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ff 시리즈 5
베릴 베인브리지 지음, 채세진 옮김 / 꿈꾼문고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회사를 다니며 노동자로 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야유회를 가거나, 단체로 등산을 가거나, 1박 2일로 워크숍을 떠나거나, 그도 아니면 체육대회를 한다든가 등등.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이 땅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이들 중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일을 끔찍이 싫어하는 나만해도 지금까지 회사 생활을 하며 저 모든 것들을 경험해봤으니, 참 대단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사에서 벌이는 행사를 끔찍이 싫어하지만 모든 직원들이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야유회, 체육대회, 워크숍을 좋아하기도 한다. 믿을 수 없겠지만 실제로 그런 이들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가? 회식만 해도 그렇다. 다들 꺼리는 것 같지만 누군가는 고대한다. 회사 돈으로 맛있는 걸 먹고, 술을 마시고 워크숍이라 부르며 여행을 떠나고, 야유회를 가장해서 그날 하루 일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체육대회에서 공을 차고 먹고 마시고……. 혹시라도 사내에 누군가 마음에 둔 이라도 있다면, 그런 자리를 틈타 관계 발전을 꾀해 볼 수도 있으리라……. 이와 같은 기대를 안고 이런 행사를 기다리는 이들도 분명 있다.

그러나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의 그 텅 빈, 공허한 마음은 어찌할까. 야유회를 즐긴 이들의 얼굴에서조차 피로감은 지워낼 수가 없다. 잔치가 끝나고 돌아갈 무렵은 언제 다들 그렇게 웃고 떠들었냐는 듯이 황량하기 짝이 없다. 뒹구는 나무젓가락과 종이컵, 음식물이 잔뜩 묻은 일회용접시들, 술잔……. 널린 담배꽁초. 주고받았던 의미 없는 말들. 회사 로고와 행사 이름, 날짜가 박힌 볼품없는 기념품. 얼굴은 벌겋게 익고, 운동화에는 누렇게 먼지가 내려앉고, 그날 하루를 위해 차려 입었을 게 틀림없는 새 옷은 땀 냄새와 고기냄새가 불쾌하게 스며있다. 그렇게 돌아간 뒤에는 어제와 똑같은 노동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고용주 또는 상사와 어깨를 마주하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도 일개 사원, 한낱 노동자로서의 위치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그런 처지에 ‘야유’를 보내고 싶어질 뿐이다.

‘노동자 계급의 섬뜩한 비극을 묘사하는 심리소설로 유명’한 베릴 베인브리지의 <포도주병 공장 야유회>에는 바로 그런 모습이 신랄하게 그려진다. ‘프리다’와 ‘브렌다’ 두 여성은 포도주병 공장 노동자이다. 공장주인 ‘파가노티’가 이탈리아인이라 그런지 이 공장 노동자들은 거의 이탈리아계다. 거기에 이 두 영국 여성은 젠더와 국적 면에서 조금 이질적이다. ‘영국 백인 남성’이 아닌 아일랜드인이나, 여성, 이탈리아인들로 이루어진 이 공장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하층 노동자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나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이곳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파가노티 씨는 단순한 고용주를 넘어서 거의 그들을 ‘산악 지대의 메마른 경사지에서 구해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내려놓은 현명한 아버지이며 파드로네(주인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이들에게 직설적인 성격의 프리다는 말한다. 당신들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형편없는 급여를 받고 있는지 아느냐고. 그러나 그들에게 이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밀과 옥수수, 포도를 재배하던 소작농이었는데, 이제는 파가노티 씨 덕분에 얼마나 손쉽게 돈을 벌고 그때보다 편하게 사는가. 게다가 이제 곧 야유회도 간다. 저 두 명의 영국 여성들과 함께 말이다!

사실 이 야유회 제안은 프리다가 했다. 프리다는 같은 회사의 직원이자 파가노티 씨의 조카인 수습 매니저 ‘비토리오’를 짝사랑한다. 아니,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를 통해 어떻게든 이 비루한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꿈꾼다. 그와 어떻게 하면 엮일까 궁리중이다. 비토리오도 딱히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이 야유회는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리라. 운이 좋으면 야유회에서 사람들 무리를 살짝 벗어나 그의 손을 잡고 단둘이 산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테고, 또 더 운이 좋으면 그날 밤 비토리오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그러고 나서……. 아, 그런데 그러기에는 걸림돌이 있다. 거의 한방을 쓰는, 아니 한 침대를 쓰는 사이인 룸메이트 ‘브렌다’가 문제다. 저 답답한 인간 브렌다가 눈치 빠르게 방을 비워줘야 할 텐데!

어쩌다 룸메이트가 됐지만 브렌다와 프리다는 성격이 거의 정반대이다. 프리다가 건장한 체구만큼이나 직설적이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에너지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라면 브렌다는 프리다가 보기에 ‘타고난 피해자’이자 언제나 ‘화를 자초’하는 유형이다. 누구에게도 나쁜 소리를 하지 못하고, 싫다 좋다 표현도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답답하고 수동적이고 소심하고 내성적이기 짝이 없는 그런 성격이다. 남편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와 이렇게 공장 노동자로 살며, 프리다와 좁은 집에서 룸메이트로 지내는데, 그곳까지 브렌다의 시어머니는 찾아와서 소동을 피운다. 브렌다는 묵묵히 당한다. 심지어 공장에서는 유부남 ‘로시’에게 매일같이 성추행을 당하는데도 싫다고 말하지 못한다!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다. 때문에 프리다가 야유회를 고대하는 것과 달리 브렌다는 그 귀찮은 행사를 피하고만 싶다. 그곳에서 로시는 또 얼마나 몸을 비벼댈까, 생각만으로도 괴롭다.

이 작품은 거의 중반까지는 이렇게 프리다와 브렌다의 애증 섞인 관계를 묘사하며, 공장의 주변 인물을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그러면서 온갖 인물들이 벌이는 소소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독자를 낄낄 웃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특히 프리다와 브렌다가 서로를 갈구면서 주고받는 신랄한 대화가 웃음을 자아낸다. 둘의 관계는 얼핏 보기에는 그야말로 앙숙 같은데, 그러면서도 서로 나름대로 의지한다. 특히 프리다는 어떤 면에서는 브렌다의 보호자와도 같다. 브렌다가 로시에게 성추행당하는 사실을 알고는 그에게 가서 공장주에게 일러바치겠다고 협박하는 일도 프리다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중반까지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이 그러니까, 이 두 여성이 연대해서 공장 노동자로서의 어려운 삶을 잘 이겨내는 유쾌한 작품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중반 이후에 완전히 그 방향을 달리한다. 섬뜩할 정도이다. 그레이엄 그린이 이 작품을 일컬어 “충격적일만큼 우스우면서 공포스러운 소설”이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렇다. 바로 그날, 프리다가 그토록 고대했던 ‘야유회’를 기점으로 작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지면서 희극에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프리다처럼 야유회를 기다리던 몇몇 이들은 공장이 아닌, 밖으로 나가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한껏 즐기고 오면 뭔가 다른 삶, 그러니까 한결 끈끈해진 유대관계나, 자신이 마음에 둔 이성과 좀 더 은밀하게 관계 진전을 이루거나 등등 무언가 변화를 희망했을 텐데, 그 희망은 가차 없이 무너지고 남은 것은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신발과 피곤에 절은 저녁, 그리고 어제와 똑같은 내일이 있을 뿐이다.

10월의 야유회는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지만 겨울을 코앞에 둔, 춥고 바람이 부는 우중충한 날씨에 심지어 전화로 예약한 밴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자동차 몇 대에 나눠 타기로 하지만, 자동차가 좁아 그 모든 인원이 갈 수는 없다. 결국 몇몇 사람들은 떠나지도 못한다. 잔뜩 기대에 차 드레스를 입고 온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쓸모없게 된 미리 준비한 음식, 이른 새벽의 기대와 아침의 환멸’이 출발 전부터 그들을 휘감는다. 로시는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실망에 익숙하다고 말하며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그 말이 왠지 더 비극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처음 점찍은 장소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곳에 도착해 을씨년스러운 야유회가 시작된다. 그래, 그래도 괜찮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그 사건’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일’은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문장을 여러 번 다시 읽어야 했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모든 게 내 바람대로 공정하게 처리되기를 원했지만 그런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건’을 맞닥뜨린 인물 저마다의 태도를 이토록 날카롭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작품 전반부의 묘사가 그토록 생생하고 개성 넘쳤음을 깨닫게 된다. 야유회를 떠나기 전 프리다와 브렌다, 비토리오, 로시, 패트릭 등등이 빚어내는 소소한 사건들은 모두가 ‘그 사건’을 위해, 치밀하게 짜여 있던 것이다. 그 놀라운 구성에 진심으로 감탄하게 된다. 하다못해 ‘그 일’이 일어난 뒤 그들이 함께 동물원에 가는 설정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을 풍자하는 매우 상징적인 장치가 아닌가.

작품 시작 부분에 프리다와 브렌다가 나누는 대화들, 찻잔으로 점을 쳐 앞날을 볼 수 있다는 마리아가 들려준 이야기들- “키 큰 남자. 여행, 흰 드레스, 제복을 입은 남자들과 질주하는 말들, 육지와 바다로 긴 여행” 등등. 아무것도 아닌 듯한 말들이 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복선이었음을 알게 되고, 작가의 절묘한 솜씨에 여러 차례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 자체에 대한 감탄일 뿐이다. 책을 덮고 나면 삶의 비애감이, 그 씁쓸함이, 뒷맛이 매우 떨떠름한 와인을 마셨을 때처럼 입안에 껄끄럽게 남아 쉽게 가시지 않는다. 프리다가 ‘그저 다가올 좋은 시간의 모든 기쁨과 영광’만을 생각했던 그 야유회는 오직 ‘삶에 대한 채울 수 없는 목마름’(97쪽)만 남긴 채 끝나고 만다.

야유회 같은 행사가 끝나고 나면 뒷정리는 결국 그 잔치에 초대받은, 그래서 마치 환대받은 듯 착각에 빠지고, 삶의 환상을 잠시나마 품었던 노동자들의 몫이다. 뒹구는 쓰레기를 치우 일도, 그날의 피로감도 온전히 노동자들의 몫이다. 고용주는 차를 타고 유유히 빠져나갈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야유회 동안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의 꾸며진 기억을 안고 다시 일에 매달린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고 오히려 피로감에 삶은 더 무겁게만 느껴진다. 야유회 기념 날짜가 박힌 수건이 시간 흐른 뒤에는 걸레로 쓰이듯 너덜너덜해진 피로감만 그들에게 남는다. 프리다가 우스개처럼 부르던 그 노래는 그래서 너무나도 씁쓸하다. 생쥐는 잘도 빠져나가고 시궁창 같은 이 삶을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온전히 노동자 그들의 몫이므로. <포도주병 공장 야유회>는 그 뼈아픈 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거기에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네.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봐요.
아주 커다란 모자의 자그마한 여자는
그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네.
그녀는 일어나 극장을 떠났고
남자는 행복해졌네. 생쥐는 안 보였고. (<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261~262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나무 2019-12-16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마낫. 제목만 보고는 별관심이 없었는데 잠자냥님 리뷰보니 이건 꼭 읽어봐야겠다 싶어요.
요런 리뷰 써주신 잠자냥님께 감사를... ^^

잠자냥 2019-12-16 20:21   좋아요 2 | URL
이 작가 너무 뒤늦게 한국에 소개된 거 같아요~ 부커상 최종 후보에만 5번인가 올랐던 작가라고 하네요! 꼭 읽어보세요!

esprit 2019-12-16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정말 좋네요. 잠자냥 님 리뷰 읽고 한 번 더 읽고 싶어졌습니다.

잠자냥 2019-12-16 20:20   좋아요 1 | URL
네 이 작품 정말 좋았는데....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읽어서 또 다른 작품이 번역되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