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핀 드 비강의 <고마운 마음>은 제목만 보면 책에서 펼쳐질 내용이 눈앞에 그려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왠지 ‘뻔한’ 느낌이랄까.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종종 얼마나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잊고 살아가는지, 그러므로 지금 고마운 이에게 그 마음을 할 수 있는 한, 자주 표현해야 한다는 그런 내용들이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런 예상이 얼마쯤은 들어맞는다.

나는 성격이 짜증도 많고 까칠한 편이라서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아니 까칠함이 폭발했던 시기인 서른 초반만하더라도 이런 종류 ‘착한’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요즘은 친구들로부터 인간이 달라졌다(?), 유해졌다는 소리를 곧잘 듣고는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런 ‘착한’ 책에도 요즘은 종종 손이 간다. 델핀 드 비강의 ‘인간관계에 대한 짧은 소설’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읽은 두 권, 그러니까 <충실한 마음>, <고마운 마음> 둘 다 착하고 순하다. 따뜻하다. 세상을 좀 더 선량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런데 그런 ‘착한’ 제안을 너무 식상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계속 이 시리즈를 찾아 읽고, 다음 권도 기대하게 된다.  

<고마운 마음>의 주인공은 한 노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미쉬카’- 프랑스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으로 그녀는 가족도 없이 홀로 나이 들어가고 있다. 오랫동안 신문사에서 교정교열 업무를 맡아온 그녀는 누구보다 단어를 사랑하고, 단어를 아주 잘 안다. 그런데 참 인생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그런 그녀가 조금씩 말을, 단어를,  언어를 잃어버리는 병에 걸리고 만다. 실어증에 걸린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언어들이 조금씩 그녀에게서 빠져나간다. 미쉬카는 겁에 잔뜩 질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구조 신호를 받는 사람은 젊은 여성인 ‘마리’로, 마리와 미쉬카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이 작품은 마리의 관점에서 시작한다. 마리는 책 첫머리에서 묻는다. ‘하루에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는지, 한번쯤 생각해본 적 있나요? 소금을 건네줘서 고마워요, 문을 잡아줘서 고마워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거스름돈 고마워요, 바게트 고마워요…….’ 마리의 이 질문은 잠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별 의미 없는, 관습적인 고맙다는 말은 오히려 더 쉽게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정작 내 곁에서 나를 신경 써주고 마음 써주는 이들에게 문득문득 아무 이유 없이 ‘고맙다’ 말하는 일은 왜 이토록 드물기만 할까. 왜 그토록 어렵기만 할까.

마리는 말을 잇는다. ‘오늘 내가 좋아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미쉬카의 죽음 뒤에 자신과 할머니의 삶을 돌아보는 마리. 마리는 종종 “할머니에게 엄청 많은 은혜를 입었어.”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거야.” “할머니는 내게 아주 중요한 분이셔.” 등등의 말을 해오곤 했다. 그런데 마리의 말처럼 ‘중요하다, 은혜를 입다, 이런 말들로 고마움을 측정할 수 있을까?’ 마리는 또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나는 할머니에게 마음껏 고마움을 표현했을까? 고마운 마음을 충분하게 보였던가? 나는 정말로 할머니 가까이 있었나, 정말로 같이 있었나, 정말로 충실했나?’ 이 책을 펼쳐든 이들도 잠시나마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주 잠시라도.

미쉬카의 도움 요청을 받은 마리는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주말마다 뵈러 간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더 늙어가고, 단어를 잊어가는 모습들을 지켜보게 된다. 그 사이 사이에 마리와 미쉬카의 특별한 관계가 그려진다.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지금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의지하는 두 사람. 여기에 또 다른 이가 등장한다. 미쉬카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온 언어치료사 ‘제롬’이 바로 그 존재다. 그는 ‘말과 침묵, 말해지지 않은 것들과 일한다. 수치심과 비밀, 회한과 일한다. 부재와 사라진 기억들, 그리고 이름, 이미지, 향기를 거쳐 되돌아온 기억들과 일한다.’(126쪽) 제롬은 단어를 잊어가고 있지만 어느 노인보다 명민한 미쉬카를 눈여겨보고 그녀를 치료하면서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러는 사이 자신의 아픔까지 그녀에게 털어놓게 된다. <고마운 마음>은 이렇게 실어증에 걸린 미쉬카와 이 노인을 둘러싼 두 젊은이 ‘마리’와 ‘제롬’, 이 세 사람이 애정과 이해, 연민으로 얽히면서 고마움을 주고받는 관계의 한 모습을 세심하게 그려나간다.

한때는 보도사진을 찍고, 그 후로 신문사에서 교정교열자로 일하던 미쉬카. 누구보다 읽고 쓰기를 좋아하고 단어를 사랑한 미쉬카는 젊은 시절 도리스 레싱과 실비아 플러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책들을 읽었다. <르몽드>를 구독했고, 늘 신문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 자기로부터 빠져나가는 말, 단어들을 붙잡고자 애쓰지만 그것들은 그녀의 뜻을 쉽게도 저버린다. 그런 미쉬카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나의 노년은 어떠할까 하는 서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만일 단어 하나 뜻대로 원하는 대로 말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어떡하지? 그 절망감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이런 두려움이 덜컥 밀려온다.

이 책은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미쉬카라는 노인을 통해 노년의 삶, 늙음을 성찰하기도 한다. 마리가 요양원에서 발견한 삶은 어찌 보면 아이들 놀이방과 똑같다. ‘조그만 빨대가 달린 조그만 사과 주스, 그리고 조그만 비닐에 싸인 조그만 빵, 짧은 보폭, 깜박 졸기, 조그만 간식거리들, 짧은 외출들, 짧은 방문들. 작아지고 축소되었지만 완벽하게 규정된 삶’(40쪽). 마리는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면 그곳 사람들을 관찰한다. 가끔 그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아직도 누군가와 포옹을 하세요? 누군가 당신을 두 팔로 안아주나요?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피부가 당신의 피부 속으로 들어오는 접촉을 하지 않았나요?’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늙음, 내가 정말 늙은 때를 상상하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참기 힘든 생각은 누구도 나를 가까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신체적인 접촉이 조금씩 혹은 갑작스럽게 사그라드는 것.’(103쪽)이라고.

언어치료사 제롬은 미쉬카를 비롯한 요양원 노인들 모습에서 그들의 지나간 나날의 흔적을 찾기도 한다. 그는 그 과거의 흔적 찾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제롬이 복원하고자 하는 그 이미지들을 표현한 구절을 읽노라면 언젠가는 나 또한 지금 이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간 시절이 되어, 그 시절을 한없이 추억하는 때가, 추억으로만 마주하는 때가, 아니 그러다가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때가 찾아오겠지 싶어져서 서글퍼지기도 한다.


흐릿한 시선, 명확하지 못한 행동, 구부정하거나 아예 허리가 몹시 굽은 실루엣 뒤편에서 그들의 모습이었던 젊은 남자 혹은 젊은 여인의 모습을 나는 찾는다. 그들을 관찰하고 나면, 혼잣말이 나온다. 그녀도 그도 사랑했었겠지, 소리도 지르고, 즐기기도 하고, 물속에 들어가기도 했을 거고, 숨을 헐떡일 정도로 달리고, 계단 몇 개를 급히 올라가거나, 밤새 춤도 추었겠지. 그녀도, 그도 기차나 지하철을 탔을 테고, 시골길을 거닐거나, 산을 오르고, 포도주를 마시고, 늦잠을 자고, 끝도 없는 논쟁을 벌였겠지. 그런 생각이 나를 뒤흔든다. 나는 그런 이미지를 추적하고, 그 이미지를 복원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고마운 마음>, 48쪽)


누군가와 신체접촉도 사라지고 허리가 몹시 구부정한 실루엣으로 그저 과거가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삶. 노년의 삶이란 누구에게나 그러할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미쉬카의 말처럼 “전부, 후진하는..... 후회하는 것을 모두, 나중에, 사람들이 죽고 나서, 휴........ 그런 거죠.”(66쪽) 그렇게 되는 삶. 그러므로 그녀가 이야기하듯이 모든 것을 가슴속에만 담아두고 살 수는 없다. 그런 삶은 나중에는 ‘악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표현할 수 있을 때 말로 표현하는 것, 그것만큼 이 짧은 생에서 쉬우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행동도 드물리라. 매번 우리는 언젠가는 이야기할 수 있을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갑자기 너무나 늦어버린다. “보여주기만 하면, 과장스러운 몸짓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말해야만 한다. 표현해야만 한다. 당신이 있어서 고맙다고, 당신에게 빚졌다고, 그렇기에 이 책의 서문을 장식한 말 ‘산다는 것은 삶의 매 순간이 암흑 같은 바다 위를 비추는 금빛임을 아는 것이기에, 고마움을 말할 줄 아는 것이기에.’라는 글귀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착하고 다정한 책 <고마운 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선뜻 하지 못하는 그 말을 오늘 누군가에게는 꼭 건네고 싶어지게 한다.


“사면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관심을 갖고 보살폈어. 나 말고 다른 사람 말이야. 그게 모든 것을 바꾸더라. 알겠니, 마리야, 다른 사람 때문에 두려울 수 있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그래도 그건 정말 큰 행운이란다.” (<고마운 마음>,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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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03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만 봤으면 저는 그냥 지나쳤을 책인데 잠자냥 님의 이 글 덕에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문득, 제 조카 생각도 나고요. 이 어린 조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저는 노인이 될텐데, 그때 조카는 저에게 어떤 마음을 갖게 될지, 어떤 시선으로 저를 보게될지 말입니다. 나이들어 버린 여성에게 연대의 마음을 가져줄까요? 물론 저는 아이의 이모이긴 하지만, 또 늙은 여자이기도 할텐데, 젊은 여성으로서 나이들어가는 여성을 보며 연대해줄것인가...

게다가 저에게도 노년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깨달음 때문에 어쩐지 좀 마음이 아프기도 해요. 늙어가는 건 자연스러운건데 왜 자꾸만 뒤로 미루고만 싶을까요. 지금보다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도 모든 능력이 퇴화할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두려워요. 이 글 읽으니까 두렵기도 하면서 또 그리움도 불쑥 찾아오네요. 휴우-

잠자냥 2020-06-03 14:52   좋아요 0 | URL
저 또한 이 시리즈 <충실한 마음> <고마운 마음> 둘 다 제목만 보고는 걍 지나쳤던 책인데요. 어쩌다 보니 2개 다 읽었네요. 읽었을 때마다 두 작품 다 뭔가 뭉클한 게 있었어요. <고마운 마음>은 노안이 되어가고 있는 책 좋아하는 우리들이(응?) 읽으면 뭔가 더 공감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아요. 젊은 여성과 노인이 된 여성의 연대 이야기라 더 좋았기도 하고요.

휴... 늙는 거 참 무서워요; 이 책 읽으면 더.... 흐흑 ㅠㅠ 건강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