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잠비크 꼬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이는 아직 글을 몰라서 자신의 조그마한 손을 그려 보냈다. 그 자그마한 손그림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흐뭇하면서도 묘한 감동에 차올랐다. 작년에 받아본 사진에서는 아기 티가 나는 정말 어린 꼬마였는데 어제 새로 받은 사진에서는 조금 자란, 소녀 티가 나기 시작한 어린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새로 받은 사진은 냉장고에 붙여놨다. 모잠비크에 사는 내 딸. '만주아마오.' 잘 자라거라!

이영학 사건('어금니 아빠'라고 부르지만 나는 왠지 이 말을 쓰기 싫다)- 이 사건이 이 사회에 던져준(또는 줄) 폐해는 심각할 것 같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안그래도 척박한 이 땅의 기부문화를 단번에 꽁꽁 얼어붙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가 사람들의 선의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유용한 정황은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믿고 기부할 곳이 없다며 '기부' 자체에 회의를 품고 그런 모든 단체를 의심하는 형국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이영학 사건 이전에도 국내 기부 단체에서 모금한 돈을 유용했던 전례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내가 기부한 돈이 다른 곳에 쓰일까 봐 기부 행위 자체를 아예 하지 말아야 할까? 좀더 꼼꼼히 알아보고 현명하게 기부할 방법은 없을까?

나 또한 오래 전에 이런 고민을 하다가 국내가 아닌 해외에 본부를 둔, 비종교적인 어떤 단체를 선택했다. 게다가 직접 한 아이에게 후원을 하는 형식을 선택해 좀더 책임감을 갖고 꾸준히, 정기적으로 기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제3세계에 사는 여자 어린이를 중심으로 1:1 후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소녀에서 그 다음 또 다른 한 소녀. 이렇게 조금씩 넓혀나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내가 백수로 꽤 오랜 기간 지내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기 시작했을 때 정기적 후원이 조금 버거워졌다. 몇 달을 고민하다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서 후원을 잠시 중단해도 되겠느냐며 문의를 했다. 경제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다시, 꼭 다시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때 기분은 좀 처참했다. 그때 정기적으로 후원하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영 착잡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백수를 벗어나고 사정이 나아지면서 후원을 다시 시작하며 만난 인연이 바로 어제 편지를 받은 모잠비크 소녀이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이 한 권의 책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져서 설명이 필요없어진 책. 아주 오래 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울었다. 감동적이라거나 슬퍼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한없는 무력감이 느껴져서 울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다. 책을 덮고나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무력감만이 느껴졌다. 어떤 책에서 사회 구성원이 심하게 무력감을 느끼는 사회는 이미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사회라고 했던 구절이 생각났다. 정말 어쩌면 이 지구는 우주상에서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지 이미 오래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배고픔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게 대부분 저 멀리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어린이들이라는 것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가끔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을지도 모른다. "식품이 남아 돌아서, 썩어 버린다는데, 그걸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보내주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도 왜 저렇게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이런 생각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지금 세계의 절반 인구가 굶어죽는 현실, 그것도 어린이나 여성과 같이 약한 존재들이 더욱 그런 이 현실에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대국이나 다국적 기업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굶어죽는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그들에게 굶어 죽는 아이들은 유엔에서나 신경 쓸 문제라고 치부된다.) 종족, 종교 갈등 등 권력을 잡기 위한 수많은 내전, 전쟁, 사막화를 불러일으키는 환경파괴 등 약한 사람들이 굶어죽게 만드는 원인은 결국 '강자'들이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데만 급급해서 그런 현실은 계속 외면한다. 더욱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조금 똑똑한 지도자가 나와 그들 나라의 자주권, 독립권을 외치며 개혁을 실시하려고 하면 미국이나 다국적 기업 등이 경제적 압박을 가하거나 암살 등을 통해 그런 씨앗 자체를 뿌리채 뽑아버린다. 계속해서 그러니 세계는 점점 몇몇 강대국의 손에 놀아나는, 그들의 배만 채우는 그런 구조가 고착화 된다. '신 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이 책을 읽을 무렵, 이미 한 아이를 후원하던 참이었다. Niger의 소녀였다. 굶어 죽는 아이들을 도울 길을 생각하다 그 방법을 실천하게 되면서 알게 된 첫 번째 아이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은 지역과 아이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역은 상관없이 '여자 아이'를 원한다고 체크했던 기억이 난다. 이 세상은 여자 아이들이 살아남기에 더(특히나 그런 지역에서는) 힘든 곳이니까. 그리하여 내가 처음으로 만난 아이가 그 아이였다. 그애의 편지와 사진이 배달되어 왔고 그 편지를 통해 그애가 사는 나라가 Niger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있는지 몰랐다. 나이지리아를 잘못 표기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런 나라가 있더라.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나라는 세계 최하위 빈국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세계 2위인 그런 나라였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CD 한 장, 책 한 권 또는 장난감 하나 한 달에 한 개 정도 덜 사는 돈이면 아프리카의 어떤 한 아이가 한 달 동안 먹고 배우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별 생각없이 돈을 보냈는데, 나에겐 그냥 책 한 권 안 사면 그만인 그 돈이 그 아이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또 마음 한구석이 싸해져 왔다. 어쩌면 이렇게도 세상은 불공평할까? 이런 생각들.

내가 보낸 돈으로 학교를 갈 수도 있구나, 관념적으로 생각했지만 그 아이들에게 배움은 어쩌면 정말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고픔 그 자체, 생존 그 자체와 싸우기. 그 하나만으로도 벅찬 삶이구나 싶고. 학교에서 배운다 한들 정말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정말 벅찬 그런 곳에서 '배운'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그런 회의감도 들고. 어떤 한 아이를 몇 년 동안 후원해서 학교를 보내기보다는 더 많은 아이들의 '배고픔' 자체를 해결해주는 게 더 좋은 일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책은 참 쉽다. 지은이가 자기 아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책을 썼기 때문에 '문제' 자체가 골치 아픈 문제이긴 하지만 읽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그 '문제'들을 직면할 수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계속 굶주려야만 하는지, 그리고 정말 희망은 없는 것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일찍이 정희진 선생님은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일'이라 했고, 이 책을 읽으면 갑갑한 현실에 나처럼 잠시 무기력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더욱이 이영학 사건으로 기부자체에 회의감을 갖는 '기부 포비아' 현상까지 일고 있는 요즈음, 이런 책들을 읽음으로써 '기부 포비아'라는 말이 어쩌면 이 세계의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는 쉬운 변명은 아닐까,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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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학 사건 터지기 전에 결손아동을 위한 기부금으로 호의호식한 국내 단체가 적발된 적이 있어요. 분명히 언젠가 이런 유사한 사건이 또 일어날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기부단체들의 기부금 관리 방식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잠자냥 2017-10-17 13:37   좋아요 0 | URL
그런 일도 있었군요... 정치인들이 과연 기부금 관리 방식 개선에 나설지 의문이지만 ㅎㅎ 제도적으로 투명한 관리를 제어하는 기능은 꼭 마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