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이야기 - 영미 여성 작가 단편 모음집
루이자 메이 올콧 외 지음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그녀들의 이야기》 이 단편 모음집에서 케이트 쇼팽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이디스 워튼 <다른 두 사람>은 이미 다른 단편집을 통해 읽은 작품이다. 그밖에도 루이자 메이 올컷이나, 제인 오스틴, 윌라 캐더, 샬럿 퍼킨스 길먼, 캐서린 맨스필드, 버지니아 울프 등의 이름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다른 작품들로 만나본 작가들이다. 그래서 처음 이 단편집을 봤을 때, 꼭 사서 읽어야할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좋은 작가의, 괜찮은 작품들이 있을지 몰라. 그런 작가와 작품을 발굴한다고 생각하고 한번 읽어볼까 싶은 마음. 다행히 그 예상은 기분 좋게 적중했다.

첫 두 편은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올컷의 <내가 하녀가 되었던 경위>는 올컷이 ‘말동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어느 집의 하녀 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작은 아씨들>의 ‘조’처럼 독립적이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애를 쓰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 여성은 바로 올컷 자신이다. 하녀 일을 하겠다고 나선 딸을 말리면서 루이자의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네 자존심이 너무 세지 않니”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루이자는 “저는 빈둥거리면서 얹혀살기에 자존심이 너무 센 거예요. 차라리 바닥을 닦고 빨래를 하겠어요.” 답한다. 이런 부분이 속시원하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누이의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다가온 ‘요세푸스 목사’가 루이자가 정작 찾아가자 누이의 말동무는커녕 그 자신이 루이자를 자기 하녀처럼 부리며 온갖 일을 시키는 장면이다. 그렇게 위선적이면서도 말은 얼마나 교묘히 잘하는지 역겨울 정도인데, 거기에  루이자는 당당히 응수한다.

두 번째 작품인 <세 자매>는 제인 오스틴 특유의 결혼과 로맨스에 대한 신랄한 냉소가 넘친다. 나는 제인 오스틴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많이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소리를 하기는 뭐하지만,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성의 로맨스와 결혼 이야기에는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로맨스나 결혼 아니면 쓸 이야기가 없는가? 하는 반감이 들어 잘 읽게 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제인 오스틴 장편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세 자매 중 누구하고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돈만’ 많은 남자의 구애를 두고 세 자매가 고민에 빠지는 내용이 그려진다. 그중 이 결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첫째 메리로, 그녀는 이 결혼으로 자신이 원하는 부와 지위를 얻으리라 기대하지만, 결혼 상대인 남자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존재다. 그런 메리를 보며 “그 사람이 메리 언니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하겠지만, 그 사람 돈과 가문과 저택과 마차는 행복하게 해줄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막내의 시선이 꽤 신랄하다. 읽다 보면 오직 돈과 지위, 명예 등 ‘사랑’이 아닌 ‘필요’ 때문에 이루어지는 결혼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씁쓸한 생각이 절로 든다.

이렇게 별 감흥 없이 읽어나가다가, 앗! 바로 이거야, 하는 작품을 발견했는데,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가 바로 그렇다. 이 단편을 읽고 작가의 다른 국내 번역작을 찾아봤는데 이렇다 할 작품을 발견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평생 서른 권이 넘는 단편집과 소설을 출간했고, 소설 속 여성 인물들에게 독립성을 부여함으로써 여성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려고 노력했다는 작가, 심지어 1926년에는 여성 최초로 미국문화예술아카데미에서 5년에 한 번 그 시기에 가장 뛰어난 미국 소설가에게 주는 메달을 받았다는 작가. 그런데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너무나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뉴잉글랜드의 수녀>에는 루이자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잘 가꾸어진 집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어느 날, 하루가 저물 때 쯤 그녀의 집에 조 다겟이 찾아온다. 보아하니 둘은 연인 사이인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어색한 공기가 감돈다. 연인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다정한 대화나 포옹 같은 것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색한 상태에서 몇 마디 나누다가 다겟이 탁자 위에 놓인 루이자의 책과 잡지를 뒤적이며 살펴본다. 그러다가 다겟은 그걸 아무렇게나 내려놓는다. 바로 그때 루이자는 어색하지만 단호하게 책과 잡지가 원래 놓였던 순서, 그러니까 다겟이 오기 전, 자신이 정갈하게 의도를 갖고 배치해놓았던 순서대로 돌려놓는다. 다겟은 머쓱해져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어떤 책이 위에 있는지가 중요해?” 그러자 루이자는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답한다. “항상 이렇게 놓거든.”

아, 난 이 장면을 보고, 루이자와 다겟의 미묘한 사이, 그리고 루이자이 성격까지 단번에 파악했다. 루이자는 무엇보다 자기만의 공간, 자기가 세워놓은 일상의 가지런한 질서와 규율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사랑(?)하는 이가 오더라도 자기 공간에서 자신의 물건을 아무렇게나 만지고 그 배열 순서를 망치는 행동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허락은 하더라도 원래 모습 그대로 돌려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 것이다. 조 다겟은 루이자의 집을 나서면서 ‘자신이 마치 도자기 가게에서 나온 악의라곤 전혀 없던 순진한 곰처럼’ 느낀다. 반면 루이자는 ‘오랫동안 시달린 친절한 도자기 가게 주인이 곰이 나간 후 느꼈을 법한 기분’을 느낀다. 그가 나가자마자 양탄자에 묻은 흙을 ‘그럴 줄 알았다’면서 털어내기 바쁘다.

조 다겟은 일주일에 두 번 루이자를 찾아왔고, ‘섬세하게 꾸며진 그녀의 예쁜 방에 앉을 때마다 레이스로 만들어진 울타리’에 갇힌 기분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투박한 손과 발이 혹시나 요정의 거미줄에 걸릴까 봐 움직이기 두려웠고, 루이자 역시 똑같은 걱정으로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절을 읽고, 루이자를 탓할 수도 있으리라. 연인 사이라면서 공간을 함께 공유하고, 그런 시간을 즐기면서도 어떻게 연인이 자신의 방을 어질러놓고, 물건을 헤집어 놓는 일에 신경 쓰느라 서로에게 몰두하지 못할 수 있을까?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 이렇게 생각하리라. 실제로 두 사람 사이는 미묘하다. 그들은 한 달 안에 결혼할 예정이다. 한때는 서로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쎄.... 약혼 기간이 무려 15년이나 이어졌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느낀 것은 무려 15년 전이다. 15년 중 14년 동안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편지도 주고받지 못했다. 그 긴 세월 내내 다겟은 호주에 있었다. 한몫 잡는다고 호주로 떠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랜 세월동안 인내하며 자신을 기다린 여자와 결혼하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루이자의 어머니와 오빠가 죽었고, 그녀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15년 동안 이어진 약혼, 14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연인 아닌, 연인, 그리고 홀로 남겨져 그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사는 조용하고 정갈한 삶에 익숙해진 여인. 그런 여인 앞에 어느 날 옛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만 남은 약혼자가 돌아온 것이다. 조 다겟이 돌아왔을 때 루이자가 받은 첫 느낌은 곤혹스러움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4년도 아닌 14년이다. 서로 얼굴을 보기는커녕 편지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이 긴 세월 동안 사랑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속임수며 기만이 아닐까. 심지어 루이자는 이제 행복한 혼자만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녀의 지난 세월, 특히 최근 7년간의 삶은 잔잔한 행복으로 그득했고, 그녀는 연인이 곁에 없다고 단 한 번도 불안해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뉴잉글랜드의 수녀>, 111쪽). 그런데 갑자기 결혼해서 남자의 집으로 옮겨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루이자는 혼자 사는 집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에 예술에 가까운 열정을 느꼈다. 그녀는 보석처럼 빛날 때까지 광을 낸 창틀을 보면 진정한 승리감으로 두근거렸고, 말끔한 서랍장 속에 청결히 개켜진 채로 라벤더와 전동싸리와 완벽한 순수의 향을 풍기는 옷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것들을 지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녀의 뇌리에 어떤 이미지가 스쳤는데, 너무 놀란 그녀는 거의 천박하다고 여기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것은 투박한 남편의 물건이 끝없이 널려 있는 광경, 섬세한 조화 속에 거친 남자의 물건이 끼어들며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먼지와 혼돈이었다. (<뉴잉글랜드의 수녀>, 113~114쪽)


루이자는 이 고요한 혼자만의 삶을 뒤로하고 조 다겟과 결혼해 그의 공간으로 옮겨가게 될까? 사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그렇고, 전개되는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독자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결말로 나아가기까지 뜻밖의 사건이 일정 역할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루이자가 다겟과 결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자기만의 독립적인 삶을 계속 꾸려나갔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고요와 평온한 협소함 자체가 그녀의 타고난 권리’가 되고 ‘하루하루가 똑같으며 이렇게 매끈하고 무결하고 순수할 것이라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치는 기분. 그래서 ‘수도원에서 해방된 수녀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헤아리는 루이자. 그 결말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때문에 이 작품의 제목인 <뉴잉글랜드의 수녀>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그렸기에 ‘뉴잉글랜드의 수녀’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아니 애초부터 그러한 길을 걷지 않음으로써 ‘수도원에서 해방된 수녀’와 같은 기쁨을 느낀다는 점에서 무척 역설적인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누런 벽지>로 유명한 샬럿 퍼킨스 길먼의 <변심>도 짧지만 강렬하다. 역시! 하고 감탄하게 된다. 크게 놀라운 내용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완벽해 보이는 부부. 그들의 집에 젊고 아름다운 하녀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예상 가능한 전개. 알고 보니 남편이 하녀를 겁탈해서 임신하게 만들고 뭐 그런 내용이 펼쳐진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과 하녀의 관계를 알게 되는 장면이 매우 기발하고 절묘하며 스릴(?) 넘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편과 하녀 게르타의 관계를 알게 된 매로너 부인의 태도에, 더불어 그토록 오래 전에 ‘이런’ 작품을 쓴 작가에게 감탄하게 된다.

처음에 매로너 부인은 남편과 하녀의 관계를 알고는 분노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이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하녀는 남편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는가! 매로너 부인은 불쾌함과 분노에 휩싸여 울며 애원하는 하녀 게르타에게 차갑게 말한다. “방으로 가서 짐을 싸.”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 후 혼자서 차분히 생각에 잠긴 매로너 부인은 곧 자신의 태도를 후회한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 28년 동안 받은 훈련, 학생으로서 그리고 강사로서 대학에서 보낸 시간과 그녀 스스로 이루어 낸 독립적인 성장 덕분에 그녀의 정신은 게르타의 정신과는 전혀 다르게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있었다. 한 여자는 아내였다. 사랑이 넘치고 신뢰했으며 다정했다. 다른 한 명은 하녀였다. 사랑이 넘치고 신뢰했으며 다정했다. 어린 소녀였다. 낯선 나라에 홀로 와서 이 집에 의존하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친절도 고마워하는 이 아이는 어떤 훈련도 교육도 받지 못했고 어린애 같았다. 물론 그녀는 유혹을 뿌리쳤어야 했다. 하지만 매로너 부인은 신뢰하는 사람이 우정의 가면을 쓰고 유혹할 때 그것을 알아보기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할 정도로 현명했다. 잡화점의 점원이었다면 게르타가 잘 뿌리쳤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는 매로너 부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여러 명을 뿌리쳤다. 하지만 존중해야 할 사람을 그녀가 어떻게 비난했겠는가? 복종해야 할 사람을 그녀가 어떻게 거부했겠는가? (<변심>, 155쪽)


그러니까 매로너 부인은 남편과 하녀의 관계의 본질을 꿰뚫어본 것이다. 하녀에게 네가 내 남편을 꼬셨지! 나쁜 년! 운운하며 집을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주인의 얼굴을 하고서 하녀를 유혹해 자기 욕망을 채운 남편의 비열함을 알아차린다. 그 비열하기 짝이 없는 남편은 이런 짓을 그녀가 사는 집의 지붕 아래에서 저질렀다. 그러고 나서도 떳떳하게 젊은 여자를 사랑한다고 밝힌 다음, 아내와 헤어지고 재혼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그저 순수하고 단순하게 마음이 아팠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달랐다. 남편은 본인의 쾌락을 위해 게르타의 행복들, 그러니까 ‘깨끗하고 젊은 아름다움, 행복한 삶의 희망, 결혼과 모성, 명예로운 독립’ 등등 그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매로너 부인은 남편의 피해자임이 명백한 게르타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위로 새로운 감정이 밀려오며 말 그대로 그녀를 벌떡 일어나게 한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곧추세우며 걸었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지은 죄야.” 그녀가 말했다. “이것은 여성을 상대로 범한 죄야. 모성을 상대로 범한 죄야. 아기에게 저지른 죄야.”(<변심>, 157쪽)


매로너 부인은 게르타의 방으로 돌아가 그저 울고만 있는 이 어린 소녀를 위로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는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비밀로 남겨둔다. 아무튼 꽤 통쾌한 결말이다. 게다가 100여 년 전에 남성의 그루밍 성폭력 범죄를 꿰뚫어 보고 힘없는 어린 소녀에 대한 연민과 연대, 그로써 비열한 범죄자인 남편을 단죄하는, 그리고 그런 응징을 위해서는 여성이 깨어있어야 함을, 통찰력 있게 써내려간 샬럿 퍼킨스 길먼에게 그저 찬사를 보낼 뿐이다.   

이렇게 여성 간의 연대를 강조한 작품으로 이 책에 실린 유일한 희곡인 수전 글래스펠 <사소한 것들> 또한 빛난다. 이 작품에는 남편을 살해한 것이 틀림없는 여성을 섣불리 단죄하기보다는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먼저 이해하려는 ‘피터스 부인’과 ‘해일 부인’이 등장한다. 이들과 대비되는 인물인 보안관과 검사 등은 자기들만의 객관적이라는 관점으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부인들이 주목하는 ‘사소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며 그녀들의 그런 태도를 비웃기 바쁘다. 그러나 사실 그 ‘사소한 것들’ 안에는 존 라이트의 아내가 왜 남편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주 중요한 단서들이 담겨 있다. “우리는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도-종류가 다를 뿐이지 다 똑같아요. 나라면 그녀에게 병이 다 깨졌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터지지 않았다고 말해요. 전부 말짱하다고요.”라는 해일 부인의 말은 그래서 여성의 이해심과 직관, 연민, 배려가 오롯이 담긴 명대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을 읽고 수전 글레스펠의 작품을 더 찾아보고, 그이의 희곡 <앨리슨의 집>을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것은 당연한 순서랄까.

조라 닐 허스턴의 <땀>도 강렬하다. 백인들의 세탁물을 빨래해주며 근근이 살아가는 딜리아. 그런데 그녀의 남편 사이크는 아내에게 빌붙어 사는 주제에 바람까지 피우고, 게다가 걸핏하면 딜리아를 두들겨 팬다. 15년 전만 해도 딜리아가 자길 떠날까 봐 벌벌 떨었던 인간이 이제는 아내를 향해 온갖 욕설과 구타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웃에서도 혀를 끌끌 차며 그를 보고는 “곰한테 내장을 내줄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말한다. 딜리아는 뼈 빠지게 일하면서 ‘뜬눈으로 누워서 그들의 지난 결혼생활에 널려 있는 파편들을 응시’한다. ‘멀쩡한 건 하나도 없었다. 꽃 같은 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새어 나온 짭짤한 물에 오래 전에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물, 그녀의 땀, 그녀의 피. 그녀는 결혼에 사랑을 가져왔지만 그는 성욕만을 가져왔다.’(<땀>, 195쪽). 딜리아는 이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 과정이 강렬하게 그려진다.


“인간이 올곧지 않으면 세상 어느 법도 그 사람을 올곧게 만들 수 없어. 아내를 사탕수수처럼 취급하는 놈들이 세상에 숱하다고. 처음에는 영글게 즙이 꽉 차서 달콤하지. 하지만 쥐어짜고 짓이기고, 비틀어서 단물을 쏙 빼먹어. 성이 찰 때까지 빨아먹은 다음에 사탕수수 껍질처럼 그냥 내버리는 거야. 그러는 동안 그놈들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혐오해. 그래도 그놈들은 한 방울도 안 남을 때까지 계속 쥐어짜. 그러고 나서 사탕수수 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여자가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싫어하는 거야.” (<땀>, 198쪽)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런 작가와 작품들을 새로 발견한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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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08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잠자냥 님이 극찬하신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네요. 샬롯 퍼킨스 길먼과 메리 월킨스 프리먼의 작품이요. 너무너무 읽어보고 싶어요. 땀은 제목만으로도 뭔가 훅- 오네요.

저도 언젠가 얘기하려고 했는데 제인 오스틴을 딱히 좋아하지 않거든요. 너무나 유명한 작품<오만과 편견>도 저는 딱히 좋지를 않았고요. <엠마>도 별로였어요. 엠마는 읽다가 엠마 성격 마음에 안들어서 대차게 깠던 기억도 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죄다 제인 오스틴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잠자냥 님도 당연히(!)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너무 반가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나름 제인 오스틴 작품을 여러권 읽긴 했네요. 설득, 오만과 편견, 엠마, 노생거 사원까지. 많이 읽었다. ㅎㅎㅎㅎ 제인 오스틴이 쓴 소설보다는 제인 오스틴에 관련된 것들이 더 재미있었어요. <비커밍 제인>이나 <제인 오스틴 북클럽>이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라거나. 후훗. 이런 재미있는 작품들이 만들어진걸 보면 제인 오스틴이 정말 큰 사람이긴 했는가봐요.

이번달 월급날에는 오늘 리뷰쓰신 이 책을 사야겠어요. 후훗. 책 사는 날들의 연속이네요. 하핫. 언제나 그랬듯이..



잠자냥 2020-06-08 15:09   좋아요 0 | URL
와 그래도 제인 오스틴 작품 많이 읽으셨네요. 전 그렇게 많이 읽을 생각조차 들지 않더라고요. 제가 사실 빅토리아시대 여성 작가들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로맨스와 결혼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작품.... 정말 따분하고 재미없............ 남녀가 핑퐁하는 그런 거 노관심.... 사랑하든가 말든가 노관심..... -_-;; 그 시절을 다룬 영화, 특히 제인 오스틴 작품을 영화로 만든 그런 영화들도 지루해서 미쳐버릴 거 같은;;; 그냥 생각만 해도 그 대사들이 막 오그라들어요;;; 휴........ 정신 차려! 사랑과 결혼이 전부냐 싶어서;;; -_-;; 암튼 다락방 님 반가워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6-08 15:15   좋아요 1 | URL
이렇게나 인기 많은 제인 오스틴인데 내가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걸까, 하는 생각으로 여러권 읽었지만 전 제인 오스틴은 아닌걸로..... 그렇지만 새로 나온 민음사의 맨스필드 파크를 읽어보고 싶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음..써놓고 보니 읽어보고 싶다기 보다는 사고 싶은 거네요? 민음사 책장에 깔맞춤하기 위함인가...

정말 반가워요 잠자냥 님. 엉엉 ㅠㅠ 문학 좋아하면서 제인 오스틴을 안좋아하다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20-06-14 1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4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5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5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4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3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7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7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