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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프롤로그---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진은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네 사람이 보이고 모두 군복을 입고 있는 흑백사진이다. 5~60년대 언저리쯤 될까. 왼쪽의 한 인물이 강렬하다. 그는 사진기가 처음 보는 귀신처럼 신기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애써 정면을 외면하고 있다.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마추어가 찍은 듯 구도며 초점이 엉망인 사진은, 그러나 한 인물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동양인으로 보이는 그 인물, 그 시선으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된다.
'노르망디 해변의 동양인'으로 불리는 사진은 2차 세계대전에 찍은 것이라고 한다. 저 동양인, 저 앳되고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 어떻게 독일 군복을 입은 채, 프랑스의 한 해변에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조정래라는 작가를 움직였다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술회한다. 시작이 이슈화될만한 것이라, 책이 잘 팔릴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작품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집필 동기를 알고 나니 작품이 오히려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조정래, 민초와 함께 한 평생---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배경은 1950년대 말, 대하소설 <아리랑>의 일제 말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써내려간 셈이다. 배경뿐만 아니라 역사의식과 문장의 아우라도 비슷하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영화의 후속편 같은 느낌도 든다. 분량은 짧지만, 조정래의 '조정래다운 책'을 기대했던 사람에게 이 책은 믿을만한 선물인 셈이다. 역시나 주인공도 한 명이 아닌 여럿으로, 모두가 소작농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일반 민초들이다. 참, 그나저나 그네들 명이 기구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이러니 우리 조상들이 하회탈을 쓰고 해학극을 안 하냔 말이다.
국가를 넘어 인간으로 눈을 돌리다---
그간의 글들을 보면, 소설이라기보다는 작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페이지를 써내려갔지만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민중들을 위해, 그들의 목소리를 재생시켜나가는 고단하고 오래된 장인의 작업. 이전까지는 그것이 아나키즘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이번 작품은 한국인이 아닌 인간, 그 본연의 모습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전투 장면의 묘사는 장엄하기까지 했다.
하얗게 눈 덮인 대지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려덮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눈은 또 붉게 물들었다. 마치 하늘과 인간이 거대한 화폭의 추상화를 그리고 지우는 다툼을 벌이는 것 같았다. -본문106p
에필로그---
조정래는 어떤 의미에서 '국내용'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위상을 떨치는 운동선수나 가수들이 범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이왕 알려질 거라면 나는 그네들보다는 '조정래'라는 작가였으면 한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노벨문학상'이라는 것이 먼 얘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하기 쉬운 단문, 서사가 강조된 플롯, 역사의 테두리를 구성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오랜 기간 작업해 온 작가의 노력, 유일한 분단 국가라는 나라의 특수성. '노벨문학상'은 상징일 뿐이지만, 뿌듯하지 않은가. 그런 상징 하나 정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