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바로 이디스 워튼의 <겨울>이 그렇다. 나는
이 작품을 무척 좋아해서 책을 추천해 달라는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지만….선뜻 그러지는 못하고 만다. <겨울>은 무척 우울하기 때문이다. <이선 프롬>이라는 원제보다 <겨울>이라는 제목이 더 작품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는 평생 ‘겨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겨울과 같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혹독한
추위와 함께 모든 것이 얼어붙어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겨울. 그런 겨울이 지나면 꽃이 만개하는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봄도 없고 끝없이 겨울만 지속된다면? 주인공 이선 프롬이 바로 그런 남자다. 그의 인생에서 봄이 존재했던
적이 있는가? 아, 그래 그에게도 봄이 잠시 찾아왔다고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봄은 끝내 그와 함께 겨울에 머물고 만다.
<겨울>은 무척이나
차갑고 슬프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설원 위를 혼자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액자 소설 구조를 띄고 있어서 슬픔이 조금 미약해지는 느낌인데 만약 액자 소설 구조를 탈피했다면 이 작품의
우울한 정서, 슬픔은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듯하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겨울 공기는 찬 만큼이나 투명하고 가슴 시리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차갑지만 오염되지 않은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이선의
사랑이 딱 그랬다. 비록 번역서로 읽었지만 이디스 워튼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섬세한 심리 묘사, 눈에 잡힐 듯한 아름다운 배경 묘사, 녹록치 않은 주제의식까지…. 이 작품만으로도 이디스 워튼의
열렬한 팬이 될 가치는 충분하다.
<겨울>을 읽고
내친김에 이디스 워튼의 <여름>과 <순수의 시대>도 읽었다.
<겨울>만큼 암담하거나 우울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워튼의 나머지 두 작품도
읽고 나면 끝맛이 개운하지는 않다. 한숨이 푸훅 절로 나온다. 책장을
덮을 때 즈음 ‘사는 게 왜 이렇게 괴롭니’ 이런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기도 하는데 대체 왜! 뒤끝이 개운하지 않을까, 왜 이렇게 답답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 이유를 알았다.
단 한 번도 워튼의 작품 주인공들은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한다. 이루고 싶은 것도
이루지 못한다. 자연이나 살고 있는 환경, 배경, 운명에 순응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삶이 흘러간다. 그래서 답답하고 암담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실적이다. 살면서 아무리 열망한다 한들 갖게 되는 것, 이루게 되는 것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나는 요즘 인생이란 어쩌면 체념이나 포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워튼의 주인공들이 딱 그렇다.
워튼에게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인 <순수의 시대>는 읽으면서 종종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왜 이러지? 곰곰 생각해보니, 뉴욕 상류층의 허영과 속물스러움이 정말이지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으아~ 이것들아! 이제 그만 좀 해!’ 소리를 지르고 싶어질 정도로 <순수의 시대> 속 뉴욕 상류층 모습은 징글징글하다. 그 옛날의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사회를 이렇게 짜증날 정도로 치밀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글 솜씨가 그저 놀라울
뿐.
<여름>은 <겨울>의 주인공이 남자였던 것과 달리 십대 소녀가 주인공이다. 이 소녀의 사랑은 그래서 <겨울> 속 ‘이선 프롬’의
사랑과는 달리 풋풋하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촌구석에서 하루하루 ‘모든
게 지긋지긋해!’를 연발하는 그녀 앞에 꽃미남 도시 청년이 나타난다.
그 후의 이야기들은 보통 예상할 수 있는 순으로 흘러간다. 어찌 보면 상투적인 이야기인데
참 흡인력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당시 여성이 성적으로 눈을 떠가는 과정을 너무 노골적으로 그렸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는데, 난 읽는 내내 ‘아니, 대체 어디가?’했다. 눈
씻고 찾아봐도 노골적인 장면은 볼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채리티와 하니가 만나면 키스만 하는 줄 알았는데('아니 얘들 왜 다음 코스로 진도를 안 나가는 거야.'했음;) 어느 날 채리티가 덜컥 임신을 해서 깜짝 놀랐다….
워튼은 <순수의 시대>로
상을 받았지만 나는 <겨울>이 가장 좋았다. 그다음은 <여름> 그리고 <순수의 시대> 순. 이디스
워튼 그녀는 삼각관계 속에서 좌절하고 상처받는 인물의 심리 묘사를 하는 데 탁월한 듯하다. 그리고 꿈이
부서지는 과정, 그 부서진 꿈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인생은 사람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정서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가 창조한 인물의 삶을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것도 많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 진짜 소중한 건 꼭 잡아야 해!’라는….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을 놓쳐버리고 긴 세월을 바보처럼 보낸 후 멍하니 앉아 있는 뉴랜드 아처(‘순수의 시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건 다 놓친다 하더라도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큼은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디스 워튼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현재 <겨울>, <여름>(문학동네) 외에 영화로 더 유명한 <순수의 시대>가 가장 많이 번역되어 있다, 그 밖에 <기쁨의 집>(펭귄클래식코리아), <이선 프롬>(문예출판사), <암초>(문학과 지성사), <거울>(생각의 나무)
등도 출판되어 있다. <기쁨의 집>과 <암초>도 꼭 챙겨 읽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