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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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생활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역적으로 몰려 유배당하는 상황은 드라마나 영화, 책에서나 만날 법하고 그렇기에 그런 생활도 언뜻 그다지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옛 선비들은 유배지에서 안빈낙도하면서 그럭저럭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에 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 유배 생활이 현대에, 그것도 한참 꿈꾸고, 한참 자유롭게 돌아다닐 나이의 젊은 여성에게 형벌처럼 주어진다면 어떨까? 고작 몇 평의 공간으로 한정된 감옥살이가 아니니 덜 끔찍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단지 저 머나먼 외딴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니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을 읽기 시작한 초반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작품은 남녀의 말다툼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남자는 그런 여자가 짜증스러워 온갖 비난을 퍼붓다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한다. 다른 나라라면 그런 비난을 할 리가 없는데, 이곳은 공산독재가 한창인 1980년대 후반의 알바니아. 그렇기에 “당신 정체가 뭐야, 스파이야?”라는 남자의 말은 여자에게도, 또 그 자신에게도 치명적이다. 남자의 이름은 ‘루디안 스테파’. 극작가인 그는 공산독재 치하에서도 그럭저럭 검열을 피해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고, 작가로서의 명성도 인기도 얻고 있다. 말다툼을 벌인 여자 친구 ‘미제나’도 작가로서의 명성과 인기를 통해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출판 사인회에서 만났으니까.

그런데 루디안은 어느 날 문득, 아무런 설명 없이 당 위원회의 소환을 받고 불안감을 느낀다. 예술 심의회에서 검열중인 새 작품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제나가 고발한 것일까? 말다툼 중 “당에서 붙인 스파이가 아니냐”며 몰아붙인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그때 싸움 중 책꽂이에서 떨어진 책들 중 몇몇은 공산독재에 비판적인 책들이 아니었던가. 이래저래 불안한 마음으로 당 위원회 소환에 응한 그는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맞닥뜨린다. 한 여성이 자살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언젠가 루디안이 ‘린다 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고 친필 사인을 해준 사람이다. 그렇게 사인을 해준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며, 심지어 그 여자의 죽음에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루디안은 답답할 뿐이다.

알고 보니 이것 참, 문제이긴 하다. 죽은 여자, ‘린다 B’는 이 나라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집안은 군주제 시절 옛 왕실의 측근이었다. 그리고 현재 유배상태이다. 그런 상태였던 린다의 일기장에 루디안의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린다는 루디안을 향해 꽤 달콤한 감정을 키우고 있었고 당위원회가 보기에 그 감정은 단순한 팬 수준을 넘어섰다. 그렇기에 ‘린다 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는 루디안의 사인은 심상치 않은 것이다. 게다가 당국은 유배당한, 옛 왕실 측근 여성의 자살에는 무언가 메시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알바니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 음모소탕의 계기였던 총리자살사건 이후 당국은 아무리 평범해 보일지라도 모든 자살 뒤에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 것을 추적해왔다는 것이다. “자살을 통해 종종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는 것이 당국의 생각이다.

루디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린다 B라는 여성에게 직접 사인해준 기억이 없다. 게다가 자기를 향해 그토록 달콤한 감정을 키운 여성이라는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기억을 더듬던 그는 마침내 린다와 자기 사이에 미제나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랬다. 미제나는 친구에게 주겠다면서 루디안에게 사인을 받아갔던 것이다. “제 친구가 아주 기뻐할 거예요.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거든요,”라는 말을 남겼던 그녀. 눈부시게 아름다웠기에 그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던 루디안은 그때를 계기로 미제나와 연인 사이가 된다. 그렇다면 미제나는 정말 당국이 심은 스파이일까? 죽은 린다와는 또 무슨 관계일까? 단순히 친구일까? 이 작품의 재미는 무엇보다 이 세 사람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데 있고, 두 번째로는 린다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좇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는 린다의 베일이 벗겨질수록 그 젊은 여성의 안타까운 삶에 연민하게 되고 그런 삶을 살게 한 공산독재 알바니아 현실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스탈린이라는 인물과 종교 금지, 또는 정치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적을 하면 군 장교나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는 감옥에 갔고 심지어 처형부대를 마주하게 되는 알바니아. 모든 전화는 도청되고 있으며, 넷 중 한 사람은 국가를 위해 감시를 한다는 소문이 진실처럼 여겨지는 알바니아. 이런 나라에서 옛 왕실의 측근 집안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유배생활을 하는 린다 B. 그런 그녀에게 저 멀리 떨어진는 수도 티라나는 그녀가 꿈꿀 수 있는 이상향과도 같다.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도시를 린다처럼 그렇게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미제나는 갈 수 없는 도시이기에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유배 법규를 알고 나자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린다는 매일 오후 정해진 시각에 경찰서에 출두해야 하며, 허락받지 않고 지정된 구역을 벗어날 경우 당연히 처벌을 받는다. 인근 도시마다 정해진 형벌이 있었는데, 더 먼 도시로 가는 경우엔 형벌이 가중된다. 수도 티라나는 최고형이었다. 무기징역 또는 사형. 그런 린다에게 미제나는 세상 소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심지어 린다가 꿈꾼 루디안과의 사랑까지도 어쩌면 대신 이뤄줄 수 있는 존재.

사실 처음에는 루디안을 향한 린다의 맹목적인 애정이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에게 아름다운 여성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는 설정은 남성 작가들의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하는 내게 이 또한 조금은 그런 판타지로 보여서 우스꽝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나 린다에게 루디안은 단순한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년 전부터 신문의 연극 관련 비평이나 라디오 뉴스나 텔레비전 출연을 지켜봐온 남자.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토록 오래전부터 만나길 꿈꿔온 남자, 루디안은 린다에게는 갈 수 없는 도시 ‘티라나’와 같은 대상이다. 그 사랑마저도 결코 이룰 수 없는. 단 몇 시간의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차라리 암에 걸리기를 바랐던 린다. 그런 린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강력할수록 자유는 크리라’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미제나는 티라나만 가면 자유가 있으리라는 린다에게 그 생각이 얼마나 헛된지, ‘알바니아는 감옥과 유배지에만 자유가 없는 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고. 티라나에도 자유는 전혀 없으며 다른 곳도, 그 어디에도 자유는 없다’는 말을 들려주지만 이토록 충격적인 말에도 린다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린다는 ‘모든 건 관점의 문제’라고 말한다. 거주지를 지정당한 채 평생 살아야 하는 린다에게 티라나는 그녀가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였다. 그런 린다를 지켜보노라면 단 하루도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 어디에도 그 어떤 희망도 걸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절망스럽고 끔찍한 현실인지 깨닫게 된다.


고마워, 프롤레타리아독재. 난 네가 얼마나 선하고 올바르고 완벽한지 알아. 학교에서 우리 머리에 그렇게 주입했으니까. 그렇지만 난 너무 지쳤어. 이런 삶을 더는 못 살겠어. (183쪽)


린다의 이 처연한 삶을 마주하게 된 루디안은 죽어서도 좀처럼 자유를 얻을 수 없는 저 지옥에 갇힌 린다를 상상 속으로 불러낸다. 지옥에 갇힌 에우리디케를 구해내고자 한 오르페우스처럼. 오르페우스와 달리 루디안은 린다, 그녀를 구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린다는 죽은 뒤에야 마침내 티라나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녕 자유일까. 그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묻어버리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날조하는 당 관계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린다는 그 알바니아에서는 끝끝내 자유로울 수 없음을, ‘떠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린다가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오직 극작가인 루디안의 상상 속에서, 그러니까 예술의 품안에서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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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3-10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바니아 출신 독재자 엔베르 호자가 스탈린
빠였다고 하더라구요 :>

린다의 루디안에 대한 끌림은 카다레 작가가
꼰대라는 사실의 방증이 아닐까 뭐 그런 생
각이 초큼 들었습니다.

잠자냥 2021-03-10 13:17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읽고 알바니아는 물론 엔베르 호자에 대해 많이 찾아봤어요. 요즘 알바니아에서는 호자를 그리워하기도 한다는군요.

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진짜 린다나 미제나나 그 이름다운 여성들이 루디안한테 끌히는 거 너무 ㅋㅋㅋㅋㅋ 아 진짜 그 설정이 못마땅해서 별 하나 뺐습니다. ㅋㅋㅋㅋㅋ (암만 생각해도 작가 판타지)

다락방 2021-03-11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다레 꼰대 입니까? ㅋㅋㅋ 저는 오래전에 <부서진 사월> 하고 그 뭐더라 .. <사고> 읽었는데 하도 오래전이라서 카다레 존재를 잊고 있었네요. 그런데 잠자냥 님의 이 리뷰를 보니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카다레 꼰대..라는 여러분의 댓글을 읽고 나니, 문득 이게 남자 작가들의 고질적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글은 쓰는 자의 몫이고 쓰는 자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든 자유지만, 남자 작가들은 남자 주인공에 자신을 반영해서 로망 실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걸 제일 심하게 느꼈던 게 박범신이었거든요. <은교> 에서 근육질 할아버지 만들어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교복 입은 소녀도 멋지게 생각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진짜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 하하하하하.

오늘 올리신 책 리뷰 읽는데 ‘밀란 쿤데라‘의 <농담>도 겹쳐 생각나요. 농담 한 번 잘못했다가 끌려가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아무튼 저는 이것도 장바구니에. 통 읽을 시간은 없지만 말입니다.

잠자냥 2021-03-11 09:42   좋아요 1 | URL
ㅎㅎ 저는 꼰대까지는 생각못했는데, 너무 아름다운 젊은 여성들이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은 남자 작가를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동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내용은 좀 싫더라고요. 남자 작가들 판타지 같아서 보고 있으면 좀 웃기기도... 근데 또 찰스 부코스키의 화려한 여성 편력 경우를 보면 그게 완전 허황된 이야기 같지는 않고... 그래도 실제로 그런 것과 작품 안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설정을 하는 것은 좀 별개라고 생각돼요. 어우 박범신 은교 줄거리만 봐도 짜증나서 영화도 책도 다 패스한 그 작품.... 휴... ㅋㅋㅋㅋㅋ

<농담> 정말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죠. 공산독재 치하라는 설정이 공통점이네요.

모쪼록 바쁘신 시기 얼른 지나고 마음껏 읽고 쓰는 시간이 어서 돌아오길 바랍니다.

다락방 2021-03-11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좋아요 ☺️ (뜬금)

잠자냥 2021-03-11 09: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힘드시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