
번역가 중에는 일이 밀려 의뢰 들어온 일을 직접 다 처리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에게 초벌번역을 맡기고 나중에 자기가 문장을 손보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다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일을 맡지 않는 게 옳건만,
출판사에서 맡아달라고 졸라대면 거절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테고
정기적인 수입이 보장되지 않은 프리랜서 작업의 특성 때문에
의뢰한 일은 일단 맡고 보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초벌번역은 말 그대로 초벌일 뿐이므로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번역은 한 언어권의 생각과 문화를 다른 언어권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변이시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영어 단어를 한국어 단어로 바꾼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초벌번역가가 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면
그건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출판계 동료에게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초벌번역가가 아니라 전문번역가가 한 일이며,
출판계의 많은 사람들은 정지영 씨 이름을 달고 그 책이 나왔을 때부터
으레 ‘직접 했겠어? 돈 받고 이름만 빌려주었겠지’ 하고 생각했다 한다.
(그러면서 그런 방법으로 책을 잘 팔았으니 재주 좋다고 생각했겠지.
책만 잘 팔리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게 많은 출판인의 윤리 의식이다. )

파문이 커지자 출판사(한경BP같이 신문사에서 내는 출판사들을
출판사라고 하는 거, 솔직히 싫다. 예전 신문사 출판부들은 그래도
‘한국의 미’ 시리즈처럼, 문화적으로 중요하지만
영세한 출판사로서는 감히 하기 어려운 책들을 냈다.
그런데 요새 신문사 출판부나 출판법인들은 일반 소규모 출판사보다
전혀 나을 것 없는 책들을 내면서 물량공세로 분탕질만 친다)에서는
정지영 씨를 보호하고 사태를 정리하고자 ‘이중번역’이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스타를 내세울 필요가 있어 정지영 씨를 섭외했는데,
번역 초심자라 불안해 전문번역가에게 이중으로 번역을 의뢰하고,
그 사실을 정지영 씨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며,
다만 문장을 많이 고쳤다고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인터뷰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65793)에서
그 전문번역가도 “편집자가 편집하는 과정에서 윤문을 (많이) 했다”고 말했으니
뭐 그렇다 치자.
정지영 씨가 이름만 팔았든 직접 번역을 했든
사태를 기획 연출 진행한 쪽은 한경BP라는 출판사다.

한경BP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잘못했을까?
하긴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
국내 출판사들끼리 경쟁이 붙어 선인세를 12만 불까지 올려놓았다는 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소규모 출판사에서는 선인세 3000불 계약도
큰마음 먹을 때나 하는데. 돈 없는 출판사에서는 끼어들지도 못할 일이다.
그래놓고 “골 깊은 출판계의 불황 속에 나름대로 살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 것”이라고?
아무튼 있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어쨌든 그래서 계약이 되었다.
저작권자에게 주는 인세 비율을 평균 책값의 7%라고 할 때,
12만 불(대충 환산해도 1억 2000만 원이다)이면
책값이 9000원이므로 약 19만 476부가 팔려야 가능한 액수다.
덜컥 12만 불을 주었으니 무슨 수를 쓰든 19만 부가 넘게 팔아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 책 내용만 믿고 19만 부가 팔리기
기다릴 수 있을까? 앞일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어떻게든 판매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해야 했고,
그래서 ‘스타 마케팅’이란 게 시작된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정지영 씨가 번역에 전혀 손대지 않고 이름만 팔았다 해도,
대학원생들 시켜 번역한 원고를 얼기설기 짜깁기해 책을 내고
자기 연구 실적으로 올리는 교수들보다 더 부도덕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경우 적어도 출판사는 실력 있는 번역가의 원고를 바탕으로
책을 만들어 독자에게 양질의 번역을 제공했으므로.
제자들 번역을 짜깁기해 내는 교수들은
스스로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해서 이득을 얻기 때문에도 나쁘지만,
그 교수의 이름을 믿고 책을 사는 독자에게
품질이 불량한 상품을 팔아먹기 때문에 더 나쁜 것이다.
그런 교수의 원고에 별다른 수정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냥 책으로 내는 출판사들도 마찬가지로 나쁘다.

물론 그래서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첫째, 유명인 덕을 보고 싶었다면 번역을 맡기지는 말고
추천사를 부탁하고 광고 모델로 삼는 방법도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책 광고에 지은이나 옮긴이가 아닌
모델을 따로 세우는 경우는 흔치 않고,
아무래도 책을 직접 번역했다고 하는 편이 더 효과 좋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째, 번역을 맡겼으나 못 미더워 다른 번역가를 함께 섭외했다면
공동 번역으로 이름을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대단한 학술서도 아닌데 공동 번역씩이나 내세우는가 하고 내키지 않았겠지.
셋째, 그럼 일단 혼자 번역하게 하고,
편집자가 원서와 일일이 대조하며 뜯어고쳐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편집자가 완전히 뜯어고친 원고를 그 번역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실력 있는 번역가들도 원문에 신경 쓰다 보면
제대로 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편집자가 다시 교열하고(문장을 다듬고),
다듬는 과정에서 원서의 뜻이 잘못 전달되는 일이 없도록
번역가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번역가가 원서의 내용과 맥락을 잘 파악했다면
그런 일은 즐거운 과정이다.

그런데, 전에 한번 A급 번역가로 알려진 사람의 원고 교정교열을 맡았을 때,
문장이 썩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오역이 수두룩해 놀란 적이 있다.
원서를 한 문장 한 문장 대조해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면서
내가 받은 돈은 200자 원고지로 따져서 매당 1500원.
이건 꽤나 잘 받은 축에 속한다.
프리랜서 편집자가 교정교열을 하고 받는 금액은 보통 매당 1200원 이하다.
번역료는 영어 번역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매당 3000~3500원,
A급 번역가인 경우 4000원, 5000원도 한다.
내가 맡은 그 원고의 번역가는 대체 얼마를 받았을까?
교정을 맡은 사람이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해도,
받는 액수는 번역료의 절반도 안 된다.
이 번역가가 무슨 이유에서 이번만 그렇게 번역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내내 편집자를 착취해 명성을 쌓았는지는 모른다.

......두서없구나. 그래서 어쩌자고?
그러니까... 음... 이름에 현혹되지 말자구요! =3=3=3


(덧붙임) 이번 일을 듣고 한 동료 편집자가
대리번역보다 ‘대필’이 더 나쁘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대고 할 이야기가 있는데 글을 잘 쓸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도록 누군가 돕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일을 돕는 ‘누군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대필 작가 스스로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경우도 있지만,
출판사가 그 존재를 일부러 감추려 드는 것은 잘못이다.
스스로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나도 그런 풍토에 일조하고 있지 않았나 반성하면서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경우
떳떳하게 도움 받고 당당하게 밝히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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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1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공동번역이라고하고 이름을 같이 올렸음 좋았겠다는 생각. 그것도 사기지만서도... 그리고 우리 출판사끼리 싸우니까 괜히 값만 오르고 추리소설도 출판 안하다가 좀 된다니까 뛰어들고 암튼 맘에 안듬 ㅡㅡ;;;

가랑비 2006-10-1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그리고 한 가지 책이 1년 가까이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독서 풍토도 싫어요. ㅠ.ㅠ

가랑비 2006-10-15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그냥 두서없이 흘러가는 생각대로 적은 터라... 에, 제가 뭐라고 한 거죠? ㅠ.ㅠ

chika 2006-10-1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벼리꼬리님. 저도 요즘 출판계의 번역이 들썩여지고 있는 걸 토욜에야 알았어요. 그 책이 마시멜로,에서 불거졌다는걸요. (자랑이냐? ㅜㅡ)
왜 다들 속여서 돈벌려고 하는겐지...에혀~ ;;;;
(저도... 말씀 감사하여요 ^^)

바람돌이 2006-10-16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명백한 사기 맞죠? 책을 실제로 번역한 분 인터뷰 기사 보니 정말 출판계라는 동네도 우리 나라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아 서글펐답니다. 전문적인 실력을 갖췄으면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는게 당연한 것 같은데 세상은 왜 늘 안그런쪽이 더 많은지....

가랑비 2006-10-1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아이 송구스러워요. "속여야 돈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풍토가 기막히지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바람돌이님, 별반 다르지 않죠.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곳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