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안 시켰지만 그냥 하는 글쓰기 공부> 4일차- 아주 오래전에 읽은 터라 제목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심리학 관련 책으로 기억한다. 그 책에 따르면 목요일 오후, 그러니까 목요일 저녁에는 중요한 약속(소개팅이나 중요한 협상을 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을 잡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생체 리듬에 따르면 일주일 중 목요일, 그것도 목요일 저녁 무렵에 가장 피로함을 느끼기 때문에(심리적으로 금요일은 주말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사람들 기분이 좋기 마련이라나), 예민해지기도 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일주일 중 다른 날보다 중요한 약속에서의 성공률 같은 것이 낮아지기 쉽다는 이야기였다.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던 이야기라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것 같다. 실제로 목요일이 좀 제일 피곤하지 않은가?

어제가 바로 그 목요일이었고, (서울은) 비까지 내려서 추적추적한 날씨에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챙겨서 신촌으로 가자니 지하철 파업으로 사람은 왜 또 그렇게 많던지- 아이고야, 정말 희진쌤 강의만 아니었다면 어제는 정말 수업을 포기했을 것 같은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이번 강의의 마지막 시간이니 힘을 내서 교실로 향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6시 40분으로 수업 시작하기 거의 한 시간 전. 강의실에 아무도 없었다! 흐흐흐. 이걸 노렸지. 그러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선생님께 직접 선물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서(부끄럽습니다), 강의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두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공! >_< (암튼 선물 관련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하철 파업 여파로 선생님도 어제는 평소보다 좀 늦은 시간에 도착하셨다. 아아, 그런데, 숨을 잠시 돌리시더니 책상 위에 놓인 선물- 정확히는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시고는 살짝 웃으셨다. 내가 쌤에게 쓴 편지도 바로 꺼내 읽으셨다..... 안 보는 척 지켜보는 나의 심장은 콩닥콩닥 ㅋㅋㅋㅋ (선물 이야기 그만 하자)

쌤은 “탈식민은 내 안에 식민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탈식민이라고 하니까 단어로 인해 반일이나 반미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안에도 이런저런 모순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 예컨대 쌤은 외모주의를 비판하지만 당신 스스로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이런 모순, 이때 “왜?”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는 것, “왜?”라는 사유를 해야, 즉 이 모순을 고민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고.

보편성과 객관성은 구성되는 것으로(making/조작造作) 이때 조작이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지어서 만든다는 의미이다. 지식의 권력 관계는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보편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나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포지셔닝”은 곧 “글로써 개입하는 실천(투수의 눈/포수의 눈/심판의 눈/관중의 눈 어떤 눈으로 글을 쓸 것인가)”이다. “글로써 개입하는 실천”이기에 “글쓰기가 곧 사회운동이 되는 것”이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같은 글은 사회운동이 되지 못한다.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나를 전시하는 것일 뿐.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좋게 봤던 터라-켄 로치식의 거리두기가 오히려 좋았는데....쌤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겠지만 이런 식의 영화도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시하기는 하지만 그 전시가 곧 다른 이들-그런 세상을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 전달하는 파급력이 있지는 않을까?)

이야기는 이렇게 이번 강의 주제 <왜 쓰는가, 왜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가 : 글쓰기의 정치와 윤리>로 넘어갔다. 쌤은 근본적으로 왜 쓰는지, 왜 써야만 하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라고 하면서 다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언급하셨다. 여기서 잠깐.... 예전에 읽은 이 책에서 ‘쓰는 동기’에 관하여 내가 메모해둔 부분을 옮겨 본다.


내가 이런 배경 설명을 일일이 하는 것은, 어릴 때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한 작가의 동기를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의 주제는 그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나름의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중략) 나는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

1. 순전한 이기심 :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작가의 이런 특성은 과학자, 예술가,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 등, 요컨대 최상층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성이다. 사람들 절대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2.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기도 하다.

3. 역사적 충동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292~294쪽)



쌤은 이어서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프란츠 파농의 말을 읊으면서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몸이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 모두에게는 칼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쥐고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대화를 시도할수록 우리는 피를 흘릴 뿐입니다.”라는 나혜석의 말을 빌려와 여성은 칼날을 쥐고 있으므로 손에 피를 흘린다, 그러므로 다른 칼자루(칼날을 잡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를 잡아야 한다. 이것은 곧 다른 언어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고.

쓰지 못하는 것과 아예 쓸 게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 평일 저녁에 이곳까지 온 분들은 대단한 의지, 절실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쓸 것이 없는데 쓰는 사람이 문제다. 이런 사람들이 글을 쓰면 지당한 말씀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언제 글이 쓰고 싶어지는가? 억울할 때, 외로울, 때 화가 날 때, 연애할 때, 사랑에 빠졌을 때, 그리울 때, 슬플 때, 고생스러울 때 등등 감정이 솟아날 때이다. 감정적인 것이 과연 나쁜가? 인간은 분노하고 억울할 때 할 말이 많다. 이것은 곧 세계와(외부와) 갈등, 투쟁, 억압 상태라는 증거이다. 특히 분노는 인간의 감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구조적으로 억울한 상황이 반복될 때가 있고(젠더/계급 인종/권력 관계 등) 자기 자신의 인생에서 억울했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 리스트를 짜보라,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을 때의 경험 등. 이 리스트가 많은 사람들은 글을 꼭 써라. 인생은 고통이다. 억울한 게 많을수록 글감이 많아진다. 고통이 글쓰기에는 나쁜 게 아니다. 여성이나 장애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끊임없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끊임없는 결핍과 갈증 상태이기 때문이다. 분노, 결핍, 갈증은 모두 쓸거리가 된다.

언어는 약자에게 최고의 무기이다. 모두가 분신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이 호모사피엔스인 이유는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강자는 매스컴이나 지면 같은 매체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원이 없는 이들도 언어는 갖고 있다. 장 주네를 보라, 그는 노숙자였지만 썼다. 그리고 언어는 읽기와 쓰기에서 나온다(읽기와 쓰기를 해야 하는 이유). 분노와 억울함, 약자라는 상태는 나쁜 것이 아니라 쓰기의 자원이다.

그러나 이때 이런 자원 자체만으로 완성품이 되지는 않는다. 약자라는 자원 그 자체에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예컨대 똑같이 고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있다. 임철우의 <붉은 방>과 정찬의 <얼음의 집>, <슬픔의 노래>, <길 저쪽> 등의 작품. 그런데 임철우의 작품은 고문 피해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며, 정찬의 작품은 고문 가해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정찬은 왜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썼을까? 피해자의 시선이나 관점에서 썼으면 더 쉽지 않았을까? 정찬은 이런 작품을 통해서 무엇이 가해자로 하여금 고문을 영광스럽게 했는가를 탐구한다. 가해자들이 왜 그랬는지를 알아야 피해를 또 막을 수 있다(고문의 구조를 이해). 그러나 이때 윤리적 고민이, 치열한 사유가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폭력 포르노(고문 포르노)가 되거나 가해자 옹호의 글로 읽힐 수도 있다. 분노를 성찰해야 한다, 가해자와 나의 관계를 성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나는 그런 적이 없는가를 성찰. 여기에서 글쓰기의 윤리가 발생한다.


Maurits Cornelis Escher, <Drawing Hands>. 1948



에셔의 <그림을 그리는 손>을 보라. 이 그림에서는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없다.” 글은 “대상에 대해 쓰는 게 아니라 대상과 나의 관계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손이나 꽃병이나 사과나 모두 같다. 대상을 그리는 것,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나의 관계를 성찰해야 한다. 중산층인 나와 노동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중산층인 내가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와 동일시하기란 어렵다. 불가능하다. 흔히 “연대”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배려, 동정심, 자기만족이 아닐까. 연대는 쉽지 않다. 또 연대, 카르텔, 네트워크, 연줄은 어떻게 다른가. 중산층과 노동자의 연대? 불가능하다. 연대는 어려우므로 이런 글을 쓰려면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 자원이 많은 사람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도 하기 쉽다. 이 모순에 대해 써라. 연대의 당위성이 아니라, 연대의 어려움, 모순을 성찰해야 한다.

<밀크맨>의 작가 애나 번스의 말 인용. “문이 열리고 내면의 모순이 드러나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하기는커녕 나 자신에게조차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없다.”(<밀크맨> 필독!) 글쓰기는 세상을 바꾼다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을 이해(인식/언더스탠드/동의/수용)하고 모두가 모순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복잡한 삶 속에서 글을 써라. 이것이 글쓰기의 운명이다.

기억하자. “약자의 유일하고도 품위 있는. 영향력 있는 자원은 언어”이다. 분노는 투명하지만 세상은 복잡하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서 쓰려면 길을 잃기 쉽다. 그래서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분노에 차서 막상 쓰고 나면 화풀이만 되고 말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약자의 특성이 아닐까.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지루할 것이다. “분노한 자신을 인식하는(사유하는) 또 다른 자신을 탄생시켜야 한다. 에셔의 그림처럼. 이럴 때 분노는 자원이 된다.”



















마지막 시간이라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받으셨고 두 사람이 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시간이 좀 길어졌다. 하나만 더 받으셨으면 나도 질문할 거 있었는데....(이건 메일로 할 수밖에)- 아무튼 그러고 나서!!!!!!!! 만면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쌤이 다급하게 물으셨다.



“이 천하장사 소세지 놔둔 사람 누구예요? 누구죠?”

침묵하는 천하장사 소세지 잠자냥.

수강생들 중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쌤은 “아무튼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이거 먹고 내가 00kg 돼서 나타난다.”라고 하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부담되지 않으면서도 쌤이 좋아하실 만한 것으로 고른 천하장사 ㅋㅋㅋㅋ 이게 좀 생각보다 무거워서;; 쌤이 고생 좀 하셨을 것 같다.......







참, 그리고 얘들아 주목... 12월은 강의 없고, 1월, 2월에 강의하실 거라고, 이번에는 이론/합평반 따로 하는 게 아니라 합평반만 토요일에 4번씩 하신다고. 1월 합평반 토요일 4번, 2월 합평반 토요일 4번 이렇게. 강의 공지는 곧 올라갈 것이라고 하는데.... 한겨레문화센터 홈페이지나 <정희진의 공부> 댓글 중 쌤이 올리는 댓글 주목하라능... 합평반은 글을 써서 내야 하고, 그 글에 대해 쌤의 코멘트를 받을 수 있단다. 공쟝쟝아, 들을래? 들어라, 들어볼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앞희진 좌천하장사 우은오, 2024년 쟝의 극락은 이뤄질 것인가?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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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키 2024-02-29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퍼가기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어제 댓글 달고 보니 저와 함께 사는 사람의 아이디로 댓글을 단 것이었습니다.ㅜㅜ 위의 댓글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혼란 드려서 죄송해유) 3년전쯤인가 한겨레에서 선생님 논문 글쓰기 강의 6강짜리 들은 적이 있고 (논문 쓸 건 아님 ㅎㅎ) 요즘은 정희진의 공부 들으며 행복해하는 1인입니다.. 정희진 선생님께 더 배우고 싶어서 언제나 드릉드릉하는 중인데, 한겨레 개강알림일 신청까지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알라딘 서재에 요렇게 책 좋아하는 분들이 모여계시는군용...! 깊고 넓은 알라디너의 세계에 감탄하고 갑니다. 글 퍼간 블로그 주소는 https://blog.naver.com/iskii82/223368715943 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이스키 2024-02-29 10:57   좋아요 1 | URL
앗 죄송해요.. 위의 댓글을 지웠더니 거기에 달아주신 잠자냥님의 댓글도 삭제되었나봅니다 죄송합니다 엉엉엉 ㅠㅠㅠㅠ

잠자냥 2024-02-29 10:5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알라딘서재는 여성주의 책 읽기 모임도 있고, 정희진 선생님 사랑하는 분들이 모여서 함께 책 읽고 생각 나눔도 많이 하고 있으니 서재활동 하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즐거운 공부 생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제 댓글 지움은 뭐 한겨레 강좌 링크만 알아두셨다면 괜찮습니다. 그거 알려드리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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