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마리아, 마틸다 세 여성의 이름이 보인다. 저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그녀들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메리’와 ‘마리아’는 더욱 그렇다. 그 둘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차별받으며 자랐고, 원하지 않는 결혼으로 구속받고, 둘 모두 남편이 아닌 동성 친구로부터 위안을 얻고 그 안에서 탈출구를 모색한다. ‘마틸다’는 조금 다른 삶을 살지만 여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 살아가기에는 그녀가 처한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 <메리>와 <마리아 : 여성의 고난>은 페미니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작품이며, <마틸다>는 <프랑켄슈타인>으로 널리 알려진 ‘메리 셸리’의 미발표작으로, 그녀는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다. 어머니와 딸이 쓴 페미니즘 작품이 나란히 한 권으로 엮어 나온 것이다. 세 작품 모두 어떤 면에서는 현재 읽어도 급진적이다. 그러니 울스턴크래프트와 셸리가 살았던 18~19세기 영국에서 이 두 여성의 작품이 얼마나 급진적으로 읽혔을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메리>와 <마리아 : 여성의 고난>을 집필한 몇 년 뒤에 발표한 글로, <메리>와 <마리아>에서 윤곽이 잡혔던 그녀의 생각이 확고하고도 더 명료한 언어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여성의 권리 옹호>와 <메리>, <마리아 : 여성의 고난>은 유기적으로 관련 있으며 울스턴크래프트 사상의 집약과도 같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그녀는 여성에 대한 그 시절 편견들을 면밀히 검토, 이러한 편견이 만들어지는 체계를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생각하기에 여성을 ‘순수하고 나약하며 매력적인 존재’로 보는 기존 견해들은 결국 여성의 이성을 억눌러 권위에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때문에 그녀는 여성도 이성과 미덕을 가진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시 여성들이 곧잘 저지르는 오류를 지적하는 일도 망설이지 않는다. 여성들이 점성술사나 최면술사에게 쉽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울스턴크래프트는 그 시절 여성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이 여성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이나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지위 탓임을 또 한번 언급하면서 여성들이 인간 존엄의 근거인 이성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남성들은 자기 정부(情婦)에게는 노예처럼 굴면서 여동생들과 아내, 딸들에게는 왕처럼 군림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여성들을 졸병처럼 묶어둘 뿐이다. 여성의 지성을 확대함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강화하라. 그러면 맹목적인 복종은 종식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언제나 맹목적인 복종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독재자들과 관능주의자들이 여성들을 어둠 속에 묶어두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재자들은 노예를 원할 뿐이고, 관능주의자들은 장난감을 원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관능주의자들은 가장 위험스러운 독재자들이었고, 제후가 신하들에게 속아왔듯이 여성들은 연인들에 속아왔다. (<여성의 권리 옹호>, 2장 ‘성별 특성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를 논함’)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울스턴크래프트가 강조하는 내용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인간이므로, 여성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한다는 것이었다. 출신이 아니라 재능이나 미덕이 사회적 인정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녀는 세습 재산이나 계급 같은 인위적 차별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性) 또한 여성을 노예 상태에 가두어 결국 아내나 어머니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한다고 봤다. 때문에 여성이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가 되고 여러 직업 활동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참정권까지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울스턴크래프트의 이러한 신념은 <메리>와 <마리아 : 여성의 고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두 작품은 앞서 이야기했듯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인들이 다른 한 여성과의 밀도 높은 정서적 교류를 통해 위로받고 이들과의 연대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메리’의 아버지는 여성이 배우는 것에 늘 반대했고, 자신의 아내가 게으르고 몸이 약해 딸의 교육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편 어머니는 ‘유난히 잘생긴 아들’ 그러니까 메리의 오빠에게 모든 사랑과 애정을 쏟을 뿐, 메리는 안중에도 없다. 오빠가 죽은 뒤 메리가 상속자가 되자 어머니는 그제야 메리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딸을 더는 ‘그 아이’라고 부르지 않게 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메리가 오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존재는 자신처럼 책을 사랑하고 사색을 즐기는 친구 ‘앤’뿐이다. 그녀와의 우정과 사랑만이 메리를 숨 쉬게 해준다. 그러나 원치 않는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녀는 그 ‘무거운 족쇄’가 떠오르면,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앤의 건강 때문에 둘이 함께 요양 여행을 떠나 남편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앤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해하고, 앤에게 집착하는 메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메리, 마리아, 마틸다>, 50쪽)
앤과 이렇게 지내면서 서서히 메리는 남편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게 된다. 남편과의 삶, 그 속박으로 가득 찬 삶으로 돌아가느니 ‘일할 거라고’, ‘노예가 되느니 무슨 일이라도 할 거라고’ 메리는 외친다. 그리고 그녀는 홀로 서서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몸담는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 루소의 <에밀> 등 18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에서 여주인공들은 늘 남주인공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 것을 비판했듯이, <메리>는 온전히 메리가 지닌 합리적 사고, 불합리한 제도와 맞서는 능력, 여러 인물과 교류하며 사고를 넓혀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메리는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이 ‘장가도 시집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울스턴크래프트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얼마나 억압적으로 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마리아: 여성의 고난>은 울스턴크래프트가 작정하고 쓴 듯하다. 이 작품 서문에서 ‘훌륭한 감수성과 지적 능력을 가진 여인이’ 그럴만한 상대가 되지 못하는 ‘남자에게 평생 엮이는 것보다 더 괴로운 상황은 상상할 수 없다’고 밝힌 울스턴크래프트는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는 결혼의 폭정과 같은 것은 고매한 정신의 함양을 방해하므로 여성이 겪는 고난’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서 잘못된 결혼의 불합리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리아’는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힌 신세이다. 정신병원에서도 두고 온 딸 걱정에 늘 고통스럽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이 통탄스러웠으며, ‘여자이기에 더 큰 고통을 겪으리라’ 예상한다. 마리아도 메리처럼 부모로부터 차별받으며 자라난다. 그리고 그런 집안에서 ‘어째서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대체 왜 태어난 것일까?’ 고민한다. 정신병원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세상은 어차피 넓은 감옥이요, 여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아니던가.’ 반문한다. 그런 와중에 정신병원 관리인인 제미마와 가까워지고, 상류층이었던 자신과 달리 하층민으로서 더 기구하게 살아온 그녀의 사연을 들으며 마리아는 억압받는 여성의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에는 여성이 당하는 온갖 고난과 불합리한 결혼 제도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 곳곳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빠는 진정 부모님의 우상이었고, 나머지 가족에게는 고통이었지. 편애의 힘은 정말이지 얼마나 큰지, 오빠에게는 활력과 기지라고 칭찬하면서 내게는 주제 넘는다고 잔인하게 핍박했단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203쪽)
한 여자가 애정도, 존중도 할 수 없는 남자와 혹은 자신이 가정부 이외에는 아무런 유용한 존재가 되어 주지 못하는 남자와 사는 것은 너무나 절망적인 상태이며, 그것을 견딘다고 해도 신이나 인간의 눈에 의무를 다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243쪽)
<마틸다>는 <메리>, <마리아 : 여성의 고난>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결혼 제도를 비판한다거나, 부모로부터 차별받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부재 속에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을 받는 ‘마틸다’라는 여성이 나올 뿐이다. 메리 셸리는 자신의 어머니였던 울스턴크래프트와는 달리 부모로부터 편애를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작품에 그런 점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아들만을 사랑하는 어머니 대신, 오히려 일찌감치 세상을 뜬 어머니, 때문에 이상화된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리고 홀로 남은 아버지로부터 전폭적인 애정을 받는, 또 자기 자신도 아버지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마틸다’라는 여성을 통해 희생자가 아닌 여성을 묘사한다. 주체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인정하며, 그로써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회에 등을 돌리는 매우 전복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욕망하는 주체로서 여성을 그린다. <마틸다>가 세상에 선보이지 못한 채 오랫동안 파묻혀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급진성 때문이 아니었을까.‘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작품을 읽노라면 그녀의 삶 자체가 정치적인 것으로 이어져 이러한 작품들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장남만을 편애하는 어머니가 밑에서 정서적 안정도 누리지 못한 채 여동생들을 돌보며 자랐고 ‘메리’가 ‘앤’에게 의지했듯이 친구 ‘패니 블러드’에게 마음을 열었다. 산후우울증을 겪던 여동생 엘리자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결혼 생활 자체에 있다고 말하면서 별거를 조언하기도 했으며, 패니, 엘리자와 함께 학교를 설립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일종의 여성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하기도 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인권을 가진다고 주장한 울스턴크래프트. 이 당연한 권리를 위해서 오늘도 수많은 메리, 마리아, 마틸다들이 싸우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