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를 보면 몇 년 뒤에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정식으로 국어사전에 오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나라 언론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했지만, 코로나 관련 쏟아지는 기사만 보면 언론사는 물론 이 땅의 기자들도 진심으로 그 자질이 의심스럽다. 한국 언론인 중에 ‘기레기’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를 읽다 보면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 이런 기자들은 왜 없는 걸까 싶어져 한숨이 밀려온다. 이 시리즈가 지금까지 다룬 인물로는 헤밍웨이, 조지 오웰, 마르크스가 있다.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이 시리즈를 좋아하고 아꼈던 나로서는, 시리즈가 새로 발간될 때마다 다음에는 어떤 작가가 기자로서의 모습이 부각될까 기대하곤 했다.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들이 누가 있지? 생각하며 다음 권에 소개될 이를 마음속으로 점찍어 보기도 했다. 이 시리즈의 3권이자 마지막으로(여기서 멈춘다니 안타깝다!) 소개된 이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세 번째 주인공이 마르크스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조금 놀랐다.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에 비해 뜻밖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에서 일한 이력도 있고, <뉴욕 데일리 트리뷴> 유럽 특파원 자격으로 10여 동안 유럽 정세에 관한 보고를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널리스트’로서 마르크스의 모습이 조금 낯선 까닭은 아마도 그가 사상가로서 아주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탓일 것이다. 실제로 이 책, <더 저널리스트:카를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 온 마르크스의 이미지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가 언론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질적 이해관계에 눈을 뜨고 현실 문제들을 인식, 저널리즘 같은 결과물을 통해 어떤 과정으로 그의 사상을 구체화해 나갔는지를 좇는다.
이 책에 실린 17편의 기사들을 읽노라면 자본주의의 폐해와 자본가 계급의 이중성을 고발하며 노동자 계층과 서민의 삶을 다루고 알리는 데 주력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는 ‘팩트’에 매우 충실한 기사를 썼다는 점이다. 그가 쓴 기사들은 하나 같이 책, 보고서, 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한다. 주요 사건을 경제, 법철학 관점에서 논박하는데,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에 알맞은 통계와 자료를 열거하고 분석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나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데, 그가 쓴 기사들에서는 근거 없는 주장을 찾기 어렵다. 이른바 망상처럼 휘갈긴 기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실에 입각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풍자와 비판을 잃지 않는다. 때로는 날카롭고도 해학적인 비유에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도 한다.
소위 객관적이라는 부르주아 통계전문가들이 남들에게 이상주의자다 뭐다 떠드는 데, 따지고 보면 이 부르주아 낙천주의자들보다 더한 이상주의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25쪽)
노동자들이 ‘생활필수품’ 이상을 요구하거나 근면으로 얻은 수익을 ‘공유’하려 들 때,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적 경향을 띤다는 혐의를 받곤 한다. 식료품 가격이 정말로 ‘영원하고 완벽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관계있는 걸까? 1839년부터 1842년까지 계속해서 식료품 가격이 오르는 동안 임금은 기아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런데도 공장주들은 “임금은 식료품 가격과 연동되는 게 아니다. 불변의 수요공급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선데이타임스>는 “노동자들이 공손한 태도로 요청해야 그 요구가 수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공손한 태도가 대체 ‘불변의 수요공급법칙’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무역 도매상들이 커피 값을 올리겠다고 “공손한 태도로 요청”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노동자의 피와 땀이 여느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거래될 거라면 최소한 다른 상품과 동일한 기회라도 주여야 하는 게 아닐까? (83쪽)
공장주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목숨이나 팔다리를 지켜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일하다 잃은 팔과 다리에 대한 보상금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이 ‘움직이는 기계’들의 ‘마모 비용’을 어떻게 남에게 떠넘길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119쪽)
이런 논조의 기사들은 오늘날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다. 기자 자신도 노동자일 텐데 그 누구도 노동자 편에서 기사를 쓰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기득권이나 권력층에 맞설만한 저항 정신을 지닌 기자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니 하나 같이 언론사에서, 윗선에서 내려주는 지침에 따라 받아쓰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모자라 조회수에 눈이 먼 자극적인 헤드라인 뽑기, 사실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아님 말고’식의 저질 기사들이 난무한다.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에서 다룬 인물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마르크스는 적어도 기득권의 편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서 진실을 좇고 그것을 폭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라인신문> 편집장 시절 마르크스는 정부 검열과 싸워가며 비판을 실었으나, 주주들의 안일한 대처에 실망해 편집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때 그는 “정부의 위선과 어리석음, 원칙 없음에 질렸고, 신문사가 아첨하고 몸을 사리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조심을 떠는 데 질렸다”고 말했다. 오늘날 이 땅에 이런 저널리스트가 있을까?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착각하는 기자들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추종하는 권력이나 이념에 부응하는 쓰레기 같은 기사나 양산할 뿐이지 않은가.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는 이 나라 ‘기레기’ 책상마다 3권 세트를 모두 놓아주고 싶은 심정인데, 솔직히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낄만한 언론인이 얼마나 될까,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떤 사회가 계층 간 반목의 토대 위에 서 있는데, 그 사회에서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착취 구조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전쟁을 치러야 한다. 파업과 연대의 진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파업과 연대를 통한 경제적 이득이 겉보기에 그리 크지 않다는 점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정신적 정치적 성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현대 산업은 주기적으로 불경기와 호황, 경기 과열, 위기 빈곤기의 큰 흐름을 반복한다. 그 결과 임금이 오르내리고, 임금과 이윤의 변동에 따라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계속된 투쟁이 벌어진다. 이렇게 큰 흐름이 반복되는 과정이 없다면 영국과 유럽 전역의 노동 계층은 기력이나 의지를 잃고 저항할 줄 모르는 집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자기 해방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노예의 경우처럼 불가능해질 것이다. (6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