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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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둔지는 조금 되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을 이제야 읽다니! 이럴 수가’! 하는 마음과 ‘이제야 읽다니 참 다행이다’ 이런 마음. 앞으로 카렐 차페크의 작품을 하나씩 읽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행복하달까.

이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열혈 독자층을 거느린 카렐 차페크. 그러나 나처럼 그가 낯설었던 이들에게 소개하자면, 차페크는 카프카,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란다. 그런데 내가 왜 생소했지? 싶었는데, 아하 ‘SF 및 환상소설의 거장’으로 꼽힌단다. 평상시 SF나 환상소설 분야에 크게 관심이 없던 내가 그의 이름이 낯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작가를 평생 모르고 살았다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차페크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이 두 권의 책, 즉 <주머니 이야기 (Pocket Tales)>로 미스터리를 철학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찬사까지 받고 있단다. 정말 그럴까? 괜한 치켜세움이 아닐까 이런 의심도 들었다.

<오른쪽>에 실린 첫 작품 <발자국>을 읽은 순간, 그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 한 단편만으로 카렐 차페크의 모든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른쪽 주머니>와 함께 <왼쪽 주머니>도 사두었는데, 다른 책도 더 궁금해서 검색해본 결과 열린책들에서 나온 <도룡뇽과의 전쟁> <곤충 극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읽던 책을 일단 접고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도룡뇽과의 전쟁>도 빌려왔다. 이놈의 책 욕심! 그밖에 다른 작품들도 몇 권 더 번역되어 있고 카렐 차페크 평전도 나와있더라. 작품을 모두 읽은 뒤에는 그의 평전도 읽어 볼 생각이다. 올해는 아마 카렐 차페크와 함께하는 한 해가 되려나?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발자국>은 어찌 보면 참 단순한 스토리다. 눈 내린 밤 ‘리브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하얀 눈을 밟으며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하던 그는 눈 위 몇 개의 발자국을 보며 이건 누구 발자국일까, 어떤 남자의 발자국인가, 어떤 여자의 발자국인가 홀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걷는다. 그런데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만다. 길 한 가운데서 이제까지 죽 이어지던 발자국이 돌연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 흔적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가 온 길을 다시 발자국을 밟고 뒷걸음질 쳐서 간 흔적도 없다. 리브카는 이 발자국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고민 고민하던 끝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바르토세크 반장을 부르기에 이른다.

길 한복판에서 사라진 발자국을 보며 리브카와 바르토세크는 한참 설전을 벌인다. 리브카는 완전한 미스터리라고 주장하고, 바르토세크 반장은 이런 일은 미스터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둘의 대화에서 차페크의 ‘미스터리’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시선이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반장님” 리브카가 힘없이 말했다.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주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이건 정말 미스터리한 일입니다.....”
 “그렇긴 합니다.” 반장이 신중하게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미스터리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모든 집, 모든 가정이 다 미스터리입니다. 여기 오는 도중에도 저기 있는 작은 집에서 어떤 여자가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미스터리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반장은 리브카에게 이런 말도 덧붙인다.

 “...... 정말로 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무지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분명히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법과 질서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정의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경찰도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리를 오가는 모든 사람은 미스터리입니다. 잡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건을 훔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잡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왜 신문들은 ‘시체 발견 미스터리’ 같은 제목들을 뽑아대는 걸까요? 시체에 무슨 미스터리가 있습니까? 우린 시체를 발견하면 이런저런 검사들을 한 뒤 사진을 찍고 해부를 합니다. (.....) 모든 범죄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적어도 동기 같은 것은 알 수 있죠. 하지만 애완 고양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건 미스터리입니다. 가정부의 꿈 혹은 아내가 창밖을 내다보면서 떠올리는 생각, 이것들도 미스터리합니다.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미스터리인 셈이죠. 범죄란 엄격하고 상세하게 정의가 내려진 현실의 한 단면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범죄사건이 미스터리라고 생각하지만, 바르토세크 반장은 범죄는 오히려 명료하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집, 모든 가정이 다 미스터리’라는 이야기, ‘애완 고양이의 생각’이 미스터리라고 하는 이야기에서 나는 이 작가를 앞으로 꽤 좋아하겠는구나 싶어졌다. 몇 장 더 넘겨서 또 다른 단편 <푸른 국화>를 읽고 난 뒤에는 카렐 차페크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심정까지 들었다.

<푸른 국화>는 매우 희귀한 꽃인 ‘푸른 국화’를 찾아 헤맨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어느 왕자의 집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왕자는 네덜란드에서만 1만 7천종에 이르는 화초를 수집해 올만큼 대단한 화초 수집가였다. 어느 날 남자가 길을 걷노라니, 그 마을에서 클라라로 불리는 정신이 조금 모자란 소녀가 달려와서 그를 껴안으며 꽃다발을 건넸다. 그 꽃다발 속에는 푸른 국화 한 송이가 함께 있었다. 처음 보는 그야말로 정말 푸른 국화였다. 이 희귀한 꽃을 주인인 왕자에게 남자는 가져갔고, 왕자는 수집욕에 불타올라 클라라를 불러오게 해서는 푸른 국화를 함께 찾아다닌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 뒤로 이 소녀는 때때로 푸른 국화를 꺾어왔고, 왕자와 정원사는 한층 더 혈안이 되어서 꽃을 찾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에게 현상금까지 붙여서는 푸른 국화를 찾아오게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헛수고로 그친다. 그럼에도 클라라는 어디선가 푸른 국화를 꺾어왔다. 사람을 붙여서 온종일 감시해도 헛일이었다. 소녀는 저녁 무렵이면 홀연 사라져서 푸른 국화를 갖고 오곤 했다. 급기야 왕자는 그녀를 감옥 안에 가두어버리고 만다. 단지 소녀가 푸른 국화를 모조리 꺾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에서 말이다.

“나는 사람이 곤궁에 빠지거나 좌절을 겪으면 심술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 살다 보면 그 정도쯤은 저절로 알게 되거든....” 왕자의 횡포를 보다 못한 정원사는 결국 왕자에게 쏘아붙이고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그 마을을 영영 떠난 것이다. 기차가 출발한 순간, 푸른 국화를 다시 볼 수 없음에 어쩐지 서글퍼져 엉엉 울던 그는 창밖을 보다가 철도변에 무언가 푸른 물체를 보게 된다. 다급해진 그는 기차를 급정거 시키고 그 푸른 물체를 찾아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리고 발견한다. 푸른 국화 밭을. 그곳은 철도변이라 통행금지 표지판이 있었다.

 

“자, 이제는 눈치 챘을 거야. 바로 보행 금지 표지판이 비밀의 열쇠였던 거야. 그것 때문에 아무도 철로를 건너 국화를 찾을 수가 없었던 거야.........  바로 그거야. 오직 바보 클라라만이 거기에 갈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데다가 글도 읽지 못하니까.”



그는 집으로 가져온 푸른 국화에 클라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껏 돌본다. 나는 이 이야기가 무척 아름다웠다. 정신이 모자란, 바보 소녀만이 ‘보행 금지’라는, 그러니까 ‘금기’의 영역을 깨버렸기에 그토록 찾아 헤맨 보물 같은 ‘푸른 국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짧고 단순한데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원사가 푸른 국화 밭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고 기뻐 웃었을 장면이나, 클라라가 ‘금기’를 깨고(아니 그녀에겐 어쩌면 금기란 없을지도 모른다) 푸른 국화 밭에서 마치 광년이(?)처럼 웃는 장면을 상상하니 무척 아름답다.

카렐 차페크의 나머지 단편들도 거의 이렇게 ‘미스터리’ 속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다가 어느 순간 깊은 감동을, 또 때로는 큰 웃음을 준다. 그 기본 정서는 인간에 대한 따스한 연민,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이 불쌍한 존재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 등이 담겨 있어서 훈훈한 마음이 들고는 한다.

<시인>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빵 터졌다. 뺑소니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목격자는 어느 시인이다. 시인은 뺑소니 사건에 사소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차량 번호판 따위는 볼 생각도 없었다. 세부적인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던 시인. 답답한 경찰들은 그렇다면 전체적인 분위기라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고, 시인은 한참 고민하더니 그때 그 사건을 목격한 뒤 집으로 돌아가 쓴 시가 있다며, 어떤 단서가 있을 거라면서 그 시를 경찰에게 읽어준다.

 

 어둠 속 빌딩들의 행진, 하나둘 멈춰 서네
 여명은 만돌린을 연주하고
 소녀야, 너는 왜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가
 120마력의 속도로 세상 끝으로 달려가는
 혹은 싱가포르를 향하여
 저 나는 듯이 달려가는 차를 세워라
 우리의 위대한 사랑이 먼지 속에 뒹굴고 있네
 꺾어진 한 떨기 꽃과 같은 소녀
 백조의 목과 여인의 가슴, 북과 심벌즈
 나는 왜 이리 구슬피 우는가.


아, 정말 시인들이란! 이 시를 읽는데 웃다가 눈물 나는 줄 알았다. 카렐 차페크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흥미진진하고 웃기는 데 끝나지 않는다. 짧은 이야기임에도 사람과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남다르다. 그리고 그 기본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수많은 죄를 짓고 저승에 온 범죄자에게 신(神)은 직접 재판을 하지 않고 똑같은 인간 재판관들에게 재판을 맡긴다. 범죄자는 왜 신이 직접 재판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재판을 하느냐고 따져 묻는다. 거기에 신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재판관이 모든 것을 안다면..... 그야말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안다면 말일세, 그는 재판을 할 수가 없네. 모든 사정을 이해하면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다네. 그러니 어떻게 재판을 할 수 있겠나? 자네를 재판하려면 오직 자네 범죄에 대해서만 알아야 하네.” (<최후의 심판>, 234쪽)



모든 것을 알면 어떤 범죄자에게도 연민이 들어 제대로 재판할 수 없다는 신의 말. 그 심정이 어쩌면 카렐 차페크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란 정말 어쩔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런 인간을 불쌍하고 가엾게 바라본 카렐 차페크. 그의 작품은 문학이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담고 있다고 이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섣불리 장담한다. 그를 이제야 알게 되어서 안타깝다. 그러나, 그를 지금, 알게 되어서 행복하다.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를 읽기 위해 글을 이만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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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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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그를 이제야 알다니! 안타깝다. 그러나 그를 이제라도 알게되어 기쁘다! 미스터리에 관한 놀라운 생각.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웃기고 울리고 훈훈한 감동. 그 기본은 ‘어쩔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다. 그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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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3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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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말의 <도깨비불>을 본 뒤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알랭의 심리가 한결 이해된다. 성적불능, 사랑불능, 소통불능인 알랭. 제도와 물질만능주의 부르주아의 삶을 조롱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물질에 기대산다. 그런 모순 속에 삶의 불능을 겪은 그가 최후에 내린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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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전집을 모두 읽고 나서 나홀로 인터뷰-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꾸며 보았다..... (하고나니 웃기다;)


궁금한 게 있다. 국문학을 전공했다며 김승옥 작품을 이제야 읽었나?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일인데, 김승옥 작품을 예전에 아예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 같은데, 김승옥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뤘다. 생각나는 건 사실 별로 없다. 수업시간에 소설 전편을 다룬 것도 아니고, 좀 긴 지문으로 만났으니 뭐 기억에 남겠는가. 가르치던 교사가 '무진'이 갖는 의미, '안개'가 의미하는 것 등등을 연신 설명하던 기억이 남는다. 아, 그때 지문에서 여자(인숙)와 남자(나)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한 아이가 짓궂은 질문을 던져 그 무렵 총각이었던 국어 교사가 얼굴이 벌개졌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와-하고 웃었고. 궁금해서 나중에 이 작품을 찾아 읽었는데, 딱히 좋았다거나 그런 기억은 없다.


그럼 전집을 읽기 전까지 김승옥 작품은'무진기행'이 전부였나?
그렇지는 않다. 대학에 가서 '서울의 달빛0장', '서울 1964년 겨울'처럼 꽤 많이 알려진 작품은 찾아 읽었다. 그런데 지금 읽으니 이런 내용이었나 참 새롭더라. 기억력이 형편없어도 이리 없나 싶기도 하고. 김승옥이라는 이름은 대학에서도 참 많이 듣긴 들었다. 문학 한답시고 폼 잡고 다니는 사람들이 과에 꽤 많았는데, 그들의 입에 심심찮게 오르고 내리는 이가 바로 김승옥이었다. 자기들끼리는 김승옥 작품을 이것저것 찾아 읽고 토론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던데,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혹은 한다는 사람들의 그 객기어림이나 치기, 폼 이런 것들이 무척 싫었기 때문에 괜히 그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김승옥이라는 이름을 더 멀리 했던 것 같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남들이 다 좋다고 우르르 몰리면 괜히 나는 한 발짝 물러나고 싶은 심리. 아무튼 그런 심리다. 책을 무슨 유행처럼 대하는 게 싫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다 읽은 소감은 어떤지 궁금하다.
놀랍고, 뒤늦게 지금이라도 김승옥의 전 작품을 대할 수 있었다는 게 천만 다행이랄까. 블로그 이웃 중 어느 한 분이 김승옥은 20대(심정적 20대 포함)에 읽어야 제격이라고 했는데, 전집을 읽을수록 그런 작품이 참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아직은 심정적으로 20대라고 느끼는 나이에 읽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무척 재미있다. 문학적으로 뛰어난 이의 작품이라 재미없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을 하는 이도 있겠지만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하다. 김승옥은 이런 작품을 20대에 썼으니 지금 절필했어도 후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이런 글쓰기 능력은 어디서 나는 걸까, 부럽고 그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글재주(?)(재주라고 하기도 뭐한…)에 절망하기도 했다.


어떤 작품이 가장 좋았는지 궁금하다.
<한밤중의 작은 풍경>에 실린 콩트들까지 합하면 작품이 꽤 많아서 가리기가 좀 힘들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들을 꼽자면 '생명연습', '역사',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차나 한잔', '서울의 달빛 0장', '서울 1964년 겨울', '환상수첩', '내가 훔친 여름' 등이 좋았다. '들놀이'를 읽으면서 어찌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꼽아보니 특별히 좋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꼽은 작품이 많아 민망하다. '무진기행'은 이번에도 그렇게까지 아, 좋구나 싶지는 않았다. 역시 이것도 사람들이 모두 이 작품을 다 좋다, 좋다 하니까 한 발짝 물러나고 싶은 심리일까? '환상수첩'은 햇살 좋은 어느 아침에 읽었는데, 읽고 나서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예쁜 햇살에 비해 이렇게나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가, 살아남기가 퍽이나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 거 같다.


그 작품들이 좋았던 이유는 따로 있는지?
보통 내가 그의 작품 중 좋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돌아보면 제도화된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청춘의 모습을 다룬 작품이 많다. 주인공들의 자의식도 좀 남다르고, 주인공들은 자기만의 꿈이나 낭만 이런 것을 찾아서 살고 싶은데 사회가 용인을 해주지 않는다. 그런 그들은 거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일탈하거나 도망치거나 혹은 그런 사회에 대해 나름대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앉아 웅얼웅얼 혼자 불만을 토로하거나 등등 이런 세심한 감수성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오히려 '재룡이'나 미완작품이지만 '먼지의 방'처럼 작가의 어떤 정치적 의식을 나타낸 작품은 좀 싱겁게 느껴졌다. 상투적인 느낌도 조금 들고, 전쟁의 폐해를 다룬 작품인 '재룡이'는 약간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느낌도 들었다.


반면 그냥 그랬다, 뭐 그런 작품도 있는지?
김승옥 전집을 <한밤중의 작은 풍경>부터 읽기 시작해서 <무진기행>, <환상수첩>, <내가 훔친 여름>, <강변부인> 이런 순으로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김승옥은 역시 중, 장편보다는 단편, 단편도 어떤 단편보다는 콩트가 더 맛깔스럽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제 5권인 <강변부인>에는 '보통여자', '강변부인' 두 작품이 실려 있는데, 이 두 작품 모두 '통속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극적이다. 이 작품들이 당시로서는 저급한 주간지에 속했던 일요신문, 주간여성 같은 매체에 연재되었으니 작품의 성격이 어떨지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극적인 재미는 있으나 두 작품 모두 결말이 좀 허무하다.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 몰라 성급하게 결론을 맺은 느낌도 들고, 다른 작품들보다 질적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에서도 인물 묘사나 심리 묘사는 탁월하다.


인물 묘사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김승옥 소설이 주는 큰 재미는 인물 묘사나 심리 묘사가 남다르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묘사를 할까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 표현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그런 표현마다 만약 밑줄을 그은다면 책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다. 그렇다고 묘사를 사실 그대로 눈이 어떻고, 입이 어떻고 이렇게 상투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두꺼비가 안경을 쓴 꼴을 상상하면 틀림없이 그 녀석의 얼굴이었다(…) 여드름도 가실나이가 됐는데, 그의 턱과 이마와 볼에는, 그러니까 온 얼굴에는 조개껍질로 박박 긁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굵은 여드름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가 펑퍼짐한 코에 걸고 있는 안경이란 것도 가만히 살펴보니 도수 없는, 다시 말하면 의젓하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인 것 같았다('내가 훔친 여름' 중).'


 '산악반 놈들의 대부분은 멋을 부리고 싶어서 회원이 된 놈들이다. 파카를 입고 헌 신문지를 쑤셔 넣어서라도 될수록 무겁게 해 보인 륙색을 짊어지고 흰색의 스타킹을 신고 그 위에 미 해군용 작업복 쓰봉을 입고 트랜지스터와 카메라를 어깨에 드리우고 선글라스를 쓰고…. 동대문시장의 헌옷점에서 사더라도 푸르뎅뎅한 미 해군용 작업복 쓰봉 한 벌에 육, 칠백 원은 주어야 한다. 놈들, 저렇게 비싼 걸로 차려입고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깊은 산속에서는 좀 부끄러울걸. 산에서 돌아올 때, 시외버스 속에서나 기차 속에서 시골 사람들의 감탄하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 녀석들은 보람을 느끼겠지('싸게 사들이기' 중).'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지만 이런 식의 묘사가 대부분이다.


시간이 없어서 이야기 끝을 맺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김승옥이 하나님을 만나 절필하게 된 이야기를 처음에 듣고는 의아했는데,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다. 문학이, 글 쓰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구원받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면 김승옥은 하나님을 만나 구원받았다는데, 글 쓸 여력이 남아 있겠는가. 게다가 글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금은 고통스럽고 우울할 때 더 잘 써지는 면이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 행복하고 편안해진 사람이 계속해서 '무진기행'같은 약간은 허무한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절필이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이 들어 예전의 작품에 반하는 작품을 써놓으며 독자를 실망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물론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만) 다행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어쨌든 문학적으로도 그렇고, 일단은 재미가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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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1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17-01-11 13:24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
 
파도 소리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진명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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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금 다른 소리이지만 언제부터인지 여러 출판사에서 갖가지 버전으로 세계문학을 소개하고 있다. 민음사,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펭귄클래식, 문예출판사, 열린책들, 을유문화사 등등 그중 책세상문고의 세계 문학은 가격도 저렴하고 가볍게 들고 다니기에 좋다. 게다가 다른 출판사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작품이 곧잘 눈에 띄는데 그런 작품 중 괜찮은 작품도 많다. 미시마 유키오의 <파도소리>도 그랬다.

미시마 유키오하면 떠오른 단어라고는 ‘할복자살’ ‘극우주의자’ ‘유미주의’ 그리고 ‘안티 다자이 오사무’ 이런 것들이다. <파도소리>를 읽다 보니 이 사람은 뭐랄까, 순수한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듯하다. 그 순수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낭만적인 순수’는 아닌 듯하다. 육체든 정신이든 어떤 다른 것에 감염되지 않은 상태, 그런 상태의 순수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극우’로 치닫고 결국 ‘할복자살’이라는 상당히 극단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든다.

<파도소리>는 미시마 유키오가 추구하는 ‘순수’한 세계가 젊은 남녀의 육체를 통해 표현된다. 이 작품은 특별하게 ‘야하다’고 할 만한 노골적인 성애 장면이 없는데도 읽는 내내 은근히 에로틱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어떻게 보면 황순원의 <소나기>를 에로틱하게 각색한다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 남녀 주인공이 비를 맞고 낡은 집에서 불을 피우며 서로 옷을 말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분위기가 얼마나 에로틱한지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간다. 단지 옷만 말리는데도!

황순원의 <소나기>에 비유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섬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주인공 신지와 그가 사랑에 빠지는 소녀 ‘하쓰메’와의 러브스토리가 기본 골격이다. 물론 모든 러브스토리에 등장하는 방해세력이 이들에게도 존재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청년 신지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순수함’ ‘아름다움’을 마음껏 표현한다. 작품 내내 신지의 육체는 상당히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는데(‘하쓰메’ 역시 마찬가지), 그 묘사는 거의 그리스 조각상을 연상케 한다. 건전한 정신에 건전한 마인드, 건전한 육체랄까? 어떻게 보면 ‘신지’는 미시마 유키오가 동경하는 이상적인 남성상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신지와 하쓰메의 사랑은 옷을 벗고 함께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서 볼 수 있듯, 무척 플라토닉하다. 신지는 건강한 육체 못지않게 정신도 대단히 순수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런 면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극단성이랄까, 오염되지 않은 것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 <파도소리>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욕망’이란 더럽고 추잡한 것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그런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인물은 매우 추하게 그려진다. 

도둑도 없고, 범죄도 없는 파라다이스 같은 섬- 그 섬에서 순수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젊은 남녀-그런 그들을 남몰래 훔쳐보고 있는 또 다른 남녀의 끈적끈적한 시선과 불순한 욕망-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파도소리>는 낭만적이면서도 꽤 에로틱한 분위기를 뿜는 묘한 느낌의 작품이었다. 그래서 여운이 오래 남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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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한 소설로 알려진 문학 작품은 에로틱한 분위기에 중점을 맞춘 거라서 포르노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실망할 겁니다. ^^;;

잠자냥 2017-01-10 15:19   좋아요 0 | URL
ㅎㅎ 독자들의 실망을 줄이기 위해 에로틱이란 단어를 빼야하겠군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