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세월이 장장 이십 년이라면 어떨까? 게다가 절절한 연애편지도 아니고 단순히 책을 매개로 한 ‘우정’의 편지라면?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에는 그런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책의 저자인 헬렌 한프와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은 영국의 헌 책방 점원(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헬렌 한프는 평생 뉴욕에서 글을 쓴 ‘작가’이지만 그다지 주목받은 작품은 없는 가난한 작가였다. 그런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책 <채링크로스 84번지> 때문이라고 한다. 독서를 좋아하는 가난한 작가가 영국의 고서점으로 편지를 보내 책을 주문한다. 그리고 날아오는 답장. 어느 날은 이 헌 책방의 주인이 직접 편지를 쓰기도 하고, 어느 날은 다른 여직원이, 또 다른 날은 남자 직원이 답장을 보내오기도 한다.


물론 그 가운데 헬렌 한프와 결정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은 ‘프랭크’라는 사람이다. 이 책은 뉴욕에 사는 가난한 작가와 영국 고서점 직원 프랭크가 1949년부터 1969년까지 주고 받은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프랭크가 아닌 서점의 다른 직원이나 프랭크의 가족이 답장을 보내기도 한다.


로맨스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겠으나, 프랭크는 두 딸과 아내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로맨스로 20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다면 뻔할 수 있는 내용인데, 그렇지 않음에도 그렇게도 긴 세월, 편지로 우정을 이어갔으니 그 내용이 더욱 궁금하지 않은가.


처음엔 책을 구하는 소비자와 책을 판매하는 서점 직원으로 만난 이들이 점차 ‘책’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 서로 이야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하는 부분도 흥미로웠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서로 부르는 호칭이나 편지 속의 말투 등이 살짝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 헬렌 한프는 2차 대전 직후라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영국의 마크스 & Co. 서점 직원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물론 평소에도 종종 식료품이나 생필품 등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선물로 보내는데,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서점 직원들이 보내오는 답장도 흥미롭다.


헬렌 한프가 영국 여행에 오면 언제든지 빈방을 내주며 기꺼이 맞이하겠다던 그들, 그리고 프랭크- 그들은 언젠가 영국에서 멋진 만남을 할 것을 늘 손꼽아 기다리지만, 프랭크와 헬렌은 끝끝내 만나지 못한다. 어느 날 헬렌에게 프랭크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할 뿐. 프랭크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눈물이 맺혔다. 마치 내가 친구를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책 내용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고, 편지 분량이 어마어마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편지에 책에 관한 깊은 토론이 오고 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책은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깊은 여운을 남긴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책으로 맺어진 우정, 그 인연 만큼 소중한 것도 없으리라.....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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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6-2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영화도 참 좋지요. :-) 책으로 맺어진 우정, 비록 온라인 상의 만남이지만 우리에겐 북플이 있어요! ^^;;

잠자냥 2016-06-25 11:53   좋아요 1 | URL
네, 리뷰 쓰려고 이 책 검색하다가 ㅎㅎ 북깨비 님이 쓰신 글을 잘 읽었습니다. 책 이야기를 나누면서(책 취향까지 비슷하면 더 바랄 게 없고요. ㅎㅎ) 가까워진 우정은 오래 가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북플에서도 그런 인연이 생긴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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