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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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는 형이상학적(철학적) 입장에서 꽃을 관찰하였다. 그는 '꽃'을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상징적 매개체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인식과 상호 주체적 관계 형성의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 내가 이름을 불러 준 순간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남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서 존재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싶다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