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 노통브, 그녀의 책을 참 오랜만에 읽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 뭐였는지 기억조차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책을 덮으며 이제 앞으로 아멜리 노통브 작품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막연하게 생각했다. 맨 처음 읽었던
작품인 <적의 화장법>을 읽었을 때의 신선함과 놀라움, 전율 같은 것은 그녀의 작품 몇 권을 읽다보니 시들해졌다.
뻔한 패턴이 있고, 예측 가능한 도식적인 결말, 비슷비슷한 주제의 반복이었다. 이제 그만 읽어도 될 것 같았다.
<샴페인
친구>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아멜리 노통브 신간이 나온 줄도 당연히 몰랐다. 그런데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들 중 유독 눈에 잘 들어오는, 신간임을 당당히 뽐내는 깨끗한 표지를 보고 집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꼬질꼬질한
사람들 가운데 혼자만 깨끗하게 세수한 듯한 ‘신간 서적’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힘들지 않은가! 게다가 아멜리 노통브의 책은 길어야
200페이지 남짓. 한두 시간만 집중하면 금세 읽는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오랜만에 정말 그녀의 책을
빌려왔다.
그리고 몇 페이지 읽는 순간 나는 마트에 가서 화이트 와인을 사올 수밖에 없었다. 한 잔 시원하게 따라서
홀짝홀짝 마시면서 이 책을 읽는데, 그토록 맛있을 수가. 펼쳐진 책장 위에 나열된 글자들을 읽노라니 참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고, 계집애 여전하네, 이런 생각이 든다. 술맛 좋고, 너의 입담은 여전히 톡톡 쏘는구나.
도취는
즉흥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재능과 몰두가 요구되는 예술에 속한다. 술을 무턱대고 마셨다가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다.
최초의 만취가 대개의 경우 기적적인 것은 순전히 그 유명한 초심자의 행운 덕분이다. 정의상, 그 행운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샴페인 친구>, 5쪽)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의 입담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윽고 술에 대해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한다. 그것도 샴페인. 나는 좋은 샴페인을 구해서 마실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화이트 와인으로 대신한다. 술과 책과 문학이라니. 대단한 조합이다. <샴페인 친구>에서 노통브는 술맛,
그러니까 샴페인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쫄쫄 굶기까지 한다. 역시, 뭘 좀 안다. 샴페인은 아니지만 정말 시원한 맥주 한잔을
따라서 첫 모금을 마실 때, 배가 고플수록 그 맛이 기막히다는 사실은 맥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샴페인도 그렇겠지?
그럴 거야.
훌륭한 와인을 맛볼 때 <안주 챙겨
먹기>를 강요하는 사람들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음식에 대한 모욕이고, 음료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안 그러면 취해 버리거든요’ 설상가상 그들은 이렇게 웅얼거린다. 난 그들에게 예쁜 아가씨들에게 아예 눈길도 주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반해 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술을 마시면서 취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성스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숭고한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만큼이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다. (6쪽)
이 구절을 읽다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낄낄 웃기 시작한다. 맞아 맞아, 맞는 소리지. 나는 와인 한 잔과 함께 <샴페인 친구>를 읽으면서
나와는 조금 다른 술을 좋아하고 문학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친구 한 사람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그 친구와 서로
각자 좋아하는 술을 따라 놓고는 문학과 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 아멜리 노통브는 샴페인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왜 하필, 샴페인이냐고? 샴페인에 취하는 건
다른 술에 취하는 것과 전혀 다르니까. 술마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힘은 서로 다른데, 샴페인은 천박한 메타포를 불러오지 않는 몇 안
되는 술 중 하나다. 이 술은 신사라는 멋진 말에 의미가 있었던 시대에 아마 그 신사의 조건이었을 것 같은 상태로 영혼을
고양시킨다. 사람을 우아하고, 가벼운 동시에 깊게 그리고 사심이 없게 만들어 준다. 샴페인은 사랑을 부채질하고, 사랑의 상실에
고상함을 부여한다. (7쪽)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도 그 샴페인 한 모금,
아니 한 병 마셔보고 싶네. 나 좀 한 잔 따라주지 않겠니? 싶은데, 아멜리 그녀는 내가 샴페인에 너무나도 무지하다면서 다른
친구를 찾아 나선다. 게다가 이야기 좀 해보니 문학 취향이나 깊이도 자기와는 아주 다르단다. 쳇, 그래 가라! 그렇게 떠난
아멜리, 그녀는 다른 친구를 만난다. 자신의 팬 사인회에서 만난 친구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로니유’ 술 취향도, 기괴한 취향도
아멜리 노통브와 아주 죽이 잘 맞는다. 문학적 깊이나 취향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둘의 대화는 탁구공 주고받듯이 통통 잘도
튄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다. 그런데다가 ‘페트로니유’는 어떤 면에서는 아멜리보다 한술 더 뜬 괴짜이다. 아멜리 노통브는
페트로니유에게 흠뻑 빠진다.
나는 이제 혼자 술을 홀짝 홀짝 마시면서 그녀들의 샴페인 찬양과, 술에 취해 벌이는
온갖 만행과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녀들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엿듣는다. 페트로니유는 아멜리 노통브처럼 글을
쓴다.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노통브는 그녀의 작품을 읽고 한마디로 꽂혀버린다. 그런데 어째, 프랑스 출판계는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은 것 같다.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출신인 페트로니유의 작품이 프랑스 문단에 받아들여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그녀를 위해 아멜리 노통브는 여러모로 애를 쓴다.
술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며 더욱이 글을 쓰고
싶거나, 이미 쓰는 사람이라면 <샴페인 친구>는 꽤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단, 이 작품을 손에 든 순간, 당신은
나처럼 술을 따르게 될 것이다. 샴페인이라면 더 바랄 게 없고 그렇지 못하다면 아쉬운 대로 와인인든, 맥주든, 소주든 어떤
술이라도 좋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정말로 술친구를 앞에 두고 있는 착각에 빠질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글쓰기에 대한 위로이자 찬가이다. 허위와 가식 가득한 이 세계에서 글을 쓰는 행위, 읽히지도 않고, 어쩌면 출간될 희망조차
없음에도 글을 쓰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위로이자 격려이다.
아멜리 노통브가 이 작품 안에서 스스로를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라고 하듯이 프랑스에서도 글을 쓰고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러시안룰렛’과도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겠다며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좋아서 그러는 것이다. 노통브가 발견한
술친구 페트로니유 또한 그렇다. 취할 줄 알면서도 너무 많이 마시면 숙취로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듯이, 안될 줄
알면서도, 그 실패로 깊이 좌절할 줄 알면서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샴페인 친구>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한
작품이다. 술이 깨고 나면 머리도 아프고 속도 울렁거리고 지난밤의 일들이 후회될지라도, 또다시 술이 주는 그 도취의 순간을
찾듯이, 문학을 읽을 때의 즐거움, 바로 그런 문학을 ‘짓는’ 일을 하는 즐거움에 빠진 모든 이들을 위한...... <샴페인
친구>는 그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마셔라, 읽어라. 취해라. 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