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라해도 무방할 이른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내리 쏟는다. 찐다. 쪄. 아니, 내리 누른다. 이런 날씨라면 되지도 않는 아무런 말이나 지껄여도 상관없을 듯 하다. 구름이 하나도 엎는 말간 하늘에 내리쬐는 강한 빛은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태워버릴 기세다. 눈으로 어디 괴목(槐木)이나 있다면 냉큼 달려서라도 그늘 밑에 몸을 뉘고 싶었다.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영용은 오늘도 사택 뒤에 작게 만들어진 닭장으로 향한다. 파리인지, 모기인지, 벌인지, 아니면 딱정벌레인지 윙윙대는 소리에 눈에 잡히지도 않는 작은 것들을 향한 손짓을 해댄다.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교회 뒤, 비스듬한 언덕위에 새로 지은 목조주택 앞에 묶여 있는 개 두 마리는 교회로 향하는 언덕길 초입부터 영용의 발길이 닿자마자 마치 그네들의 바로 앞에서 위협이라도 하는 듯이 심하게 짖기 시작했다.  

 

백여 미터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개 짖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는 것도 지쳤는지 그 집의 주인은 굳게 닫힌 현관문으로 기척이 전혀 없었다. 멈출 생각이 없이 짖어대는 와중에 영용은 개들을 향해 몇 번 발 구름을 하며 헤헤거렸고 그럴수록 개들은 더 사납게, 극렬하게 짖어댔다. 개들을 놀리는 게 재미있다 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 했다. 통에 들어있는 작은 바가지에 모이를 담아서 닭장에 달린 작은 각목을 못으로 박아 짠 문을 열었다. 닭이 달아날 새라 한손으로 훠이 안쪽으로 몰아넣고는 모이통에 적당한 양을 맞추어 재빠르게 사료를 부었다. 그리고 급하게 문을 닫고 밖에서 작은 꼬챙이를 걸어 잠갔다.


물을 주려면 사택으로 들어가야 한다. 뒷문은 항상 열려있다. 목사님은 어둑해질 무렵 문을 걸어 잠그고, 새벽기도가 끝나면 문을 열어서 닭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이 취미였다.

영용은 물을 받기 위해 그 문을 열고 안쪽에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보일러실을 지나서 문을 열면 주방이고 왼쪽으로 돌면 싱크대가 있다.


에이, 누가 엎어놨어


바닥에 떨어진 양은 냄비와 플라스틱 밥공기. 수저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부엌 안쪽으로 난 통로를 흘깃 거린다. 평소 같으면 벌써 나와서 영용 왔어 하며 반겨주던 목사님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예 보이질 않는다. 집안은 마치 하얀 분을 흠뻑 뒤집어 쓴 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표정의 변화 없이 바닥의 냄비를 주워들어서 싱크대의 수전꼭지를 들어올린다. 쏴아 물소리가 양은냄비를 울리고 어디선가 진짜 파리한마리가 영용의 팔꿈치 위에 앉았다. 이 씨. 팔을 들며 한쪽팔로 휘두르던 영용의 움직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리는 사뿐히 영용의 머리로 앉았고, 그러는 동안 받았던 물은 다 엎어져 다시 받아야 했다. 머리에 앉았던 파리를 쫒은 영용은 다시 냄비에 물을 받아서 성큼성큼 사택을 나서 닭장으로 향했다.


목사가 방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은 영용이 드나든 뒤로 한나절이 지난 시간이었다. 강장로가 발견했다. 다음 주 노인회 봉사를 준비하기 위해 목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여러차례 했다. 묵묵부답 신호만 가고 받지를 않아서 교회로 가 봤다가, 사택으로 왔다가 집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서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침대 아래 엎어져 누워있는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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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만들기의 발상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81
다무라 아키라 지음, 강혜정 옮김 / 소화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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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만들기라는 용어를 처음 듣게 된 것은 전북 진안이라는 작은 촌동네에 처음 발을 딛게 된 때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정착 하겠다고 마음먹고 찾아간 그 곳에 무연고자의 관내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으니 나에겐 하늘이 준 기회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름하여 ‘마을 간사’라는 제도 이었는데 처음 내가 정착을 원하는 마을에 적응하는 데에 적격이겠다는 생각으로 신청하였고, 합격하여 무려 이년간이나 그 직에 머물렀다. 물론, 귀농 귀촌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이고, 젊은 축인 나의 경우엔 글로 쓰지 못할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는 것도 있지만 생계비 보조와 같은 간사 월급과 마을사업에 외부인으로서 함께 한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도움 주러 온 사람이라는 인식이 경계의 눈초리도 받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촌부들은 옛날 지도소에서 나온 이들처럼 대하니 나 역시도 어쩔 바를 모르기도 했다. 이런 과정도 서로를 이해하고 친교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덕분에 마을 분들의 대부분과 쉽고 빠르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일부와는 허물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결과로 외부인이라면 쉬울 수 없는 적정규모의 토지를 구하고 그 곳에 집도 지으면서 살게 되었다.


한때 마을 만들기에 참여한 마을 간사의 증언으로 이해 할 만한 내용이지만 대부분의 마을 간사가 나와 같은 절차를 밟은 것은 아니다. 극히 소수의 경우이고 마을 만들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제 5년이 채 되지 않으니 걸음마 단계라고 봐야 하는데 지역의 토호들과 기득권세력의 일부는 이를 문제 삼기도 한다. 정해져 있는 예산의 활용 시에 굳이 이렇게 성과도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를 해야 하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적극적인 활용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앞으로의 미래도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전국적으로 소규모 공동체의 활용을 위해 차용하는 것이 ‘마을 만들기’이며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동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문화, 예술, 교육과 같은 분야의 활용이 최근 괄목해 질만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이 단시간 내에 성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 100년을 바라보면서 해야 한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과연 지금 이 땅에서 100년을 바라보는 이가 있을까 의문스럽긴 하지만 조금씩 천천히, 한걸음씩 나아간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땀 흘리는 이들이 있어서 미래는 밝은 것이다.

이곳의 마을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꽤 익숙해 져서 마을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고 자원을 이해하며, 토론과 교육을 통해 협동하는 마을 구성원들이 마을 만들기를 하고 있다. ‘하드웨어’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알차고 미래가 보이는 작은 일들을 꾸준히, 한발자국씩 찍으며 나아간다는 생각이면 좋을 것이다.

이런 마을 만들기의 원조는 일본이다. 물론 일본에서만 있는 공동체의 움직임은 아닐 것이고 용어의 유래를 보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 ‘원론’적인 이해를 얻고자 하는 이라면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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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벽돌집 오늘의 청소년 문학 7
박경희 지음 / 다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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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던 아이들, 그들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기 쉬운 계층이다. ‘있는 집’의 자식들이 등 떠밀려 공부하러 학원을 전전하는 동안, ‘없는 집’의 자식들은 관심을 받지 못해 거리로 떠돈다. 거리를 통해서 습득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가족의 관심을 받지 못한 예민한 시절은 고스란히 아픔과 이를 해소할 해방구를 찾게 되는데 같은 ‘동지’들이 모이면 ‘사회의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된다.


또래의 어울림이 가지는 위험성은 그들 사회에서의 미성숙한 ‘규율’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 폭력적이며 가학적인 규칙은 선배와 후배를 통해 대물림 되며 이를 끊고 나오기엔 여린 어린 가슴이 가진 두려움이 너무 크다. 이들은 그렇게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고 영영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에서 허우적대며 그들과 그들의 자식대로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건강한 사회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진 소회계층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스스로 능력을 깨닫고 자신의 힘으로 우뚝 사회에 설 수 있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시스템)가 잘 되어 있는 곳이다. 범죄율도 낮아지고 거리 부랑자와 걸인, 사회 부적응 자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도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진국이라 해도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보호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지구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노력을 하고 그 성과가 있는 사례들은 충분히 있다. 이를 이용하고 점점 심해지는 사회 양극화 속에서 소외받는 아이들을 안아주는 곳.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은 상식만 있더라도 충분히 동의할 일이다.


아프리카 케냐 고로고초 마을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활하던 아이들을 모아 합창단을 설립한지 1년 여, 처음에는 괴성을 내던 아이들이 이제는 경이로운 소리로 세계를 향해 희망을 노래한다. 그들은 이제 세계각국에 초대받아 그들의 목소리로 감동을 전파한다.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국가 지원을 받는 베네수엘라의 음악 교육 재단이다. 오후 1시 30분 학교 수업이 끝나도 폭력과 마약, 매춘이 우글거리는 거리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는 연주할 악기가 있고 악기를 통해서 하나가 된 아이들이 내는 하모니는 자신들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감동을 주고 있다. 이는 더 이상 기적의 사례가 아니다 이를 벤치마킹한 여러 나라에서 청소년기에 나쁜 길로 빠지기 쉬운 아이들을 모아 자신의 자존감을 키우고 사회구성원으로서 가치를 가지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우리나라의 교도행정을 비판하면서 회색 담장이 아닌 분홍 벽돌집으로 지어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털보선생님’으로 대변되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어른이 그들 곁에 필요함을 이야기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1등과 서울대를 위한 1%를 위한 교육현장의 ‘들러리’가 되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을 책임져 줄 곳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길거리에서 교복입고 담배 피는 학생들을 보면 대부분 ‘저 머리에 피도 안마른 XX'라고 하는 어른이라면, 그들을 과연 올바로 봐주고, 인격을 존중해주며, 사랑으로 감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누구나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행동을 했더라도 무엇을 손에 쥐고 있더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본인이 가질 수 있도록 주변에서 격려해주는 일은 먼저 어려운 시기를 겪어본 ’어른‘의 일일 것이다.


아이들, 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은 비단 내 자식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곳이거나 영화 속에만 나오는 훌륭한 인성의 인생 안내자가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그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과 고통, 슬픔이 있기 때문에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서 행하는 행동이 철없어 보이고 폭력으로 분출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영영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 아니라 바로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선생님. 그들의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는 선생님만 바뀔 수 없다. 우리가 바뀌어야 선생님도 바뀔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다. 주인공인 ‘준’이 가장 크게 상처받은 대상은 자신에게 자퇴를 강요한 담임선생이었다.


   
 

그는 이미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었다. 자기 화를 주체 못하는 거친 짐승일 뿐이었다. 문득 준의 머릿속에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언제나 학생들의 멘토가 되어주던 존 키팅 선생님.

‘내게도 키팅 선생님처럼 이해해 주는 선생님이 있었으면, 키팅 같은 선생님이.......’

 
   

 


감정으로 학생을 대하고, 학생의 내면을 무시한 채 폭력을 일삼는 선생. 우리가 겪어온 과거의 교육현장에서 아주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매’로 위장한 폭력은 교육현장에서 더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책을 읽은 많은 어린 학생들이 주인공인 준과 수경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변화에 힘을 낼 것을 응원했다면, 내가 생각한 것은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아이들의 마음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노력일 것이다.


저자가 취재한 불량스런 청소년의 세계는 분명 어려움이 많고 힘이 들었을 것이다. 소설의 내용 중 모든 대화가 그 아이들이 상용하는 속어와 은어로 구성되어 있어 현실감을 더한다. 물론 또래의 아이들이 읽는다면 더 실감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과 친하지 않으면, 도는 들여다보려고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디테일이 작가의 진정성을 말해 주는 듯하다.


하이타니 겐지로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이며 아이들의 교육과 그 또래의 감성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어른과의 소통을 그린 작품들을 써왔다. ‘분홍벽돌집’을 보면서 그 작가의

<태양의 아이>, <모래밭 아이들> 과 같은 작품이 떠올랐다. 작가의 감성과 아이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는 점에서 이었을까.


아이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과연 어떤 배경에 기인한 것인가 연구하고 그들에 한 걸음 다가가 껴안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교육자가 지금 병들어 가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다.

   
 


“살 수가 있나.” 이 말이 공용어처럼 쓰이는 우리 집 풍경.

공부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언니.

시장에서 반찬 장사를 하는 엄마.

칠공주파와 모여 있는 꼴만 보아도 깻잎머리, 노랑머리, 재수 없는 문제아라고 손가락질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모델을 꿈꾸는 다리가 예쁜 나.

 
   



‘가시엉겅퀴’로 자신을 표현하는 글의 주인공 수경이 떠올리는 자신의 이야기는 어쩌면 자의가 아닌 주변의 ‘손가락질’로 비롯된 아픔과 방황의 길로 유도하는 우리의 의도였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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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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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우’라 불리는 중견남우가 화면 가득히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고 부인인 듯 한 여인이 활짝 같은 미소로 화답한다. 그들의 사이에 놓여있는 커피 잔은 그윽한 향이 날 듯 한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고, 잔을 같이 들고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서로를 마주본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로 한잔의 유혹을 극대화 한다. 광고가 말하는 주인공은 ’커피‘다.


커피는 세계의 삼분의 일의 인구가 즐겨 마시는 대중적 음료다. 일 년에 무려 육천억 잔이 소비되며 석유 다음으로 교역이 많다. 대중성을 굳이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역시 카페인에 의해 발생하는 미묘한 흥분효과 때문이다. 카페인은 식물계에 널리 분포하며, 동물에 대해서 매우 특이하면서도 강한 생리작용을 나타내는 알칼로이드(단일 물질에 주어진 명칭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매우 광범위한 물질을 가리킨다)의 일종이다.


카페인과 기타 알칼로이드의 작용으로 신체의 순환계와 신경계에 생리적 효과를 발휘한다. 이때 대뇌와 심장활동을 촉진시켜 이뇨장용을 한다. 아라비카종(Coffee Arabica)과 로부스타종(Coffee Robusta) 및 라이베리아종 (Coffee Liberia)의 3대 원종으로 구분하는데 맛이 좋은 아라비카가 전체 교역량의 75%를 차지한다고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 버스정류장의 가판, 열차내의 판매대, 매점, 건물의 로비 등 커피는 여유다. 여유로운 시간의 한잔이다. 때로는 ‘외로움속의 속삭임’이고 첫사랑의 기억이며, ‘달고 쓰고 차고 뜨거운 기억’이다. ‘두근두근 하는 기대’와 ‘흔들림’. ‘아름다운 독’이 되기도 한다. 특히 십여 년 전만해도 인스턴트커피밖에 모르던 우리에게 개방의 시대를 맞아 등장한 원두커피는 다방문화를 확장시켰고, 이제는 집에서도 핸드밀이니 로스팅이니 드립커피니 하는 용어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커피는 ‘이야기’와 함께 흐른다.


조선후기 개화기 때의 커피. 그때는 양탕국이라 하였다. 한자어로 가비. 이때 커피애호가로 유명한 고종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역사적 평가가 심하게 엇갈리는 왕이다. 특히 민비시해이후 러시아공관으로 피신을 두고 평가가 극명하게 나뉜다. 현재와 가까우니 더 많은 사료와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혼란스러웠을 시대상황, 힘센 나라들의 간섭과 이에 의탁한 간신들의 득세, 서로 세력을 다투는 유학파와 기득권세력이 판을 짜는 통에 나라님도 제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과정이야 어땠든 자신의 처서인 궁을 버리고 남의나라 대사관에 기거하는 왕은 처량한 존재이다. 이를 이용하려는 친러세력이 득세하고 친일세력을 처단하는 것도 수순이었다. 역사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환궁이후엔 친러세력을 숙청해야 하는 것도 그 상황이 만드는 일. 그러다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헌납하게 되니 말이다. 역사적 논쟁으로 들어가서 그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거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커피다. 고종이 그렇게 커피애호가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때 즐겨 마셨던 ‘노서아가비’, 즉 러시아 커피다.


고종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것은 러시아대사관에서 이었다. 커피 맛을 처음 선보인 사람이 초대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의 처형인 안토니에트 존타크(우리이름 손탁)였다. 커피는 곧 양반가에 양탕국으로 불리며 보급되었고 종로 등지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커피집이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비싸서 일반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음료였다.


다시, ‘이야기’는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이 매일 마시던 커피를 누가 끓여서 대접했는가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나’,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나는 역관집안의 딸이다. 열여섯에 누명을 쓰고 죽은 아버지의 원한을 가슴에 묻고, 국내에서 나랏물건을 팔아먹은 집안의 천민으로 어렵게 살 것을 예견한 어머니에게 떠밀려 국외로 길을 떠난다. 이 여정의 첫걸음인 ‘나라의 경계’ 압록강에서 처음으로 노서아가비의 맛을 느낀다. 이후 커피는 ‘나’의 동반자 같은 존재가 된다.


역관인 아버지 덕에 외국문물과 언어에 익숙했던 ‘나’는 청나라를 지나 러시아로 향하면서 영악하게 살아남는다. 결국 좀 더 영악한 ‘사기꾼’의 눈에 띠어 그의 부속으로 일하다가 벗어나자 갱단의 일원이 되어 드넓은 러시아의 숲을 외국 귀족들에게 팔아먹는 사기의 일원으로 동참한다. 그러다가 만난 ‘이반’이 인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와의 동거는 본격적인 ‘사기’로의 한걸음을 내 딛는다. 소규모로 조직화된 사기행각은 점점 대담해지고 급기야는 조선 사절단의 진상품을 노리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조직원의 대부분을 잃고 이반과 남은 나, 이반과 약속을 떠올리며 개성으로 향했으나 이미 그곳에서도 한탕을 생각하고 있는 이반에 합류하면서 고종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미 러시아생활을 통해서 ‘아버지의 추억’인 커피와 친해질 대로 친해진 커피는 사기꾼이 되어버린 자신의 가장 순수한 곳이었다. 이를 이용한 이반의 음모에 동참하면서 러시아공관에 있는 고종과 만난다.


그곳에서 커피를 끓여서 고종에게 드리는 일을 하게 된다. 커피 끓이는 사기꾼. 하지만 고종과 커피를 통해서 교감하게 된 나, ‘따냐’는 그 시기의 어려운 조국의 왕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반이 자신까지 속이고 있다는 의심의 실마리들을 주워 가슴에 담는다. 몇가지 단서와 사건의 추이로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웠던 대상으로 의심까지 된다. 환궁을 앞두고 고종은 친러파들의 제거에 나선다. 그중 이반은 거제도로 망명하라는 명을 받는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이반은 벌써 몸을 피한다. 이를 따르는 따냐.


함께 하는 것과 의심의 깊이는 별개다. 이반과 이야기를 나누던 따냐는 이반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계획을 꾸민다는 것을 안다. 나라의 주인을 바꾸는 것. 결국 고종을 독살하려는 음모가 드러나자 따냐는 이반과 이별하고 커피를 통해 교감했던 고종에게 달려간다. 커피를 마시는 고종에 들이닥쳐 먹은 커피까지 토하게 하는 따냐.


회궁과 투옥, 그리고 고종황제와의 재회. 붙잡힌 이반. 이반은 투옥되고 따냐는 자신의 마음의 고향 뻬쩨르부르그로 향한다. 그 곳에서 두 달,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 이반과 이야기 했던 뉴욕에서 ‘따냐의 문학까페’를 개업한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야기’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이백 이십여 페이지를 단숨에 읽었고, 여유 있게 마시며 보려던 계획은 어디가고 커피 한잔만 함께 했을 뿐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러시아를 넘나드는 무용담은 그렇다하고 절제된 내용과 대사는 빠른 컷의 요즘 뮤직비디오를 보듯이 장면과 시간을 뛰어 넘는다. 정작 사기의 내용에 묘사나 심리의 변화, 인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없더라도 무난히 읽히는 소설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편집과 비교할 만하다.


따냐의 인생역정과 함께하는 성장과정과 그에서 느껴지는 갈등과 아픔, 이반이 가지고 있던 겉으로 드러난 꾼의 기질 내에 숨겨진 마음에 관한 묘사가 없어서 아쉬움이 든다. 귀엽고 앙증맞은 표지를 포함한 각 장마다의 커피와 관련한 그림들은 이 책이 가진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훌륭한 조력자임이 틀림없다. 책을 보면서 방금 내린 진한 커피향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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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해 석궁을 쏘다 우리시대의 논리 12
서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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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판결 결과에 불만을 품은 소송 당사자, 여기서 소송 당사자는 전직 대학교수였습니다. 이 대학교수가 쏜 석궁에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 기자: 서울고법 민사2부 박홍오 부장판사가 오늘 오후 7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동 우성아파트 자택 앞에서 피습 당했습니다. 박 부장판사는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에 왼쪽 아랫배를 맞아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박 부장판사에게 석궁을 쏜 사람은 성균관대 해직교수인 김명호 씨입니다.

경찰에 따르면 용의자 김 씨는 80cm크기의 석궁을 가지고 박 판사 아파트 엘리베이터 옆 계단에 숨어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박 부장판사를 향해 석궁 1발을 쐈습니다.

김 씨는 박 부장판사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비명을 듣고 달려온 박 판사의 운전기사 44살 문 모씨에게 현장에서 붙잡혀 경찰에 인계됐습니다.

-2007년1월15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당시 온 나라를 떠들썩 하게 했던 뉴스였다. 판결에 불만을 품은 전직 교수가 부장판사의 자택에 잠복하다가 귀가길에 있는 판사를 석궁으로 쏘았다는 뉴스는 도대체 왜 그랬느냐 보다는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신나간 사람으로 비춰졌다. 이후 시사프로그램을 통해서 사건의 진위를 추정하면서 교수에게 동정과 공감의 여론이 늘어났다. 하지만, 불쌍함, 재수없는 이로 생각되는 정도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요즈음 관공서에 가면 흔한 풍경중에 하나는 일인시위다. 집시법에 둘이상이 모여서 행동하는 것을 규제하기 때문에 홀로 시위하는 문화가 점점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사법부도 마찬가지다. 지방법원은 물론이고 서울 대법원앞에서도 재판결과에 불만이 있거나, 공정하지 못함을 항의하는 시민의 나홀로 피켓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위 뉴스에 나온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유난히 많이 끌었다. 일반인도 아니고 교수 씩이나 되는 사람이 교양과 세력은 어쩌고 홀홀단신 범죄자처럼 흉기로 판사를 위협한것도 그렇거니와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다 그렇게 행동하기라도 한다면 사법부의 검사, 판사가 남아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 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후로는 그런 테러가 없었고 조용히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사법부의 범죄가 전직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후에 나온 ‘부러진 화살’은 그런 의미에서 또 한번 세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형식이야 그렇다 해도 사법부에 대한 한 인간의 비판과 도전을 극히 딱딱한 사건과 구술 위주로 엮었기 때문이다. 이 파급효과는 크다. 다큐멘터리가 영화보다 더 설득력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 법부 비판의 화살은 ‘석궁테러’의 주인공 성대 수학과 김명호교수이다. 그가 쐈던 화살은 그의 말대도 대한민국 사법부에 대한 도전이며 곧 불의에 대한 정의의 항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 강직하면 부러진다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라면 저렇게 싸웠을까 하고 몇 번을 되물어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그럼 어땠을까. 아마 애초에 자신이 속한 집단에 ‘공정성’을 이유로 반기를 들기 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실수로 그랬더라도 바로 선배들과 상사들에게 사과하였을 것이다. 혹여 잘못되어 법정까지 갔더라도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지 못함에 대해 사법부를 향한 활을 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감히 말이다. 그것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을 뻔히 알기때문이며 속담인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을 누가 구지 하지 않더라도 머릿속에 상황에 맞추어 불러올줄 알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정직한 일이고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개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강요할 때에는 어찌해야 하는가. 김 교수처럼 그 후 10년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인간적 모멸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런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정직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까.’-저자의 서문중  
   




책표지


김명호 교수는 너무 바른 사람이었다.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인생에 자신이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세상속에 살았고, 그리고 자신의 연구 외에는 다른곳에 신경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자기가 속한 학교의 입시 채점을 맏으면서 한 문제의 오류를 지적하자 대학에서는 학교의 위신을 생각해서 넘어가자라는 말로 지적을 무마하려 한다. 그런데 이에 분이난 김교수는 문제를 외국까지 보내서 자신이 속한 학교의 교수들을 질타하고 수학교수들의 협의회에도 보내서 사건을 확대하는데 이른다.


결국, 조교수로 임용될 예정이었던 김교수가 학과 교수들의 반대로 탈락하고 이를 불의로 본 김교수는 ‘법’으로 바로잡을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사법부 조차 개인보다는 권력에 기우는 것이 사실 아닌가. 우리가 상상하는 그대로 사법부는 김교수에게 패소를 안겨주었고, 곧 항소와 일인시위, 단식등으로 사법부에 항의하다가 고법판사에게 석궁으로 ‘시위’하여 전국민의 뉴스거리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싸움의 양식이라는 것은 법원에 호소하는 방식이어야 하는데, 김명호 교수는 법원 자체를 치고 있거든요. 어찌 보면 본인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김명호 교수는 한국 현실에 대해 약삭빠르지 못한 사람이거든요. 안그랬으면 자기 살길 찾았을지 몰라요. 자기 체면 차리면서 성대 수학교수로 살아남았을지 모르죠. ......김교수는 해방 50년간 사라져 간 사람들의 한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고, 우리는 김명호 교수를 통해 현대사의 기막힌 한 부분을 보고 있는 거예요.’ -본문 중 최갑수교수의 인터뷰 중

 
   




결국 판결은 김 교수에게 큰 가르침을 주자는 사법부의 훈육이었다. 저자가 꼼꼼히 기록한 재판 내용을 보자면 법을 잣대로 판결하는 사법부의 판사가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며 유연한 잣대가 강한자와 권력에 기우는 것이 당연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저런식으로 우리가 불합리하게 내려진 재판이 진행되었겠구나 라는 탄식이 나온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김명호라는 한 수학자에게 4년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량을 부과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도전한 사람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을 경험해야 할지를 보여 주었다. 죄질이 아주 나쁜 재벌들과 그 자녀들은 사회에 봉사 많이 하고 가정교육 잘 받았다며 내보내는 판결을 생산해내는 곳도 대한민국 법원이고 판사들이다. 그런 그들이 오늘 우리를 판결한다.‘- 본문 ’결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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