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고전적인 질문을 던져보겠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외모가 먼저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영혼이 먼저일까? 아마도 다들 외모는 한 때이니 영혼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대답(은)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또 다른 질문, 당신은 아주 뛰어난 문장실력을 갖고 있다. 그런 당신에게 누군가가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해온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연애편지를 쓸 대상은 평소 당신이 짝사랑해 오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부탁을 들어 줄 수 있을까?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에는 바로 그런 사람이 등장한다. 17세기의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바로 그 주인공. 시라노는 검술은 물론 예술에도 능통하고, 문학적인 재능도 뛰어나다. 게다가 ‘참나무와 떡갈나무는 못 되더라도. 빌붙어 사는 덩굴이 되진 않을 걸세. 아주 높이 오르진 못해도, 혼자 힘으로 올라갈 걸세!라고 평소 말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출세나 권력보다는 정의롭게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그에게 한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으니, 바로 엄청나게 큰 코다. 큰 코 때문에 지독한 추남으로 불릴 정도(프랑스에서는 동명 영화에서 ‘제라르 드 파르디유’가 시라노 역할을 했다던데 무척 어울렸을 듯). 그런 그는 사촌지간인 록산을 가슴시리도록 짝사랑하고 있지만 자신의 추한 외모 때문에 고백은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앓고 있을 뿐이다. 시라노를 그저 좋은 사촌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록산은 어느 날 그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알고 보니 그 상대는 시라노와 같은 근위대에 있는 젊고 잘생긴 크리스티앙.

젊고 잘생긴 크리스티앙 역시 록산을 보고 한눈에 반했던 처지라 이 둘의 사이는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크리스티앙은 잘생긴 외모에 비해 입만 열면 여자들이 도망가 버리는 단점을 갖고 있다. 크리스티앙은 말을 너무 못해 그에게 잘생긴 외모처럼 낭만적인 사랑의 언어를 기대하던 여자들은 금세 다 떠나고 만다. 록산을 놓치고 싶지 않던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에게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하고, 록산에게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고백하고 싶던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뜨겁고 달콤한 구애의 말을 쏟아 놓기 시작한다. 크리스티앙이 ‘외모’만 멋있는 사람이 아닐까 걱정했던 록산은 ‘정신적인 아름다움까지 간직한’ 그에게 더 빠져버리고 만다.

실제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썼으니 그 편지에는 얼마나 달콤하고 열정적인 말로 가득했을까! 하지만 그게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남을 위한 일이었다 해도 가능할까? 시라노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남 좋은 일을 하면서까지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혹은 자신이 쓴 편지로 인해 크리스티앙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그녀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쓴 글’에 대한 열렬한 반응을 보며 희열을 맛보았던 것은 아닐지.

그럼에도 크리스티앙과 록산이 입을 맞추는 장면까지 지켜보고 그와 그녀가 결혼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모습에선 정말 이 사람 미친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 같으면 아예 진작 ‘당신이 반한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결국엔 내 편지! 곧 나!’라고 밝혔을 거 같은데 말이다. 실제로 록산은 크리스티앙과 단 둘이 만났을 때 크리스티앙이 달콤한 말을 쏟아 내주길 기다렸지만 ‘사랑하오.’라는 말 밖에는 못하는 그에게 짜증을 내고 돌아서버리고 시라노의 편지에 빠지다 못해 나중에는 크리스티앙에게 ‘당신이 세상 제일가는 추남이라고 해도 이제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까지 하게 된다. 그런 말을 들을 크리스티앙은 록산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시라노라며 괴로워하게 되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영화 <비포 선 라이즈>, <비포 선 셋>에서 제시와 셀린느를 보면 딱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서로를 즐겁게 해준다. 굳이 그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그 모든 대화 속에 ‘사랑해’가 숨어 있다. 록산이 그저 ‘사랑하오’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크리스티앙에게 화를 냈던 것은 그 이상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대화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해’가 숨어있는 수많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들….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역시 쉽지 않은가 보다. 록산 역시 그토록 가까이에 그런 사람이 있어도 커다랗고 못생긴 코에 가려 ‘그’가 ‘그’임을 알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아주 뒤늦을지언정 결국 ‘진실’은 통한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너무 늦어서 좀 슬프긴 하지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6-07-15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라노>는 이태리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가 <베흐쥐라의 시라노>란 제목으로 오페라로도 만들어 들어봤거든요. 거기선 연애편지는 물론이고 로잔느의 창문 아래에서 격렬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창문 까지 가는 사다리 위에선 크리스티앙이 립싱크로 입만 벙긋거리는 장이 나오는데, 그것도 원작과 같나요?
<시라노> 읽어볼 건 아니지만 걍 내용이 궁금해서요. ㅎㅎㅎㅎ

잠자냥 2016-07-15 12:3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그 오페라는 보지 않았지만 원작에 시라노는 대필만 해주는 게 아니라, 록산느 발코니 아래 가서 (어둠속에서) 크리스티앙인 채 대신 격렬하게! 사랑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라노가 대신 고백해 주기 전에 크리스티앙이 나름대로 고백을 하는데 말을 더듬는 것은 물론.. 사...사...사랑합니다. 계속 이런 말만 하니까 록산느가 매몰차게 나오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