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파라다이스
강지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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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명 인사들의 잇따른 죽음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그(그녀)를 알지 못하더라도 티브이를 통해서 가족보다 더 자세한 얼굴과 생김새 다양한 일면들을 경험한 이유로 왠지 남의 죽음 같지 않았다. 오열하던 일반인들의 모습은 가족보다 더 과장스럽고 그래서 때로는 일부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하였을 터다. 다행히 살아 남아 있는 이들은 장례식 이후로 차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그들의 삶에 대해 자신의 삶을 챙기기 바쁜 나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같은 죽음이라도 누워서 병이나 늙어서 고요히 가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면 전해듣는 이들의 가슴을 흥분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자살이나 살인, 사고 등으로 생기는 죽음은 일면식 없더라도 호기심을 자극하고 원초적인 충동을 슬며시 끌어올린다.

살인을 주제로 하는 미국의 드라마는 대한민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서 ‘미드폐인’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심지어 연쇄살인범이 주인공인 드라마도 확실한 팬층을 가지고 있으니 일부에서는 자칫 현실의 사건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오해를 살수도 있음직하다.


갖가지 다양한 ‘죽음’을 주제로 한 소설은 충분히 매혹적이고 호기심 충만한 독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장르소설의 상투성을 드러낸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작가 강지영의 소설은 기존의 것과 거리가 느껴진다. 낮설음. 그러면서도 서서히 젖어드는 서늘함, 따뜻함, 유쾌함. 익숙하지 않은 데뷔작이라는 점이기도 하겠지만 자유롭게 상상을 넘나드는 작가의 재기가 피가 튀고 팔이 잘리고 널부러져 썩어가는 시신이 그려지는 속에서도 어이없이 웃음이 난다.

이걸, 블랙유머라고 하나. 아, 그러고 보니 장르적 특징이라고 할 수 없는 단편집 전체의 큰 특징 하나,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1인칭 시점을 고수한다는 것. 좀 고집스럽기도 하지만 충분히 흥미롭고 인물을 이동하는 1인칭 시점은 신선하면서도 자극적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것이 아니라 깊숙이 관여되는 ‘나’처럼 되본다고 할까. 잘 못쓰면 영 어색하고 몰입도가 떨어질 수 있는데 작가 강지영은 그런 면에서는 솜씨가 좋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인물에 대한 개성이나 그가 겪은 삶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는 점이다. ‘나’라서 쉬운게 아니라 더 어려워 졌다고 할까. 애정이 가는 인물들이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결말들도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긴, 악인이 살아남는 것이 현실이라면 문학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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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스캔들
박은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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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은 생물종과 인간의 본성이자 종족보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의 하나이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신은 쾌락을 허용했다. 욕구는 커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방종의 댓가는 크나큰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해온 문명은 ‘도덕’이라는 이름의 제도와 규율을 정해 ‘행위’에 대한 제한을 두게 된다.


그 제한은 시대와 장소, 문화에 따라 달라졌다. 기독교문화를 기본으로 한 미국과 유럽의 패권이 강화되는 근대에 이르러서 단일화된 제도를 세계가 받아들이게 되어 오늘날은 대부분의 나라에 정착되기에 이른다. 그 제도의 핵심은 일부일처제다. 가장 효율적으로 섹스를 제어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일부일처제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가진다. 남녀 모두 끊임없는 다른 암수들에게 욕구를 느끼는데 이를 오로지 법제도와 도덕률로 정해놓은 틀로 조절하려 하는 것이 애초에 무리였다. 이혼이 높아지고 사생아, 고아, 편부모 아래서 길러지는 불쌍한 아이들이 늘어간다.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게 되는 아이들은 유년기의 행복을 포기해야만 한다.


자유롭지 못한 연애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쓰느라 스스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고 서로의 소유를 인정한 이들은 자기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평생을 투자해야 한다. 물론, 교육과 학습을 통해 ‘성적으로 자유로움’의 댓가가 좋지못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인간으로서는 마음과 행동을 다스리기에 힘을 쏟아 유혹을 용케 떨쳐내기도 하지만 적어도 연애감정에 대한 윤리라는 것은 너무나 얄팍한 것이라 이를 통해 원초적 욕망을 조절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자본과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하는 가부장제아래의 남성은 비록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일탈’의 기회가 있었다. ‘딴살림’을 차리거나 ‘돈으로 사는’ 행위가 가능했던데 비해 여성은 경제활동이 어려웠고 사회적 편견이 두터워서 욕망의 분출기회 자체가 막혀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대에는 편견과 기회의 불균형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여성은 결혼에 이어지는 육아와 자식교육에 이어지는 책임의 사슬에 묶여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물론, 좋은 본보기도 많이 있다. 잘 다스려진 서로의 마음이 통하면 백년해로하는 부부의 경우도 충분히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억제된 욕망의 분출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비록, 주류사가들로부터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화랑세기>는 1000년전 이 땅위에 살아가던 우리 조상의 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저자는 이를 다소 자극적인 내용들로 조합해 책으로 엮어 내었다. 물론 요즘 뜨고 있는 ‘선덕여왕’의 분위기를 타보려는 출판사의 의도가 함께 했을 것이다.


냉정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유’와 이것이 당시 1000년을 이어온 상류사회에 미친 적지 않은 영향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성에 대한 자유와 너그러움을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스캔들’이 되지만 당시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활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 명의 여왕을 배출한 신라 통치계급의 내면에 성에 대한 차별 없음이 정치와도 그대로 연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실은 세 명의 왕을 비롯한, 왕자와 세손까지도 ‘몸을 바쳐’ 모셨다. 나를 주장하기 보다 당당한 교성으로 너의 존재를 증명하여라 라는 저자의 해석은 다소 자극적이다. 선덕여왕과 천명공주의 관계도 편하지 못했다. 천명의 두 남자를 선덕여왕이 왕에 오르면서 차례로 빼앗아 갔다. 그리고 화랑 풍월주를 잘 모셔 남편을 출세시킨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오늘날의 시선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색공지신(色供之臣), 당시의 색공의 풍조가 오늘날 ‘성상납’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우리가 가진 사고를 좀 더 확장해서 당시를 바라보자. 자유로운 교류와 소통이 편견을 없애고 선택의 폭을 넓혀서 파격적인 인사나 인물등용에 좋은 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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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하는 민주주의 - 서른 살, 사회과학을 만나다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5
손석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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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 40%를 상회하는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희망인가. 일반의 기대에 못미치고 그 증거로 낮은 지지율을 보이던 것이 국정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가 그리도 높아진 것일까?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4대강 죽이기를 넘어서 민주화운동의 두 거물이 저 세상으로 떠나면서 남긴 ‘화해’와 ‘통합’의 정신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라도 한 것인가.

 



주가가 꾸준히 오르고 있고 부동산 경기도 그 좋았던(?) 80년대 말을 보는 것 같이 들썩 거리는 것에 다수가 행복해지기라도 하고 있는 걸까. 747까지는 아니더라도 (7%성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지만) 이명박의 경제정책이 꾸준한 효과를 발휘 하고 있는 것일까. 서민을 위한 보금자리주택의 정책적 허술함이 드러나고 세종시와 같은 지방분권화의 약속은 어디론가 흔적을 찾기 힘든 때에 위기 극복 카드로 총리 인사가 일부에게 심어줄 ‘희망’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생존을 위해 싸우다 숨진 용산의 주검들은 아직도 싸늘한 곳에 얼린 채 8개월여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고, 쌍용차대량해고에 이은 금호타이어 비정규직의 해고로 이은 폭력 사태. 노동자의 대다수인 비정규직에 대한 대우가 ‘노예’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과연 민주와 자유로 대표되는 21세기의 자유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타오르던 촛불은 꺼지고 소통의 광장이 막혀있는 지금,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40%의 국민이 땅한 평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17%의 상위계층 가구가 전체 주택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이 땅에서 매일 뉴스에 땅값이 오르네 아파트값이 오르네 하는 이야기를 당신은 즐겁게 볼 수 있나요.

 



평등하지 못한 조건의 경쟁을 통해 계급을 세습화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대한민국의 ‘교육’에서 출발선이 까마득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성큼성큼 달리고 있는 일부의 유복자들을 바라보는 서민 부모가 느끼는 절망감은 ‘나’와는 무관한가. 그저 착하고 바르게만 커라. 그리고 돈이 없더라도 나쁜 짓만은 하지 말아라 라는 말이 학벌 없이 취업이 원천 봉쇄되고 ‘서울대’가 아니면 ‘학벌’이라고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그래서 하층민에서 상층민으로 상승과 출세를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나라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 말이다.

 



‘왜 40대인 아버지가 일하고 쉬는 시간보다 초등학생인 내가 공부하는 시간이 더 많나’라는 한탄의 유서를 쓰고 자살한 의정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일화는 오늘날 ‘교육’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상징한다. 인간답지 못한 삶을 강요당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는 좌절만을 맛보게 만드는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성적을 비관해서 이달에도 한명, 다음 달엔 두 명이 죽게 만들고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또는 못 갚아서 죽는 대학생, 실업을 비관해서 죽는 가장을 낳는 사회는 개혁이 필요하다. 아니, 혁명을 꿈꿔야 한다.

 



국가의 위기는 애국심 충만한 국민이 ‘금 모으기’ 등의 ‘허리띠 졸라매기 운동’으로 감당하며 IMF때 대량해고와 감원, 경기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직원들의 감원과 해고를 반복하며 임원진의 감원이나 감봉은 고려하지 않는 기업들의 행태는 몸 바쳐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일 해온 대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파렴치함의 극한을 보여준다.

 



‘국익’은 과연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이익은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것인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국가와 대기업이 주도하는 ‘경기부양’의 이익은 주가상승과 기업매출의 향상으로 소수 상위 기득권층에게 돌아간다. 재벌가의 주가 보유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대한민국 평균수입의 수백 명의 노동자가 평생 먹고 살 돈을 보유한다. 나도 주식이 있다며 위로하고 작은 희망을 가지는 것은 노동자가 연대하는 것을 방해한다. 분열하고 개인화하는 마음이 모여 이룬 ‘민심’은 결국 대한민국을 ‘잘 살지 못하는’ 대중의 피만을 먹고 사는 파렴치한 괴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책의 머리에 등장하는 손석춘은 가장 낮은 단계의 ‘학습모임’을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이야기 했던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를 떠올리면 된다. 이런 연대가 모여 진보정당을 집권하게 하고 끊임없이 개혁을 요구하고 이루어내는 과정이 진정한 민중을 위한 발전이다. 이런 구호가 생경하게 느껴지고 빨갱이 라고 댓글을 달지 모르는 당신, 스스로가 과연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희망을 가지고 살며 그것을 내 주변의 다수가 공유하는 지 그리고 자손의 대로 물려주게 될 지 고민해 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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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마드레 - 공존을 위한 먹을거리 혁명
마이클 폴란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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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에서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먹이에서 모든 생명체가 태어난다…….모든 존재는 먹이를 통해 태어나고, 먹이를 먹고 살다가, 죽으면 존재는 다시 먹이로 돌아간다.’  
   

 


먹이를 위한 활동은 기본적인 욕구의 해소에서 비롯되었다. 동물과 식물,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종들은 그들의 ‘먹이’를 먹고 산다. 인간이 집단으로 살아가게 된 계기는 바로 이 먹이를 구하는 활동이 혁명적으로 변화한데 기인한다. 이런 변화를 주도 한 것이 바로 ‘농업’이었다. 농업은 수렵과 채집을 위해 떠돌던 집단을 정착할 수 있게 했고 먹는 것이 안정되면서 점차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문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며 이끌어가는 것은 순전히 농업의 힘이었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무려 4000년을 넘는 기간을 ‘농업’이 인간의 삶을 이끌어왔고 이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서 농사의 풍흉에 따라 통치자가 울고 웃는 일이 있었다.


오늘날의 농업은 농민이 대다수이던 백여 년 전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농업생산물은 물질로서의 큰 가치를 가지기 힘들며 비전 없고 늙은 노인들의 소일거리로나 대접받고 있는 실정이다. 원인은 세계화의 가치가 일부 거대 다국적 기업의 이익만을 좆는 데에 있다. 그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개방되는 국가는 농업을 내주고 땅을 내주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를 지향한다는 명목하의 개방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자국의 농업조차 말살하고 대가로 자국 대기업의 이익을 건져올 뿐이다.

문제는 기업은 다수를 위한 공명과 도덕, 자연 생태계에 대한 보전적 가치 등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이윤’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데에 있다. 밀림의 벌목이 지구 온난화나 그곳에 사는 소수민족의 생계와 수천 수만 명의 생물들에 미치는 영향 따위는 고려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이 ‘먹고 살 수 있게’하는 시스템의 구축은 고의적으로 방해 당한다.  

 

소위 ‘터미네이터 종자’라는 것을 개발하여 파종과 수확이후에 일부의 종자를 보존하여 다음해에 파종하는 일은 ‘없는 것’으로 만들어 지속적인 매출의 기반을 구축한다. 씨를 맺지 않는 종자, 번식능력이 제거된 반쪽자리 종자는 오늘날 농업의 상징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자사의 화공약품을 쓰지 않으면 수확조차 어렵게 만들고 선택성 제초제로 땅을 피폐화 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세계화 전략에 놀아나는 각 국가가 지향하는 국익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핸드폰과 자동차, 선박 수출로 이익을 얻는 대기업뿐이다. 노동자 8%를 고용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들은 국익신장을 위한 조건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노동자이자 시민, 소비자인 대다수의 ‘나머지’를 희생시킨다.

‘테라 마드레 Terra Madre'는 식량생산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존중하고 이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는 구호다. 지구가 앞으로 영속되려면 만물의 어머니라는 지위를 주고 이를 다수의 철학으로 공유하는 일을 확산해야 한다. 땅을 존중하고 그에서 비롯되는 생명을 우러를 줄 아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의 ’세계적 모임‘이다. 다국적 농업 대기업의 이익을 앞세우는 WTO와 콩, 옥수수, 쌀, 밀의 교역에만 힘을 쏟는 농업 세계화와 과감히 선을 긋는 행위다.

세대에 걸쳐 유지된 ‘맛좋은 밥상’을 잃어가는 현실을 되돌아보고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근원이며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농업을 복구하는 일. 독성 없는 유기 농산물을 원하는 소비자와 이를 위해 땀 흘리는 농부를 지원하는 소비자들의 행동을 촉구한다. 단일 품종의 대규모 경작을 지양하고 다품종 소규모 경작을 지향하며 이를 위해 땀 흘리는 소농을 위한 연대가 시급함을 알리고 있다. 슬로푸드 운동의 창시자인 카를로 페트리니가 시작한 운동은 격년으로 열리고 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식량의 자유’가 바로 우리 일임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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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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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빌딩과 아파트로 들어찬 서울의 한쪽, 젊음의 인디문화가 꽃피는 곳, 나의 학창생활은 그 곳과 함께했다. 4년, 아니 5년 동안 생활했던 공간이다. 기껏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그 긴 시절을 교과서와 참고서에 매달리고 학원에 들인 생은 솔직히 별로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이 없다. 역시 민주사회의 시민이 되기 위한 자유와 이성을 키우는 학습의 공간은 대학시절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0년대의 중후반을 보낸 나의 대학시절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쇠락한(?) 운동권은 곳곳의 대학에서 집권에 실패했고, 급기야는 한총련을 탈퇴하는 학교들도 늘어갔다. 최루탄냄새를 간간히 맡을 수 있는 것은 군대가기 전 김영삼 정권 때에 손에 꼽을 만하고 그 외에는 학우들의 저조한 참여로 대회조차 무산되기 일쑤였다. 정치적으로는 좋은 시절이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남과 북이 손을 잡은, 민주화 운동의 명목이 사라져버린 때에 느닷없는 학생회의 강경한 구호는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의 시대엔 오히려 생뚱맞을 지경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꿈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원대한 비전을 펼치던 때였다. 군대를 거치고 아이엠에프가 국가에 떨어지면서 복학을 했고 나의 꿈과 희망을 현실에 차곡차곡 접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곳은 여전히 나의 추억과 꿈과 희망이 자라던 내 과거의 ‘자랑’이 되던 곳이다.

나는 홍익대학교 건축과를 다녔다. 미술로 유명한 학교는 비록 공대에 속하긴 하지만 ‘예술성’이 강조되는 건축설계분야 역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학교 주변에는 내가 다니던 시절에 많은 ‘작업실’이 있었다. 요즘 ‘개그콘서트’의 ‘분장실의 강선생님’ 의 분위기 같은, 엄밀히 따지면 선생님까지는 없고 선후배들로 구성된 집단 주거, 학습 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소규모 선후배 관계로 이어져 ‘작업’을 하는 공간이었다. 30여년 된 작업실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도 있었다. 일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은 우리말 작업실을 놔두고 ‘아틀리에 atelier'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기엔 좀 어둡고 눅눅하며 깨끗하지 못한 환경을 지닌 곳이었다. 여학생비율이 일정정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졸업 후의 도제방식의 설계사무실 환경을 미리 익히기라도 하듯, 선배에서 후배에게 기술이 전수되는 시스템은 지금의 세태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수도 있다.

어둡고 눅눅한 지하의 방에다 작업을 위한 제도판들을 배치해 놓은 것이 인테리어의 핵심이었고 벽에는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작품을 흉내내보는 자신의 스케치와 도면들이 붙어서 ‘작업실’임을 증명했다. 월단위로 나오는 설계 과제를 위해 매주 한번씩, 그리고 마감에 이르러서는 며칠밤정도는 잠을 안자거나 줄이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필수였다. 체력이 중요했으나 운동은 게을리 하고 잠을 자지 않으니 비쩍비쩍 마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설계 작품의 질보다 밤샘일수로 경쟁하기도 했고 과제에 집중하는 날보다 술로 날을 새는 날이 더 많았다. 가난한 학창시절을 식구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붙어 지내는 작업실 사람들은 소속감과 연대를 굳건히 하고 사회진출이후에도 서로의 안부와 경조사를 살뜰히 챙기는 사이로 이어진다. 그 황금기의 추억이 그들의 연대를 이어주는 것이다.

작업실 생활은 비단 '작업'만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취미와 여행, 연애가 모두 공유되며 이는 사생활침해를 생각하는 '개인'이라면 분명히 거부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티격태격 일도 많고 서로에 대한 애증이 싹트기도 한다. 감정과 자본의 '나눔'에 대한 훈련소 같은 곳이랄까.


나에게 <습지생태 보고서>는 ‘추억’이다. 만화를 하는 자취학생 대여섯이 모여 지하의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나의 과거와 겹친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젊음에도 불구하고 행동반경이 넓지 못한 신세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어두움을 작가의 시선으로 그린다. 젊은 미혼 남성 여럿이 장기간 합숙을 하는 비정상적인 생태에 대한 추억담. 은유와 블랙유머, 재기 넘치는 상상력이 특유의 선 굵은 그림과 어우러져 감동과 즐거움을 준다. 젊음은 그래도 아름다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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