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조르주 페렉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 그의 몇몇 작품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 혹시 천재는 아닐까. 그때 내가 읽었던 책들은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처럼 주로 그의 소설들이었다. 그 후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페렉 선집의 몇몇 작품을 읽으면서 그 확신을 굳혔다. 그래, 페렉은 천재가 맞다, 맞아. 그런데, 그냥 똑똑하기만 한 천재가 아니라 삶의 애수와 슬픔을 아는 그런 천재.

최근 출간된 <공간의 종류들>을 읽다가 나는 또 한 번 그런 생각 속에서 감탄했다.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도, 사라져가는 것들, 쉽게 잊힐 것들, 하지만 한 때 나를, 당신을, 아니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이토록 애수에 젖은 눈빛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지나치고 말았을 대상을 기발한 생각과 시선으로 바라보고 의심하고, 기록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그것들을 우리 주변에 새로이 불러오는 것일까. 페렉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으리라.

<공간의 종류들>에서 페렉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공간’- 그 흔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해 글쓰기를 시도한다. 페렉이 말하듯 그곳은, 어쨌든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곳’이다. ‘아무것도 아닌 곳, 만질 수 없는 곳, 실제로 비물질적인 곳, 넓이를 갖는 곳, 외부에 있는 곳, 우리 외부에 있는 곳, 우리가 이동해가는 도중에 있는 곳, 주위 환경, 주변 공간.’.......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공간에 대해 그렇게 쓸 이야기가 많은가? 대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까? 그러나 페렉의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아무것도 아닌 듯한, 그 ‘공간’이라는 대상에 대해 페렉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하고, 분류하고, 기록하고, 상상하며 써 내려간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써내려갔듯이 페렉은 ‘잃어버린 공간’ 아니, 너무나도 무심해서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를 둘러싼 그 ‘공간’을 이야기한다. 페렉이 보기에 공간은 ‘시간보다 더 길들여진 듯, 혹은 덜 위험한 듯’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손목시계를 찬 사람들을 마주쳐도, 나침반을 지닌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알고자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결코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 있거나, 사무실에 있거나, 지하철 안에 있거나, 거리에 있다. 이것은 물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분명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페렉은 질문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어린 시절 나는 형제가 많은 탓에 온전한 나만의 방을 소유한 적이 없었다. 늘 언니와 함께 방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 나만의 공간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대개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전집류 책을 잔뜩 꺼내서 집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기를 좋아했다. 책으로 쌓기 힘들면 책상 아래로 들어간다. 책상 위에는 얇은 홑이불을 올려서 늘어뜨려 마치 텐트를 치듯이 해놓고, 책상 안, 정확히 말하자면 책상에 앉을 때 의자와 다리가 들어가는 그 옴폭한 부분에 쏘옥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작은 공간은 오롯이 나만의 작은 세계가 된다. 그곳에서 나는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공상에 잠긴다. 그러면 그 작은 공간은 어느덧 상상으로 지어올린 온 세계가 된다. 그런데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책으로 만든 집, 또는 책상으로 만든 집은 지금의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세계이다.

페렉은 그런 공간을 불러온다. “나는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글을 쓴다.”는 앙리 미쇼의 말을 인용하면서 페렉의 공간은 뜻밖에도 ‘페이지’부터 시작한다. ‘행 하나가 꽤 정확하게 수평적으로 흰 종이에 놓이고, 순결한 공간을 검게 물들이며, 그곳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을 매개 공간으로 만든다.’ 그러고 나서 그 공간은 침대, 방, 아파트, 문, 계단, 건물, 거리, 구역, 도시, 시골, 나라, 국경, 유럽, 세계로 뻗어나간다. 페렉이 파리에서 살았거나 혹은 그의 특별한 기억들이 얽혀 있는 장소들이 그려지기도 하는데, 그는 이런 일을 함으로써 ‘삼중의 낡음에 대한 흔적’을 기대한다. ‘장소 그 자체의 낡음, 내 기억들의 낡음. 나의 글쓰기의 낡음.’ (90~91쪽) 페렉의 사유의 흔적은 파편적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우면서도 읽는 이의 공감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내 침대를 좋아한다. 이 년 조금 넘게 써온 침대다. 나는 내 침대가 좋다. 침대에 누워 쉬면서 평온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천장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천장을 절망적인 직선으로 만들거나, 혹은 더 나쁘게는 소위 노출형 들보들로 우스꽝스럽게 꾸민다. (35쪽)

방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장소에 산다는 것이, 그 장소를 제 것으로 삼는다는 말일까? 장소를 제 것으로 삼는다는 건 무슨 말인가? 언제부터 장소는 진정으로 당신 것이 되는가? 분홍색 대야에 양말 세 켤레를 넣어 물에 담갔을 때일까? 휴대용 가스버너로 스파게티를 다시 데우게 되었을 때일까? 그곳에서 기다림의 고통, 열정의 흥분상태, 혹은 극심한 치통이 주는 고문을 경험했을 때일까? 취향에 따라 창문에 커튼을 달고 벽지를 바르고 마루에 광을 냈을 때일까? (46쪽)

문-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 벽을 쌓는다. 문은 가로막고 갈라놓는다. 문은 공간을 깨뜨리고, 나누며 상호침투를 막고, 분할을 강요한다. 한편에는 나와 나의 집. 사생활, 가정(내 침대, 내 양탄자, 내 탁자, 내 타자기, 내 책들.... 같은 나의 소유물들로 꽉 채워진 공간)이 있고, 다른 편에는 타인들, 세상, 일반인들, 정치가가 있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스며들듯 건너갈 수 없으며, 이 방향이든, 저 방향이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그냥 통과할 수 없다. 비밀번호가 필요하며, 문턱을 넘어야 하고, 식별표지를 보여줘야만 하며, 죄수가 외부와 소통하듯 소통해야만 한다. (63쪽)

나는 시골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시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영일 뿐이다. (113쪽)

여행에 대한 놀라움과 실망. 거리를 정복했다는, 시간을 지웠다는 환상. 멀리 떨어져 있기. (129쪽)


페렉은 왜 이토록 ‘공간’에 집착했을까? 그의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하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는 쿵 하고 작은 파도가 인다. 페렉은 ‘안정되고, 고정되고 범할 수 없고, 손대지 않았고 또 거의 손댈 수 없고, 변함없고, 뿌리깊은 장소’들이 존재하기를 바랐다. ‘나의 고향, 내 가족의 요람, 내가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집, 내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는(내가 태어난 날 아버지가 심었을지도 모르는) 나무, 온전한 추억들로 채워져 있는 내 어린 시절의 다락방’과도 같은 그런 공간들. 그러나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그런 곳들 기록해야 하는 의무를 느낀다. 공간은 부서지기 쉽고, 시간이 그것들을 닳게 하고 파괴할 것이다. ‘공간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라진다. 시간은 공간을 데려가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남겨놓는다. 그래서 그는 글로 기록해둠으로써 그의 기억들이 그를 배반하는 일을 막고자 안간힘을 쓴다.

페렉이 생각하기에 ‘우리는 보는 법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이한 것, 특별한 것, 비참할 정도로 예외적인 것만을 기록하려고 한다. 하지만 페렉은 거의 어리석을 정도로 더 천천히 접근해서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분명한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적기 위해 노력한다. ‘더 평범하게 보도록 다짐’한다.(84쪽)- 왜냐하면 그런 것들일수록 더욱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이 글쓰기는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는 행위이자,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는 행위인 것이다.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페렉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부모를 잃었다. 유대인으로서 겪은 어두운 유년의 경험은 페렉의 몇몇 작품, 특히 자전적 작품인 <W 또는 유년의 기억>에서 잘 드러난다. 외롭고 쓸쓸했을 유년 시절, 그가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을지 낱낱이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은 그 마음을 헤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공간의 종류들>에 인용된 한 구절인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시체소각로를 초록 띠로 장식하기 위한 식물 채집’은 그저 무심히 넘길 수만은 없다. 아니,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이 책의 큰 비밀이 풀리는 듯해 가슴이 먹먹해져 오기까지 한다.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를 채워가면서 공간을 채우고 있었을 어린 페렉,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보며 공상을 즐겼을 어린 페렉, 온전한 추억들로 가득한 다락방 속의 어린 페렉...... ‘안정되고, 고정되고 범할 수 없고, 손대지 않았고, 변함없고, 뿌리깊은 장소’들이 존재하기를 바랐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유년을 살았던 페렉. 그런 한 인간의 글쓰기를 통한 영원한 기억과 복원- 그것이 바로 <공간의 종류들>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공간’을 집요하게 기록한 에세이로만 읽히지 않는다. 잃어버린 유년 또는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그 불안정한 삶의 형태를 기록해두고자 하는 인간의 절박한 몸짓으로 읽혀 가슴 깊이 남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9-09-2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필 처음 읽은 페렉이 <인생 사용법>이었는데요, 이 인간은 장편소설을 써도 열댓 권을 쓸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왜 한 권의 작품만을 만들었을까가 굉장히 궁금했었습니다.
잠자냥 님 쓰신 글을 읽어보니, 잃어버린 공간.... 흠... 깊이 공감이 되는군요. ^^

잠자냥 2019-09-25 00:31   좋아요 0 | URL
<인생 사용법>은 전 아껴두느라 아직(아니 실은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아서 ㅎㅎ) 못 읽었는데요, 이제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간의 종류들> 이 책은 에세이에 속하는 터라 폴스타프 님께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기는 뭣하지만.... 폴스타프 님의 잃어버린 공간에 대한 에세이는 왠지 기대가 되네요. ㅎㅎㅎ 페렉과 달리 어쩐지 장르는 생활 개그일 것 같습니다만 ㅋㅋㅋ

2019-10-04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4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