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만나는 건 어딘지 좀 연애 관계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을 만나는 행위에는 분명 좀 연애 관계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절대로 사귈 수 없는 타입이 있다

사람마다 절대로 사귈 수 없는 타입이 있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나는 자기계발서나 말랑말랑, 희망적인 말만 늘어놓는 에세이류, 사진으로 도배된 여행서, 오그라드는 말장난으로 가득한 몇몇 한국 현대소설,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베스트셀러라는 일본 현대 소설 등등은 절대로 읽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잘 읽지도 않는데 이런 책을 사람으로 묘사한다면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는 절대로 연애할 수 없다. 저런 책을 사람으로 묘사한다면 딱 떠오르지 않나? 내가 너무나도 혐오하는! 역겨운 단어인 ‘스펙’ 쌓기에만 골몰하는 타입, 오그라들게 희망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 내용보다 비주얼에만 치중하는 사람 등등. 정말 짜증나는 타입이다.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사람이나 책이나.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한테는 별로인 사람이 있다
그런 경험 다들 있지 않나. 소개팅이나 미팅을 해주는 사람이 그 사람 굉장히 괜찮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을 해주는데, 막상 만나보면 ‘오마이갓’을 외치고 싶던 그런 경험- 사람들이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고 칭찬해도 내 눈에는 영 아닌 그런 사람이 있다. 책도 그렇다. 아니, 책은 더 그런 거 같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책(고전이라 불리는 그런 책)을 제외하고 지금 이 시대에 자주 화자 되는 책(베스트셀러)은 이상한 책일 확률이 훨씬 많다. 모든 사람한테 무난한 책은 아무 매력이 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연애도 많이 해 본 사람이 잘한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알고, 연애도 많이 해 본 사람이 잘한다고. 책도 그렇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책을 보는 눈이 생긴다. 사람들이 베스트셀러에 의존하면서 이상한 책을 집어 들어 읽는 이유는 책을 보는 자기만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눈이 없으니까 일단 사람들이 많이 읽었다는 책부터 시작을 한다. 하지만 그런 책은 이상하기 마련이어서, 그런 책을 오랜만에 집어 들어 읽고는 ‘역시 책은 별로 재미없어’라는 결론과 함께 책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많아지나…. 물론 이건 알 수 없다. 안 그런 사람도 있는 거 같다….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을 만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자기한테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기와 맞는 사람이 어떤 타입인지는 알게 되는 듯하다. 보는 눈, 고르는 눈이 생긴다고나 할까. 책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자기 나름의 이상형이 있다
사람들마다 연애를 할 때, 혹은 연애를 하기 전에 자기 나름의 이상형이 있고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을 만나려고 애쓴다. 아쉬운 것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 무척 크다는 점이다. 연애처럼 책을 고를 때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물론 이것도 연애를 많이 해봐야 기준이 생기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연애를 해본 지 하도 오래된 사람이거나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상형이고 뭐고 일단 사람부터 만나고 싶은 것처럼. 책도 하도 안 읽은 사람은 일단 이상형이고 뭐고 책부터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책을 읽은 사람, 책을 정기적으로 꾸준히 대하다 보면 아, 내가 좋아하는 책이란 이런 책이구나, 이런 글쓰기,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내가 좋아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다. 나는 일단 남는 게 있는 책이 좋다. 시간 들여 읽었는데 허무한 느낌이 들면 좀 많이 억울하다. 깊이도 있고, 통찰력도 있고, 좀 삐딱해도 좋으니 그저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책이 좋다. 거기에 재치도 있고 위트도 있으면 좋고. 왠지 울컥울컥 감동을 느끼게 하는 책도 좋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계속 알고 싶다
이 제목에 부연설명이 필요할까? 그래도 해보자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고 계속 파고들고 싶어지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어떤 한 책을 읽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 작가의 작품을 다 읽어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돈 쓰는 게 아깝지 않은 것처럼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은 왠지 꼭 사서 소유하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사람을 꼭 붙들어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소유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좋아도 권태기가 있다 &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책을 읽는 행위도 늘 한결같지는 않다. 어느 순간 책이 눈에 한자도 안 들어오는 때도 있고, 뭘 읽어도 감흥이 예전 같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다가 아예 책을 손에서 놓게 되기도 한다. 연애를 할 때도 사람이 지겨워질 때가 있다. 그 지겨움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극복해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를 때, 극복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 사람과 ‘안녕~’을 한다. 아예 책을 손에서 놓게 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시작할 때, 흔히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공감한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만난 그 때가 별로 적절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나기도 한다. 반대로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났더라면 전혀 사귀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을 순전히 타이밍이 잘 맞아서 사귀게 되는 경우도 많다. 책도 그렇다. 계절에 따라 확실히 잘 들어오는 종류의 책이 있다. 계절뿐만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 상태나 처한 상황에 따라 같은 작가의 책이라도 더 잘 들어오는 때가 있다. 게다가 책은 나이를 타기도 한다. 10대에 읽었다면 절대로 좋지 않았을 책이 20대 30대 혹은 그 후에 만났기에 ‘인생의 책’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일도 빈번히 일어나고.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할 때가 있다

이건 내가 종종 써먹는 비유인데, 세월이 지나고 보면 내가 대체 저런 책을 왜 읽었나, 저런 음악을 왜 들었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사람도 그렇다. 아니 사람은 당연히 그렇다. 돌아보면 그런 사람을 만났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지경으로 이상한 사람을 좋아했거나 만났던 적, 다들 있을 것이다! 책도 그렇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을 보면 내가 대체 저런 책을 왜 내 돈 주고 샀지? 정말 내가 산 거 맞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저건 선물 받은 책일 거야! 절규하는 책들이 있다. 그런 걸 읽었던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

남는 게 전혀 없는 연애도 있다
사람들은 책은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대단히 좋은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난 세상에 존재하는 절반 이상의 책은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종이 낭비라고 생각하는 책들이 서점에만 나가봐도 널리고 널렸다. 그런 책을 읽느니 차라리 다른 걸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넘치고 넘친다. 연애도 그렇다. 꼭 연애를 뭔가 남기려고(애를 남기려고? 응?) 하는 건 아니지만 돌아보면 굉장히 소모적이었다는(감정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등등) 느낌만 강하게 드는 그런 연애가 분명 존재한다. 둘이 함께 한다고 항상 꼭 좋은 게 아니다. 소모적인 연애를 하느라 지치느니 그냥 혼자 조용히 생활하는 게 훨씬 낫다.

좋아하면 스킨십을 마구 하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계속 스킨십 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좋아하는 책과 무한정 스킨십 하는 사람 있나?;; 궁금하다. 막 책을 쓰다듬어? 책을 껴안아? 책에다 막 뽀뽀를 한다? <-이런 분을 알고 있다면 제보 바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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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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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시리도록 춥다. 이런 겨울에 읽기에 딱 알맞은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이디스 워튼의 <겨울>. 원제는 <Ethan Frome>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다. 문학동네에서는 제목을 <겨울>이라고 명명했다. 문학동네 이전에는 문예출판사에서 <이선 프롬>으로, 열린책들에서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다.


처음 책을 읽기 전에는 <이선 프롬>이라는 원제와 <겨울>이라는 제목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겨울>이라는 제목이 꽤 그럴 듯하다. 더욱이 문학동네에서는 이 책과 함께 이디스 워튼의 <여름>도 함께 출간했었다. <여름>은 <겨울>과 달리 ‘생의 열기로 뜨거웠던 한여름 소나기 같은 사랑’ ‘젊은 여성의 성장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자면 워튼의 이 작품은 <여름>과 대비되는 주제와 내용을 다뤘다는 의미로 <겨울>이라 번역한 것도 꽤 괜찮은 느낌이다.

이 작품에는 평생 ‘겨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겨울과 같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혹독한 추위와 함께 모든 것이 얼어붙어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겨울. 그런 겨울이 지나면 꽃이 만개하는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봄도 없고 끝없이 겨울만 이어진다면? 주인공 이선 프롬이 바로 그런 남자다. 그의 인생에서 봄이 존재했던 적이 있는가? 아, 그래 그에게도 봄이 잠시 찾아왔다고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봄은 끝내 그와 함께 겨울에 머물고 만다.

<겨울>은 무척이나 차갑고 슬프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설원 위를 혼자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액자 소설 구조를 띄고 있어서 슬픔이 조금 미약해지는 느낌인데 만약 액자 소설 구조를 탈피했다면 이 작품의 우울한 정서, 슬픔은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듯하다. 책의 뒤표지에 “<겨울>이 뿜어내는 암울한 심리를 좋아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은 마음속으로 혼자만 즐겨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 톄닝 (소설가)”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던데, 정말 그렇다. 이 작품은 더없이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이선 프롬은 19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항상 겨울만 존재하는 듯한 마을 스탁필드에 사는 남자다. 그에게도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고 그 꿈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가 아프고 그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부모가 죽은 뒤에 꿈을 찾아 나섰으면 되는데 인생은 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를 돌봐주던 한 여인에게 청혼을 하고 그 여인과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 마을의 기운 탓일까, 이 마을은 유난히 병든 사람들이 많고 이선이 결혼한 여인도 결혼 전에는 그렇게 생명력을 뿜더니 결혼 후에는 그녀 역시 병들고 만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줄기 희망 같은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매티- 아내의 먼 친척이다. 병든 아내를 돌보기 위해 매티는 이선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된다.

이쯤하면 병든 아내를 사이에 두고 매티와 이선의 그렇고 그런 불륜(?)이 그려지려니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매티를 향한 이선의 가슴앓이, 혼자만 앓는 질투와 사랑, 기대, 아내에 대한 책임감과 죄의식….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배반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처음에는 병든 아내를 곁에 두고 다른 여인을 욕망하는 이선의 행동에 화가 났는데 점점 매티를 향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응원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최고 절정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의 간절한 희망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나 어쩐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그 가련한 꿈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책을 덮고도 한 동안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겨울 공기는 찬 만큼이나 투명하고 가슴 시리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차갑지만 오염되지 않은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이선의 사랑이 딱 그랬다. 원문으로 읽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싶어진다. 비록 번역서로 읽었지만 이디스 워튼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섬세한 심리 묘사, 눈에 잡힐 듯한 아름다운 배경 묘사, 녹록치 않은 주제의식까지….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이디스 워튼의 열렬한 팬이 될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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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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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는 ‘하인학교’라는 제목 때문에라도 꽤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 그 발상부터가 무척 독특하다. 아니, 이 세상에 주인이 아닌 하인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어? 하는 생각. 게다가 주인공인 ‘야콥 폰 군텐’은 소위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다. 그런데, 자진해서 하인이 되고자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들어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 가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자 하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정말 독특하다. ‘학교’에 들어간 소년의 이야기이니, 성장 소설인가 싶지만 성장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성장’이란 전혀 없다. 성장, 발전, 진보, 앞으로 나아감, 나아짐, 변화, 달라짐 이런 단어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저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야콥만 성장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작품 자체, 즉 이야기 자체의 어떤 변화도 전개도 없다. 스토리 자체가 멈춰있다. 때문에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게 뭐야?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 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 질 거야, 뭔가 색다른 변화가 있을 거야.’ 라고 믿고 넘겨보지만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깨진다. 야콥도 제자리, 이야기도 제자리. 야콥 주변인물,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아이들도 제자리다. 그래도 명색이 학교인데, 뭔가 배우지 않아?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이 학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운다. 그저 인내하고 참는 법, 견디는 법을 배울 뿐이다(이것도 배움의 하나일까?).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야만 하인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하인으로 취직되어 나갔을 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가져서는 안 되고, 상실감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며, 세상에 대한 어떤 의문도 제기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저 제한된 어떤 시스템 안에서 복종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 견디는 일만이 허락될 뿐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살기 때문에 벤야멘타 학교의 아이들은 별다른 걱정과 근심거리가 없다. 밝고 천진난만하다. 단지 야콥, 야콥만이 계속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 또한 이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점점 의문하는 능력은 사라지고 견디는 능력은 늘어나게 된다. 야콥은 그런 자신이 괴로워 의문하는 능력을 없애버리려 애를 쓰기까지 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그의 가장 커다란 목표이므로.

이런 성장 없는 인물, 변화 없는 인물, 전개가 없다시피 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성장’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닳고 닳도록 말하는 ‘발전’ ‘진보’ ‘변화’ ‘혁신’ ‘미래’ ‘나아감’ 이런 것들이 대체 뭔가 싶어진다. 꼭 사람의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발전해야 하고, 성장해야만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라도 야콥처럼 제자리걸음만 하더라도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뜨거움 정도만 간직하고 살 수 있다면 되지 않을까. 왜 세계는 끊임없이 발전, 진보, 성장을 외치는 것일까. 그래서 인생이, 세계가 과연 행복한가? 야콥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그 어떤 것도 자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는 불모의 상태가 어쩌면 가장 영원한 행복의 상태는 아닐는지.


이 작품은 여러 번 읽어 보고 싶고. 발저의 다른 작품도 읽어 보고 싶은데…. 현재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이 작품 외에 청소년용 도서 <프리츠 콕의 작문시간>, 어린이용 도서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부인 듯하다.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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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노트 - 가장 순수한 음악 거장이 만난 거장 1
앙드레 지드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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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순수한 음악 쇼팽- 쇼팽의 곡을 지드의 언어로 부드럽고도 우아하게 산책하듯 거닐면서 만난다. 지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쇼팽의 곡을 애정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거나 또는 재발견, 혹은 오해를 풀도록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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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방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지음, 정지윤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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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은 계속 큭큭큭큭. 키득키득 웃게 된다. 그러다가 끝내 어느 부분에서는 ‘푸하하하하’ 박장대소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 편의 개그 소설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냥 웃고 끝나는 게 아니다. 이 담담한 소설 속에는 웃고 나면 한없이 찡한, 현실이 담겨 있다.


러시아 소설은 읽고 나면 마음에 남는 게 많지만 섣불리 집어들게 되지는 않는다. 러시아 소설하면 떠오르는 무겁고, 심각하고, 어두운 이미지- 그런 것들 때문에... 그러나 도블라또프의 작품 <여행가방>은 그런 러시아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큭큭큭큭-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체호프의 유머 코드가 담긴 단편을 읽을 때의 느낌과도 좀 비슷하다. 실제로 도블라또프는 ‘20세기의 체호프’라고 불린단다. 적어도 <여행가방>에서는 도블라또프가 체호프보다 더 웃기다.


도블라또프는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출신 작가다. 1972년부터 신문 기자로 일하며 산문을 쓰던 그는 정부의 박해를 피해 1978년 소련을 떠났다. 그때 그는 소련을 떠나며 가방에 짐을 싸는데, <여행가방>은 그 가방에 담겨 미국까지 따라온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다. 양말, 구두, 양복, 벨트, 잠바, 모자, 셔츠 등이다. 이 물건들과 관련한 추억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고, 단편마다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나는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도블라또프의 작품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에 나는 벌써짐을 싸고 있었다. 다 싸 놓고 보니 가방 하나로도 충분했다. 나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내 나이가 서른여섯이 아닌가. 그 서른여섯 해 가운데 18년 동안 돈벌이를 하며 살았다. 수중에 돈이 생기면 물건을 사고는 했으니, 그렇게 사들인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달랑 여행 가방 하나다. 그것도 코딱지만한 가방으로. 아니, 내가 거지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지경이 돼 버렸을까?(9쪽)


머리말만 읽고 이렇게 한껏 기대를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단편인 ‘핀란드 산 양말’의 시작부분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큭큭큭 웃기 시작했다. 도블라또프, 이 사람- 살아있다면 왠지 만나서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심정까지 들었다. 누군가 남을 웃길 때, 웃기는 사람이 ‘이건 진짜 웃긴 이야기야’하며 폼을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시종 웃어대면 듣는 사람은 그다지 웃기지 않다. 그런데 도블라또프는 웃지 않는다. 웃긴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담담한 어조. 때로는 심각하게,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 무미건조한 문체다. 그래서 더 웃기다. 심각한 얼굴로 자신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 개그를 하는 개그맨이 더 큰 웃음을 주듯이.

 세상에는 정확한 학문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곧 정확하지 않는 학문들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 그 정확하지 않은 학문들 가운데 일등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어문학이다. 그래서 나는 어문학부 학생이 되었다. (핀란드 산 양말, 16쪽)

 나는 내가 겪었던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만약 헤밍웨이의 말을 믿는다면 가난은 작가에게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학교이다. 가난은 사람을 명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식의 교훈은 얼마든지 있다.
 흥미로운 점은, 헤밍웨이가 부자가 되자마자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페르낭 레제의 잠바, 139쪽)


앞서 언급했듯 도블라또프 작품의 매력은 그저 한번 웃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단편에는 공산주의 치하 러시아의 암담했던 현실, 그 현실 속에서 고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그 짧은 단편 속에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명민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나는 <여행가방> 이 한 권만으로도 도블라또프의 팬이 되었다. 그런데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인 듯하다. 앞으로 그의 작품을 더욱 많이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크게 박장대소했던 부분은 다음 장면이다. 도블라또프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해 쓴 구절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집에서 나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다들 나를 가만히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어릴 때 우리 집에 루이자 겐리호브나라고 하는 유모가 있었다. 그녀는 늘 체포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지냈기 때문에 매사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한번은 루이자 겐리호브나가 나에게 반바지를 입혀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내 다리 두 개를 바지 한 가랑이에 다 넣어 버렸다. 결국 나는 그 모양으로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했다.
 당시 네 살이었던 나는 이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옷을 잘못 입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입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옷을 다시 입는 일은 지금도 싫어한다.
 그와 비슷한 일들이 내 기억 속에는 많이 남아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무엇이든 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쓸데없이 귀찮은 일만 피할 수 있다면야….(포플린 셔츠,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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