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사람들 1 열린책들 세계문학 12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윤우섭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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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어서 실망했던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건대 한 번도 없었다. 장편이고 단편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미완성 작품이라는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를 읽었을 때도 나는 푹 빠졌고 마침내 감탄했다. 그래서 나는 책 읽기가 지루해지거나, 어떤 작품을 읽어도 좀처럼 흥미가 생기지 않을 때,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권태기가 찾아오면 그 탈출 방안으로 마치 약을 털어 넣듯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집어 든다. 이번에는 그래서 책꽂이에 얌전히 꽂혀서 읽어주기를 몇 년 째 기다리던 <상처받은 사람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독서 권태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명약이다. 이만큼 효과 빠른 약도 없다. <상처받은 사람들> 또한 그의 작품이 늘 그러했듯이 ‘지난해 3월 22일 저녁, 나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날 나는 셋방을 구하려고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녔다’는 첫 문장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나(이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제 막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젊은 소설가이다. 그는 셋방을 구하려고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아조르까라는 개 한 마리를 끌고 도시를 유령처럼 배회한다. 이 기이한 노인의 행적을 소설가적 눈으로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어쩌다 보니 아조르까의 죽음과, 그 죽음에 잇따라 비명횡사하는 노인의 죽음까지 목격하게 된다. 이반은 가족도 없이 쓸쓸히 죽은 이 노인의 장례를 치러주게 되고, 그의 유품을 정리하려고 노인이 살던 조그만 방을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방은 이반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글쓰기에 꼭 알맞은 그런 공간이었고, 그는 이 방을 빌려 기거하게 된다. 그렇게 지내던 중 한 소녀가 이반의 방을 찾아온다. 열세 살쯤 되는 이 소녀는 이반에게 할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아이는 죽은 노인 ‘스미트’의 손녀였던 것이다. 고아나 다름없는 이 불쌍한 소녀의 사정을 알게 된 이반은 소녀와 불편하고도 기이한 동거를 한동안 시작하게 된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반이 사랑하는 ‘나따샤’ 일가와 관련 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이반은 나따샤의 부모인 ‘이흐메네프’와 ‘안나’ 이 노부부가 아들처럼 키웠다. 그래서 나따샤와 이반의 약혼, 그리고 결혼은 어떻게 보면 예정된 순수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반에게는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따샤에게는 따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으니, 이흐메네프가 영지 관리인으로 있었던 ‘발꼬프스끼 공작’의 외아들, ‘알료사’가 그 대상이다. 공작 아들과 그 영지 관리인 딸의 사랑이니, 아무래도 신분 차이 때문에 그 사랑의 결실을 맺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발꼬프스끼 공작과 이흐메네프는 한때 더없이 진솔한 우정을 나눌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공작은 어느 날 갑자기 이흐메네프에게 횡령 혐의를 씌워 거액의 손해 배상을 청구하고 영지 관리인 자리에서도 쫓아낸다. 때문에 공작 집안과 나따샤 집안은 신분 차이를 떠나 원수와도 같은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나따샤는 알료사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못하고, 마침내 그와 함께 야반도주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때로는 이흐메네프와 안나 부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까지 들어줘야만 하는 이반.

그런데 이 두 개의 이야기, 즉 죽은 스미트 노인과 그의 손녀 딸 ‘엘레나’, 그리고 나따샤 집안과 알료사와 공작 집안의 이야기는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보는 내내 이 두 개의 이야기가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게 아닐까, 하면서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도스토예프스키의 큰 그림을 알아차리고는 놀라고 말았다(그래서 이 책의 1권, 2권 맨 앞에 나오는 ‘등장인물 소개’는 절대로 읽지 말아야 한다! 나는 대부분 등장인물 소개에 스포일러가 있음을 알고 있어서 인물 소개는 그냥 넘어가는 편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 두 개의 사건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게 된 뒤 등장인물 소개를 떡하니 펼쳐보니 어마어마한 스포일러를 그냥 대놓고 써놓았더라.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부디 등장인물 소개는 그냥 건너뛰시라!). 아무튼 이 글조차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 줄거리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에는 온갖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디 한 사람 상처받지 않은 이가 없다. 물론 그들은 때로는 그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 모든 사건의 묵묵하고 담담한 관찰자이자 서술자인 ‘나’, ‘이반’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여인인 나따샤로부터 상처받는다. 나따샤는 물론 그녀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반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 즉 알료사를 사랑함으로써 이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아니 생채기처럼 작은 상처일 리가 없다. 그저 이반이 그 고통을 표현하지 않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따샤는 다른 남자를 사랑해서 생기는 온갖 고통과 번민, 고뇌를 이반에게 털어놓는다. 이 또한 이반에게는 참으로 못할 짓이다. 그렇다고 나따샤가 오롯이 행복할까? 나따샤는 그녀대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불행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나따샤를 상처투성이로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알료사이다.

좋게 말해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지 이 인간은 정말 보는 내내 얼마나 한숨이 나오던지. 아버지인 발꼬프스끼 공작에게 가스라이팅(심리적 조종)을 당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진실로 사랑하는 여자가 누구인지도 분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이 유약한 인간은 나따샤는 물론 때로는 ‘까쨔’에게도 상처를 준다. 그러면서도 내내 헛된 약속을 함으로써 나따샤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알료사가 완전히 행복한 인간인가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이 순진무구한 인간 또한 아버지 발꼬프스키에 휘둘리면서 무엇 하나 자기 의지대로 실행하면서 살아가지 못한다. 아버지의 비열한 모습을 알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이기에 그렇지 않으리라 믿고 싶어 하고, 아버지가 비열한 인간이 아님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런 면에서 알료사 또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의 핏줄, 가족으로부터 내내 상처받는 인물이다.  


나따샤 또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료사와 달아남으로써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지만, 아버지인 이흐메네프 또한 그런 딸을 사랑하면서도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딸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해서 또 다시 상처를 주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의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된 자기만이 아집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데, 이는 죽은 노인 스미트와 그의 손녀 엘레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복잡한 인물들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악덕을 부리면서도 상처받지 않는 인물은 공작이 유일하다. 그는 인간의 덕행을 조롱하는 인물로 ‘모든 인간 덕행의 토대 위에 한없는 이기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어떤 행위가 선행일수록, 거기에는 더 큰 이기심이 깃들어’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사랑하라’를 삶의 모토로 삼고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데 온 생을 바친다. 그는 이상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그것을 결코 동경한 적도 없다. 이상 없이도 세상을 유쾌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이상 따위보다는 ‘영향력 있는 위치, 관등, 호텔, 판돈이 큰 카드놀이, 그 무엇보다도 여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때문에 그는 애초부터 덕행을 지닌 인물인 이흐메네프와 그의 딸 나따샤의 너그러움 등을 조롱하기 위해 오히려 더 악덕을 행하는 자는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나따샤를 비롯해 이흐메네프는 덕을 지니고 그 선함을 실행하는 인물로서 공작 자신에게는 없는 그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공작은 이런 인물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상처 줌으로써, 그들의 덕행을 짓밟는 데서 쾌감을 얻는다. 단지 자기의 욕망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덕을 조롱하고 비웃는 악한, 그가 바로 공작이다.

그는 이흐메데프와의 관계에서 자기들 소송과 다툼의 본질은 ‘당시 서로 주고받은 모욕, 한마디로 서로 상처받은 자존심’ 있다고 말한다. 1만 루블 따위는 그에게는 시시한 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이흐메데프로부터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까닭은, 그에게 없는 덕을 한낱 영지 관리인인, 자기보다 열등한 인물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발꼬프스키 공작은 스스로 자신이 진정한 ‘러시아적 존재이자 애국자’라고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덕행과 선함을 비웃고 조롱하는, 그러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끝까지 승승장구하는 이 러시아적 인물, 공작을 전형으로 삼아 19세기 중엽 뻬쩨르부르그 상류층의 이중적 삶과 그들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하층민의 비극적인 삶을 날카롭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죽은 노인 스미트의 손녀인 엘레나라는 인물의 창조가 아닐까. 이 어린 소녀의 때로는 병적으로 보일 정도의 특이한 성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여러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신경증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인물 유형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소녀가 어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강박과도 같은 자기혐오, 자기비하, 결핍에서 비롯된 두려움, 불안, 도덕적 결벽증 등등이 모두 자기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인들의 어긋난 관계, 그로 인해 싹튼 ‘상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가련하고도 안타까운 인물이다. 엘레나는 성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적을 용서해야 한다’는 구절을 읽었노라 고백한다. 그러나 성서에 쓰여 있는 것과 달리 현실 속 인간관계에서 용서란 얼마나 덧없는가. 진정한 용서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많은 문학 작품에서 온갖 인물들의 갈등과 우여곡절 끝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한다. 그러면서 대단원을 장식한다. 그러나 정말 이 현실에서도 진실로 상처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까? 이 작품에서는 “배부른 자는 배고픈 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배고픈 자도 배고픈 자를 언제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 개개인의 상처의 깊이는 제아무리 상처받은 영혼이라도 또 다른 상처받은 이의 영혼을 달래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언제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 깊숙이 상처받은 사람에게 용서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상처받은 사람들>은 여실히 보여준다.

<상처받은 사람들> 2권에서는 이 가련한 소녀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데, 1권 끝 부분에서 2권의 내용을 암시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폭풍 같은 글 솜씨에는 정말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소개하는 글로 가장 알맞을 것 같아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은 삭제하고 옮겨본다. 



나는 이 무서운 이야기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주된 이야기는 훨씬 후에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이야기다. (.....)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를 벌써 이해하며, 평탄하고 걱정 없는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은 도달하지 못하는 성숙도를 보이는 손녀 사이의 비밀스럽고 거의 이해 불가능한 관계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울한 이야기이다. 아주 빈번히, 눈에 띄지 않게, 거의 비밀스럽게 빼쩨르부르그의 무거운 하늘 아래서, 거대한 도시의 어둡고 감추어진 골목길에서,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삶, 둔중한 이기주의,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 음울한 방종, 비밀스러운 범죄의 한가운데서, 이 모든 무의미하고 비정상적인 삼으로 가득 찬 끔찍한 지옥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음울하고 괴로운 이야기 중의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계속된다. (1권, 290~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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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0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을 때는 인물소개를 반드시!! 건너뛰겠습니다!!

잠자냥 2019-10-04 15:56   좋아요 0 | URL
네 절대 읽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