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 쓰기를 다 마쳤을 때 ‘드디어 이 여자(안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기쁘다’라고 했단다.
나는 이 책 <안나 카레니나>를 손에서 놓게 되는 순간, 드디어 이 책에서 벗어날 수 있어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기뻤다. 이 작품이 그토록 강렬하고 대단하여 그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쁘다는 이야기인가 하고 오해할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대 그런 이유는 아니다.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안나 카레니나>,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힌다는 <안나 카레니나>- 그런데 난 왜 이 책이 그다지도 지겹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울림도 없었을까? 장장 3권에 달하는 이 대하소설- 중간에 그만 읽을까 하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읽은 게
아까워서라도 읽는다는 심정으로 3권까지 읽기를 드디어 마쳤다. 이제 다른 책을, 다른 재미난 책을 읽을 수 있어 정말! 정말
기쁘다!
이 작품이 별로였던 이유 첫 번째- 그토록 많은 등장인물 중 단 한 사람도 매력적인 인물이 없다. 드라마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모든 ‘이야기’에는 읽는 사람, 혹은 보는 사람이 감정이입 할 대상이 필요하다. 등장인물 중
누군가를 응원하거나 혹은 그(또는 그녀)와 동일시하면서 ‘나라면 이럴 텐데, 저럴 텐데’하다 보면 이야기에 자연스레 빠지게
된다.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에선 그럴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 톨스토이가 인물 구현에 실패했나? 그렇지는 않다.
그는 엄청나게 공을 들여 각각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안나, 레빈, 브론스키, 키티, 오블론스키, 돌리 등등. 그런데 문제는 이 인물 중
그 누구에게도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니 주인공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는 ‘안나 카레니나’를
보자. 이 여자 상당히 매력적이고 아름답단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 여자를 만나면 사랑에 빠지고 만단다. 그런데 정말 이건
톨스토이가 독자에게 ‘안나 이 여자가 주인공이니까 이렇게 봐주길 바란다.’고 쓴 걸로 밖엔 안 보인다. 드라마나 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이라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사랑한다. 정작 그 여주인공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시청자(관객)
뿐이다. 시청자(관객)는 ‘아오! 또 뻔한 여주인공이네’ 하며 왜 그녀 주변의 인물들이 그녀를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안나가
딱 그 짝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안나가 여주인공이니까 모두 닥치고 사랑하는 거야!’
그러다
보니 이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그러나 절대 공감 가지 않는) 안나가 뻔뻔하게도 브론스키와 불륜 관계에 빠질 때, 자신의 남편과 별
애정관계에 없다는 전제가 깔렸음에도 불구하고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응원하게 된다거나 그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이디스 워튼의 <겨울>을 읽을 때 불륜 커플의 사랑이 이뤄지기를 그토록 간절하게 응원했던 것과 엄청난 대비!).
게다가 이 브론스키…. 잘생긴 꽃미남이래서 관심 있게 지켜봤더니…. 이내 반전이 나온다. 앞머리가 상당히 벗겨진 대머리였어. 이런 사람이 어떻게 꽃미남일 수가 있냐고! 전 세계의 대머리 미남들이여, 미안하다.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결정적으로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빈! 이
남자는 톨스토이의 분신, 혹은 톨스토이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레빈’ 이라는 이름도 ‘레프’에서 따온 게 아닐까
의심해본다. 이 남자- 짜증 난다. 톨스토이는 이 인물에 굉장한 애정을 갖고 올바르고 정의롭고(하지만 인간적인 약점도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 땅에 대한 애정, 땀 흘리는 일에 대한 애정을 가진 ‘진짜 알찬 남자’로 그리고 있는데, 이런
도덕군자 같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앞뒤 꽉 막힌 것 같아 답답하고 짜증만 난다. 게다가 사랑(자신의 가정)과
종교(신념)적인 면에서도 1-2-3부를 통해 일취월장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런 모습들이 많이 낯 간지러웠다.
두 번째. 나는 비도덕적인 인간인가?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으면 굉장히 그가 도덕군자이며 도덕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게 배알이
뒤틀린다. 차라리 주절주절 말이 많더라도 비비 꼬인 인물이 등장해서 비뚤어진 자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도스토예프스키 쪽이 훨씬
낫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입에 발린 소리-를 레빈을 통해 하니까 이 작품의 단점이 자꾸 보이는 거다. 나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작가의
신념이나 가치관 등등)를 작중 인물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이 소설이 더욱 별로라고 여겨졌다. 레빈이 레프의
대변자냐고!!! 이럴 바엔 톨스토이가 쓴 에세이를 읽지!
세 번째. 상류층의 이야기이다 보니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신선놀음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걸 보고 있자니 또 온몸이 근질거리고 배알이 뒤틀린다. 21세기를 사는 내가 2세기 전의
귀족놀음을 보며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 톨스토이가 당시의 시대 상황을 굉장히 선명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장점이다. 귀족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당시 시대상황이 정말 세밀하게 그려진다. 리얼리즘의 극치다. 그런데 난 또 이 리얼리즘의
극치를 싫어하는지라 ‘좀 덜 자세하게 묘사해도 좋을 텐데…. 쓸데없이 엄청 길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계몽소설
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우리나라 근대 소설 중 심훈의 <상록수>나 이광수의 <흙>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던 이 소설…. 당분간 톨스토이는 안녕!!! 그런데 정말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면 하나같이 칭찬 일색- 이런 대작은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아 칭찬…. 이 작품이 별로였던 사람은 정녕 없단 말인가. 제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나와 맞지 않는다면 아닌 건 아닌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