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단편을 읽는 일은 늘 즐겁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보통 나는 그런 작가의 책을 선뜻 사서 읽지는 않는다. 정말로 나와 잘 맞을지 미심쩍고 아직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에 도서관을 이용해서 첫 만남을 시도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단 한 번 읽어 본 적이 없는데도 덜컥 책을 사는 작가도 있다. 그레이스 페일리《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이 그런 책 중 하나였다.
다른 이들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이 책 표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수록’이라는 코멘트가 적혀 있다. 내게는 그 코멘트가 이 책을 선택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도 않았고, 그가 쓴 서문조차 책을 다 읽은 뒤에야 대충 훑어보았다. 오히려 출판사 책 소개 글 가운데 ‘단 세 권의 단편집으로 미국문학의 전설이 된 작가’라는 문구에 눈이 갔고, 그래서 미리보기로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첫 번째 작품의 몇 줄을 읽다가,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내가 반한 구절, 이 책을 사게 만든 그 문장은 바로 다음과 같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소망」, 15쪽)
전남편, 27년을 함께 살았던 그를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꽤 신선했다. 이런 표현을 쓰는 작가라면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흥미가 돋았다. 이 책을 구매할 무렵, 때마침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읽던 참이었다. 단편 모음집의 장점은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단편모음집끼리)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19호실로 가다》와《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은 주인공이 거의 여성 화자이며 그 목소리로 그들의 삶을 다룬다. 그런데 도리스 레싱의 작품을 읽다 말고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을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요즘- 그러니까 적어도 2000년대 이후로 쓰인 작품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대부분의 작품들이 1960년대에 쓰였단다. 그런데도 시대 간극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엄청 쓰다. 독하다. 이토록 독설 가득한 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단편 모음집을 읽은 적이 언제였더라? 있기는 있던가? 싶을 정도로 거의 모든 작품이 쌉싸래하다.《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에 실린 작품들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겨자를 잔뜩 친 음식을 먹고 난 뒤 혀끝에서 느껴지는 알싸함이라고나 할까. 또는 눈물이 날 만큼 아주 매운 맛.
크리스마스 2주 전 엘런이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페이스, 나 죽으려나 봐.” 그 주에 나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다」, 88쪽)
첫 작품「소원」만큼이나 강렬한 도입부를 보여주는「살아 있다」는 위와 같이 시작한다.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두고 친구를 비롯해 자신 또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보통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거나, 주인공 주변에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을 돌아보면서 회한에 쌓인 정서를 내뿜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미화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삶의 지리멸렬함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을 비롯하여 그 주변 인물들이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이 실은 그다지 대단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고 낱낱이 까발린다.
“인생은 그렇게 멋진 게 아니야. 앨런.” 내가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너절한 하루하루와 너절한 남자들뿐이야. 돈은 없고, 늘 깨지고, 바퀴벌레만 득시글거리고, 일요일이라고 해봐야 아이들을 데리고 센트럴파크에 가서 저 더러운 호수에서 배를 타는 게 고작이야. 뭐가 그렇게 멋있어, 앨런? 대단하게 잃을 건 또 뭐고. 겨우 2년 남짓 더 사는 거야. 아이들을 보겠지. 온갖 더러운 것도 볼 테고, 뜨겁게 밀려드는 불꽃 파도 속에서 세상의 모든 치즈 구멍이 터져버리는 것도 볼 거야......”
“난 그 모든 걸 보고 싶어.” 앨런이 말했다. (「살아 있다」, 90쪽)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이 계속 쓰디쓰기만 하다면, 삶의 남루함과 인생의 너절함만 이야기한다면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생이 힘든 걸 몰라서 내가 이런 책을 또 마주하고 있나 싶을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은 바로 저 구절, ‘난 그 모든 걸 보고 싶다’는 앨런의 말 속에 있다. 아무리 삶이 비루하고 넌더리나는 것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살아서 생생하게 보고 싶다는 앨런의 소망은, 곧 그레이스 페일리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인생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과 마주하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용기, 바로 그 안에 삶의 위대한 역설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살아 있다」에서 결국 앨런은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장례식장에서 앨런의 아들을 보고 동정심이 생긴 ‘나’는 앨런의 아들에게 “내가 널 데려가서 키워줄까?” 하고 묻는다. 하지만 물음과 동시에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만일 아이가 좋다고 하면 돈이며 방이며 게다가 잠자기 전 10분 동안 보살펴주는 문제며 그 모든 걸 어떻게 해결할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앨런의 아들은 말씀만으로 고맙다면서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녀는 안도한다. 이 얼마나 현실적인가.
이렇게 그레이스 페일리의 단편 속 등장인물들은 특별한 지위나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남다른 재주를 지녔거나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다. 대단하게 선하거나 모범적이지도 않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며 그 욕망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부분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빠듯하고 벅차서 가장 사랑해야 마땅할 대상인 아이에게도 손찌검을 하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박하게 일자리와 집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보통 사람들의 삶이 다 그러하지 않은가? 물론 아이에게 손찌검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부모가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내 저급한 직업과 검댕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구질구질한 집 때문에 미쳐 돌아버릴 만큼 진이 다 빠지지 않은 날이면 내게 이런 일자리와 집을 준 신을 찬양한다. (「나무에서 쉬는 페이스」, 115쪽)
적당하게 이기적이고, 때로는 선한 생각을 할 줄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보통은 자기 잇속부터 챙기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이 사회 규범에 크게 어긋난다거나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못 봐줄 정도는 아닌 평범한, 그래서 비루해 보이는 사람들의 인생. 그런 삶이《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에서 펼쳐진다. 아름답기보다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씁쓸하고 매운 삶.
그런데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찾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살아갈 힘을, 위안을 얻는다. 이 책에 실린 17개 단편들이 바로 그렇다. 이봐, 당신,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이렇게 지독하고 씁쓸해. 다들 당신 인생과 별반 다를 바 없어. 인생은 결코 달콤하지 않아. 그렇지만 어쩌겠어? 이 쓰디쓴 인생 한 번 견뎌봐야지. 그래도 살아야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생의 쓰디쓴 면까지도 성숙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문장, 그러니까 이 책의 정수는 그레이스 페일리의 분신인 ‘페이스’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쓴 시를 읽어주는 부분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
어린 시절이 지나가고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인생의 황금기 또한 지나간다.
노년이 지나간다.
내 딸아, 너는 왜
노년은 다를 거라고 여기느냐? (「페이스의 오후 한나절」 ,75~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