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김춘수는 형이상학적(철학적) 입장에서 꽃을 관찰하였다. 그는 '꽃'을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상징적 매개체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인식과 상호 주체적 관계 형성의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 내가 이름을 불러 준 순간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남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서 존재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싶다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길 / 김소월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매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 리(十里) 

어디로 갈까.  

 

산(山)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定州郭山) 

차(車)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 십자(十字)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 

고향을 상실한 떠돌이(유랑민)의 비애를 자문자답 형식의 하소연하는 어조로 담아 내고 있는 작품이다. '길'은 그 자체가 떠돌이의 삶의 행로를 표상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시가 발표되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결부시켜 이해한다면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의해 농토를 빼앗기고, 북간도와 만주로 유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중의 한과 비애가 서린 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추천사 /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 

고전 소설 <춘향전>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춘향이 그네를 타면서 독백하는 형식을 취한 노래이다. 촌향은 그네를 타고 자신의 괴로움과 인간의 운명을 벗어나고자 하나, 그네는 그넷줄에 매여 있기 때문에 다시 땅 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초월적 세계에 도달하려는 의지와 현실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김지하는 김수영, 신동엽의 뒤를 이어 자유를 억압당했던 암울한 시대 현실 속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 시는 유신 체제의 질식할 듯한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 회복에의 열망을 절규한, 1970년대 초의 기념비적 작품 중 하나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잘 나타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산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4ㆍ19 혁명의 영령을 기린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울고 간 그의 영혼'이라는 구절의 '그리운 그'는 아마도 불행한 삶을 살다 간 한 젊은이(4ㆍ19 혁명의 희생자)로 짐작된다. 시적 화자는 그리운 그의 모습을 다시 찾을 수는 없어도 그가 자신의 얼굴과 영혼을 닮은 꽃,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노래로서 산에 언덕에 부활하기를 소망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