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2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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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의 <카시지>는 한 소녀가 사라지면서 시작한다. 소녀는 말한다.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사라진 이유였다. 열아홉 살, 내 인생을 주사위처럼 던진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크레시다’라는 소녀가 스스로 집을 가출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왜 소녀는 가출을 했을까, 그녀의 말처럼 가족들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았기에 집을 나간 것일까? 소녀에게, 그리고 그 가족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런데 이윽고 이 소녀가 ‘실종’됐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사라짐이 단순 가출이 아니라 ‘실종’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어떤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 아니나다를까, 크레시다가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남자가 있었음이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남자는 실종된 소녀의 언니 ‘줄리엣’의 약혼자였던 ‘브렛 킨케이드’이다. 지금은 파혼한, 한때 약혼자였던 남자. 그는 이라크전쟁에서 부상당한 뒤로 몸이 망가졌고, ‘외상에 의한 뇌손상’으로 기억마저 명료하지 못하다. 그런 상태에서 소녀가 사라진 숲속에서 술이 떡이 된 채 발견된다. 그의 셔츠와 지프에는 크레시다의 핏자국이, 지프에서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발견된다. 크레시다를 찾는 대규모 수색이 펼쳐지지만, 소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시신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증거는 브렛이 범인이라고, 살해범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정말 브렛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동생을 강간하고 죽였을까? 만일 그랬다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소녀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한 것일까?

그러나 시작 부분에서 크레시다는 분명 사랑받지 못해서 사라졌다고, 주사위처럼 인생을 던졌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녀는 살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브렛과 함께 차를 타고 숲속으로 들어간 뒤에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을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도 왠지 수상쩍다. 크레시다의 가족,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 ‘제노’와 엄마 ‘아를렛’, 그리고 언니 ‘줄리엣’. 한없이 부유하고 행복해 보이는 이 ‘메이필드’ 가족에게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었기에 둘째 딸은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을까? 그 비밀이 궁금해서 책장은 멈추지 않고 넘어간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메이필드 집안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들은 겉으로는 완벽해 보인다. 그런데 두 딸의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영리하고 버릇없는 작은 딸 크레시다와 얌전하고 예쁜 큰딸 줄리엣. 제노와 아를렛에게 둘째 딸 ‘크레시다’는 이름처럼 평범하지 않은 자식이다. ‘사랑하기 수월한 자식이 있고, 사랑하려면 노력이 필요한 자식’이 있는데 크레시다는 후자에 속했다. 줄리엣처럼 빛나는 자식들이 있다. 순수하고 그늘진 데 없고, 행복한. 그러나 모든 자식이 그럴 수는 없는 모양이다. 크레시다처럼 까다로운 자식들도 있다. 뱃속에서부터 그랬던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데 이골이 난. 더욱이 크레시다는 초등학생 때 ‘자폐증’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아스퍼거증후군’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더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카시지에서 메이필드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줄리엣은 예쁜 아이로, 크레시다는 똑똑한 아이로 본다. 그런데 크레시다는 그것이 싫다. 자기 또한 예쁜 아이이고 싶다, 병을 앓는 아이를 향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진짜 사랑을 받고 싶다. 언니처럼! 그래서 가족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크레시다는 자신의 존재를 카시지에서 지워낸 것일까? 그런데 그토록 오랫동안 이 소녀가 사라지는 일이 가능할까?

더욱이 언니의 약혼자 ‘브렛 킨케이드’는 독자가 보기에도 조금 수상쩍다. 뇌손상으로 기억이 불분명한 그, 술에 취해 크레시다를 태우고 인적 없는 호숫가로 차를 몰았던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게 분명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리고 이라크에서 돌아온 브렛을 시종일관 괴롭히는 그 기억은 크레시다의 실종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카시지>는 초반부터 책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사실 목차를 보면 1부 제목이 ‘사라진 소녀’이고, 2부는 ‘도피’ 3부 ‘귀환’이다. 때문에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소제목들만 보고도 사라진 소녀가 결국에는 제 발로 돌아올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라졌던 이유와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파문의 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가볍지 않다.

오츠는 1부에서 먼저 브렛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라크전쟁의 한 단면, 그것도 아주 어두운 단면을 폭로한다. 지금까지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은 주로 1차,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한국전쟁 또는 걸프전 등을 다뤄왔다. 그 정도가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벌어진 전쟁이었는데, <카시지>에서는 이라크전쟁이 등장한다. 솔직히 나는, 대개 고전문학 위주로 구성된 ‘세계문학전집’에서 이라크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오츠와 이 작품은 현대적이다. 브렛이 전쟁터로 향하는 동기도 과거의 전쟁과는 사뭇 다르다. 기존의 문학 작품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이들은 대개 자기의 선택이 아니었다. 징병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갔으나 이라크전쟁을 ‘선택’하는 브렛은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딸의 약혼자가 자원입대하는 것에 제노는 그래서 회의적이다. 베트남전쟁 후반 냉소적인 시기를 보낸 그로서는 브렛처럼 현명한 청년이 자원입대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징병된 것도 아닌데 왜! 미친 짓이었다. 브렛은 조국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누구의 조국인가? 정치 지도자들의 아들딸들은 아무도 자원입대하지 않았고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들도 그랬다. 2002년에 이미 사람들은 전쟁에 나갈 사람들이 미국 하층민이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국방부도 이를 파악했다. 브렛은 하층민 출신이었고, 전쟁터로 나아가 뭔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창피하게도 브렛은 훈장을 받고 싶었다. 가진 것이 없었던 그가 훈장을 받아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상냥하고 순진한 약혼녀와 카시지 전체가 감동하고, 톰 크루즈처럼 제복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놀랄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터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온갖 만행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돌아온다. ‘달리는 트럭 뒤에서 쓰레기 버리듯 군에서 내처져 불구의 몸으로 되돌아왔을 때’(200쪽). 그를 기다린 것은 더 이상 장밋빛으로 아름다운 미래가 아니다. 파혼, 장애, 약물복용, 알코올 중독 등이 그의 인생에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지속적인 경찰 감시를 받는 장애를 가진 이라크전쟁 참전용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불분명한 기억 때문에 약혼녀의 동생을 살해한 사람으로 지목받기에 이른다. 브렛은 그의 말처럼 전쟁터에서 죽는 게 나았다.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제 너무 늦어버렸다. 그는 이라크에서 살해됐지만 죽지 않았다. 브렛은 왜 자신이 크레시다를 해쳤다고 생각할까? 기억하지는 못하면서도 왜 자신이 크레시다를 죽였다고 말하는 것일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약혼녀 동생이었던, 순진한 소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일까? 그래서 오츠는 브렛을 통해 광기어린 전쟁, 그 부도덕한 악을 고발하는 것일까?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상상하든 당신의 예상은 또 쉽게 빗나간다.

1부 ‘사라진 소녀’가 크레시다와 브렛을 통해 단편적으로는 전쟁의 부도덕함을 고발하고 있다면 2부는 그보다 더 큰 악, 일상에 만연하는 폭력을 고발한다. 2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와 논조로 시작한다. 대학 교수이자 연구원인 한 남자와 그의 연구를 돕는 ‘새버스 맥스웨인’이라는 인턴이 등장한다. 이 연구원은 현재는 ‘힌턴’ 박사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맥스웨인 관찰 끝에 힌턴 박사 또한 가명이며, 지금 그가 하는 연구 또한 세상의 악을 폭로하는 일 중의 하나임을 알게 된다. 그는 사회공공기관의 부패와 비리를 취재하고 고발하는 데, 이번에 그들이 조사하는 대상은 교도소 시스템과 형사사건 재심제도인 ‘이노센트 프로젝트’, 그리고 사형제도이다. 그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중범죄자 교도소에 견학팀으로 위장해 참가한다. 이 연구원의 눈을 통해 오츠는 국가의 형벌 시스템이 작동하는 현장을 탐색하고, 구속과 사형 제도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한편 이 수수께끼 같은 연구원은 자신을 숨긴 채 이제까지 동물권 및 환경단체, 좌파활동조직가, '국경없는여성들' 같은 여성운동단체에 상당액을 기부해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잠입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수치! 당신의 (불)명예)>라는 책으로 썼고 이 책은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상태이다. ‘이노센트 프로젝트’는 또 다른 ‘수치’시리즈의 등장을 예고한다. 그는 이렇게 끊임없이 사회의 환부, 이 세상의 '수치'에 메스를 들이 댄다. 그리고 오츠는 이 연구원을 통해 ‘너무도 많은 이 시대의 악’ ‘백악관과 국방부뿐만 아니라 법원에까지 뻗쳐 똥칠이 된 천장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미국의 악, 부도덕한 미국의 실상을 까발린다.

1부와 2부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3부 ‘귀환’은? 3부에서는 누구나 예상하듯이 크레시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그려지고, 그 과정에서 마침내 그녀가 스스로 사라졌던 이유가 밝혀진다. 그런데 이 비밀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대부분은 그녀를 향한 분노랄까, 비난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AIDS, HIV에 감염되는 것처럼, 접촉하는 사람들을 감염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게 악의 본성’(257쪽)이라고 말하는데, 3부에 이르면 과연 누가 악이고 선일지, 크레시다의 이 죄는 용서받을 수 있을 성질의 것일지 혼란스러워진다. 크레시다는 삶을 누려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런 유폐된 삶은 자초한 게 아니었을까? 크레시다는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지,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패배감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모두 대단하고 기발하고 독창적이지만 깊이와 감정은 없는, 자신이 즐겨 그리던 그림과 비슷했다는 그녀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건 아닐까. 3부를 읽다보면 이언 매큐언의 <속죄>가 생각나기도 한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불러온 폭풍처럼, 누군가의 무심한 몸짓, 비밀, 오해 등 전혀 사소했던 그 사건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삶을 파멸로 몰아갔으니 말이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자기 스스로도 구원받지 못한 가련한 인간. 그의 참혹한 비밀 앞에서 이해하고 공감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없이 나약한 인간과 그런 결함에서 비롯된 이기주의,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얽히고설키며 빚어내는 세상의 악.... 책을 덮고도 한동안 이 복잡한 기분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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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7-3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못견디는 내용의 소설일 것 같아, 선뜻 읽을 엄두는 안나는데, 크레시다가 저지른 죄가 너무 궁금해서 언젠가 읽어볼 것 같긴 하네요. 오늘도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비오지만 산뜻한 하루 보내셔요.

잠자냥 2019-07-31 13:00   좋아요 1 | URL
그래도 오츠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무시무시하게 끔찍한 편은 아니에요. 하하하하.^^;; 점심 맛있게 드세요~

2019-08-05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5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