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죄악인가
권혁범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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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죄악인가/ 권혁범/ 생각의 나무/ 11,000원


한쪽에서는 굶어 죽어가고 한쪽에서는 남아서 버리는 음식. 음식이 남아서 버리면서도 굶어 죽는 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다면, 과연 이 둘은 무슨 관계인가.

둘은 싸웠다. 둘의 생각은 너무도 큰 차이를 보여 도저히 마주앉아 이야기할 상황이 안 되었다. 그래서 싸웠다. 상처는 컸다. 집이 부서지고 마당이 불탔으며, 기껏 심어 놓은 온갖 곡식들도 다 타고, 심어 놓은 나무도 죽어버려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건물과 공장도 다 부셔져 완전히 새로 짓지 않으면 안 되다. 둘만 싸운 것이 아니라 둘의 싸움에 그 형들이 끼어들어서 싸움이 커져버렸다. 둘은 후회하지 않았다. 싸움을 끝낸 것이 아니라 잠시 쉬기로 한 것이다.

이 둘은 형제다. 피를 나눈 형제. 그 형제는 각기 자신의 땅을 보유하고 자신만의 체제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다. 그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형제가 누구 이었는지 잊고 있다.

어떤 때에는 서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휘장을 휘날리며 한마음이 되기도 한다. 더 큰 나라들을 상대로 싸움을 할 때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서로 마주보기조차 거부한다. 서로를 헐뜯고 오해하고 욕하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다. 애증의 관계인가.

형제는 한 ‘민족’이다. 몇 천 년의 역사를 하나로 가지고 있다. 그 역사는 ‘민족’을 규정한다. 그들의 역사 밖의 사람들은 모두 ‘외세’가 된다. ‘우리’만의 색깔이 있다. 그 색깔에 맞지 않는 이들도 문밖에 세운다. 흐름을 따르지 않으면 ‘이지메’ 당한다.

엄밀히 한 민족이면서 서로에게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의 규정은 국가 통치의 권력에서 유래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진 한 민족에 대한 정의의 모순이다. 모순은 이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금발에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은 우월하고 검은 피부에 검은 머리를 한 이들은 천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네 나라의 침략때는 동맹이니 협력이니 하는 단어를 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민족주의는 죄악인가>의 저자는 민족주의가 악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민족’이라는 단어의 유래와 의미. 오늘날에 민족주의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알린다. 언제나 ‘타자’를 적으로 놓는 것으로 작용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민족주의다. 히틀러의 독일이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파리 잡듯이 가스실에 가두어 죽였던 것처럼, 유색외국인에게 험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더럽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우리의 동남아인에 대한 적의감이 자연스레 솟아나는 것도 다 태어난 이후 교육을 통해 습득한 민족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다민족화가 진행되는 현실에서 이러한 사고는 갈등과 반목만을 낳을 뿐이다.


이를 좀 더 진보적으로 해석하고 현재의 불합리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일까.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아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그것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클 뿐이다. 지금 21세기의 세계자본주의체제에 대한 고민과 진보적 대안 모색에서 필요한 것은 ’탁선산‘이 인용한 사학자 ’지수걸‘의 말대로 민족주의에 대해 ‘겸손한 장례식’을 치루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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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길을 가라
로랑 구넬 지음, 박명숙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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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두려움. 내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 번의 실패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다음번에 다시는 같은 시도를 하지 않으려 한다. 상대방에게 부탁하거나 희박한 확률을 가지고 있는 모험에 대한 두려움은 나를 좀 더 사교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이 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게 한다.

나는 알고 있다 나의 단점을. 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오랜 세월동안 억눌려 온 내 자아의 일부가 그리 쉽게 펴질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꾸준한 자기 암시로 좋아질 수는 있을 거라는 희망은 갖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이후로 몇 년이 흘렀지만 나는 정체되어 있음을 느낀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원하는 길로 가기 위해서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로랑 구넬의<가고 싶은 길을 가라>는 진정으로 나와 내 인생의 올바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생각과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주인공은 ‘네가 얼마나 잘 고치는지 보겠다’ 라는 마음으로 찾은 ‘치료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인생 최대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는 찾지 않을 것 같았던 첫 방문의 마음이 바뀌고, 매일 찾아서 이야기 나누고 그가 내주는 ‘숙제’를 실행하면서 얻는 깨달음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끼고 급기야는 완전히 몰입하게 되어 자신을 결국 변화시키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변화는 그리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며칠의 기간이 내 삶을 되돌아보고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한 발돋움으로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나에게 가르침을 줄 선생이 필요한 것인가. 스스로 생각을 전환하여 실행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나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내린 경정과 선택과 의지로 이루어진 삶을. 의문과 망설임, 다른 이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나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는 영원히 작별을 고할 때다……삶이라는 게임의 주연으로서 그 규칙을 조금씩 터득해 나가야 한다. 비록 삶의 목적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남아 있겠지만.’  
   




주인공 줄리앙의 마지막 독백은 내가 가지고 있는 불만을 대변한다. 곧 내가 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가 대변하는 것이다.


나는 변할 수 있을까. 현재의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 나갈수 있을까. 주인공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샴탕 선생의 말들이 나에게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일까. 사실 나는 가고 싶은 길을 걸어왔다. 삶에 만족도도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상당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목은 마르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그리고 그 길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행복이 지금의 나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내 자신에 대한 확신, 그것이 <가고 싶은 길을 가라>가 ‘나’에게 던지는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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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2권 세트
아트 슈피겔만 지음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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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민족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해 온 국민으로서 외국인이나 타 국가의 얼굴색이 다른 이들을 배타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이라면 더할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이념에 따른 타자를 평생을 같이 살아온 ‘이웃’임에도 고발하거나 직접 죽여야 했던 과거사가 있는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그 고통을 동감하는가?


‘아우슈비츠’로 떠올리는 유태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광기어린 파시즘과 민족주의가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지금도 세계의 변방에서는 총성과 학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중심의 세계와 막후에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유태인들에 의해 그네들의 이스라엘 지배를 합리화 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일부의 지적은 별도로 하고서라도 그 규모와 위악성이 오히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전쟁과 식민지배 시대의 학살사건들을 가려버리지 않는가 경계도 해야한다.


수용소 생활과 가스실에 대한 묘사가 과거 유태인 학살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이고 이는 대중매체와 미디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컸다. 영화와 책이 대중적으로 전하지 못하는 부분의 전달을 시도하는 만화, <쥐>는 작가의 아버지가 경험했던 전쟁과 수용소생활을 작가의 현실 속에서 그리는 ‘액자식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주관적 가족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효과뿐 아니라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뇌와 현실의 ‘지독한 인간’인 아버지가 그의 과거를 통해서 내면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를 돕는다.


당시의 유태인을 향한 광기의 근본을 따지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라해도 히틀러의 정치기반이 ‘증오’로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600만의 인원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인류사의 커다란 비극임이 틀림없다. 이를 받아들이는 오늘의 독일은 당시의 미친 짓에 동의했다는 사실만가지고도 커다란 부끄러움과 용서받지 못할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역사현장과 사료의 보존과 후세에 이어지는 끊임없는 교육으로 다시는 비슷한 일이나 생각이라도 가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래전 방영되었던 <여명의 눈동자>를 기억나게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제품과 자동차는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면서 결국 영토와 과거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핏대를 세우며 으르렁 거린다. 그네와 다른 점은 그들의 대부분은 ‘무관심’하지만 우리의 대부분은 ‘오버’한다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이며 약자인 입장으로서 한국을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 부분이다. 예컨대 평상시 일본의 악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일상어, ‘일본 놈들’은 자기위안의 내뱉음에 불과하며 상처 치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좀 더 세밀하고 이성적인 관찰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노력, 그리고 과거사의 면밀한 분석이야 말로 후세로서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위한 자기발전의 한걸음이 되지 않을까.

<쥐>는 그저 ‘아우슈비츠’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엄정한 학살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가 현실을 살아가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당시의 야만이 얼마만큼 지독했는지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지는 않는다. 우화된 유대인, 독일인, 폴란드인의 등장은 어쩌면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물캐릭터의 만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동물농장>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당시의 국가적 성향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전쟁을 통해 몸에 익어버린 불안과 공포. 지극히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히스테릭한 감정과 행동을 보이는 아버지.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의 구술과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지는 전쟁과 학살속의 ‘가족’과 ‘이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당시의 현실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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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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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그러했을까. 조선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은 학자다. 천주교를 받아 들여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고, 뛰어난 학문으로 당시 최고의 권력자에게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가 오늘에 뛰어난 학자로서 추앙을 받을 수 있던 것은 당시의 세태의 흐름에 당당히 반기를 들고 실용을 중시한 학문을 추구했던 것 때문이다.

주자학을 모시는 이기설(理氣說)·예론(禮論) 등만 놓고 갑론을박하던 당시의 학자들과 거리를 두고 현실에 쓸모가 있는 학문을 추구했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아니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입장에서 출세와 권력을 추구했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그 많은 권세가들과 탐관오리들은 당시를 호령했겠지만 후세에 길이 남는 이름은 정직하고 백성을 생각했던 관료나 학자들의 이름인 것이다.


<목민심서>엔 정약용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고을의 수령으로서 부임하면서 퇴임할때까지 가져야 할 마음과 몸가짐, 당시의 격식이 아닌 소박한 예에 대한 소견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부임(赴任)과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황(陳荒), 해관(解官) 등 12부의 각 6조씩 72조로 구성된 방대한 ‘지방행정지침’에 관한 내용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당시엔 고귀한 사명과 같은 일이었다. 오늘날 서비스업으로 전락해버린 행정과는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지위를 이용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별로 다를 바 없고 재물을 축적하는 관료역시 천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바뀌지 않은 더러운 습속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경계하고 자신이 물들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윗사람’으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고 널리 두루 이롭게 하기 위해 항시 주변을 살피고 자신의 행동이나 언사에 상처받지 않을 ‘아랫사람’이나 백성은 없는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케케묵은 옛이야기를 오늘에 꺼내 보는 일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엿보는 재미가 있어서 좋은 일이다. 그리고 행정가이자 사상가, 종교인이었던 정약용선생이 추구했던 목민(牧民)을 오늘의 ‘윗사람’들이 널리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학자이며 위정자인 오늘 대한민국의 총리인 정운찬님에게 ‘백성’을 생각하는 행보를 하시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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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블로거 29인의 내 삶의 쉼표 - 제3회 YES24 블로그 축제 수상작 모음집
YES24 블로거 29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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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추억을 되짚어 보는 일은 적당한 고통과 회한, 기쁨과 환희를 오늘에 살려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한 기회는 늘 오는 것이 아니며 어제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어야 가능하다. 오늘에 살리는 일은 또 다른 것이다. 어떤 ‘매개’가 있어야 가능하다.


추억의 사람과 만났다거나 당시에 경험했던 경험과 비슷하거나 같은 사물, 환경에 맞닿았다거나 하는 일등이 기억중추를 자극한다.


남의 경험을 들여다보는 일도 그중 하나다. 나와 비슷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내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여 생생하게 살려낼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예스24는 선도적 인터넷 서점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고객들에게 가격과 편리함을 무기로 장사에 성공했고 이를 모델로 한 유수의 기업들의 추격을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물론 부작용도 없지 않다. 서적의 소비자가격이 오르고 ‘갑’의 무자비한 할인 경쟁에 ‘을’의 출판사들이 몸살을 앓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정가를 제대로 받는 오프라인의 동네 서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중소규모의 서점을 찾기는 힘들어졌고 대형서점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좋은 점도 있다. 전체적으로 파이를 키우는 노릇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소통의 공간 인터넷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독자들과 교감하는 자리를 만들고 오프라인서점으로서는 흉내조차 힘들 파격적인 이벤트와 행사, 저자와의 만남, 북콘서트 등을 출판사와 손잡고 진행하여 독자와 저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글쓰기가 일상화된 요즈음 적극적인 저자 발굴로 다양한 분야의 ‘쉬운’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블로그 축제는 넓은 범위의 예술. 책, 영화, 음악의 세 분야를 주제로 자신의 인생을 아우르는 추억을 끄집어내는 작업이었다. 수백 명의 블로거들의 글들 중에 심사위원의 안목을 통해서 걸러진 추억들이 가득 담겨 있는 책. <예스24의 블로거 29인의 내 삶의 쉼표>


이거 예스24의 홍보지같이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책을 통틀어 ‘예스24‘라는 단어가 쓰인 곳은 손을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대신, 전문 글쟁이 뺨치는 야들야들한 솜씨의 글들이 내가 봤던 혹은 보고 싶게 만드는 책과 영화, 그리고 듣고 싶은 추억의 음악과 버무려져 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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