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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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쓰여진 2005년에만 해도 단재는 무국적 상태로 있었나보다. 국적 회복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정부를 지탄하는 내용이 많이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2004~2005년에 신채호 국적 회복 운동이 활발이 추진되었고, 2009년에는 결실을 이룬 것으로 나온다. 이회영, 김원봉에 이어 신채호까지.. 한국 근현대사에 이렇게 존경할 만한 위인이 많았다니. 새삼 다시 한번 놀란다.

 

단재는 지식인 혁명가의 전형이다. 위대한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서 언제나 '결벽', '고집불통'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예전에 황금어장에 출현한 유홍준 교수도 단재를 일컬어 '충청도의 고집'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다.

 

단재는 충남 대덕군(1988년 대전에 편입)에서 태어났다. 고령 신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로는 단재말고도 임정 국무총리를 역임한 신규식,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신석구,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한 신백우 등이 있다. 걸출한 애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변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신숙주 역시 같은 가문이라고 한다.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개화 지식인들과 교류 했다. 1905년 장지연과의 연으로 <황성신문>에 입사했다가 황성신문이 폐간되면서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처음에는 논설기자로 일하다가 곧 주필이 되어 신문의 논설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이때 단재의 나이 스물 다섯 내지 스물 여섯이었다.

 

단재는 여성들의 계몽운동에도 힘썼는데, 그 시절에 여성지를 발행하고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단재가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나중에 만함이라는 자가 비밀리에 대한매일신보의 판권과 시설을 통감부에 팔아 넘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단재는 통감부의 유혹을 물리치고 단호히 신문사를 떠났다.

 

또 북경에 머물면서 중국의 한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는데, 어느 날 신문사에서 논설을 임의로 고쳤다는 이유로 집필을 거부했다. 근데 임의로 고쳤다는 것이 조사 하나를 뺀 것에 불과했다. 사장이 수차 찾아와 사과했음에도 질책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조카딸이 친일파와 혼사를 맺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 몰래 잠입한 일이 있었는데, 조카딸이 말을 듣지 않자 의절한다는 뜻으로 손가락 마디를 자르고 돌아왔다.

 

꺾어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단재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인 것 같다.

 

1910년대 국내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한국인 부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배정하여 통고문과 고시문을 미리 통고하였는데, 이것을 작성한 사람도 신채호였다고 한다. 만주로 이주해서는 유적지를 돌아보며 책 집필에 주력하였다. 단재는 "집안현을 한번 돌아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전에 그에 대해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고 문학적 라이벌 관계였던 톨스토이가 그가 죽고 난 15년 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 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만은 남겨두어야 한다'라고 극찬했다. 도스토예프스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 작가, 철학자들이 쪼들리면서,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펴낸 것이 인류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독서와 글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단재를 이야기하며,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한편 단재의 이념 성향에 대해 조동걸 교수는 "단재는 무정부주의자 이기는 해도 단재의 사상을 기왕의 어떤 틀에 맞추려고 하지말고 단재 나름으로 생각해야 단재를 이해할 수 있다. ..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속에서 단재를 찾다가 보면, 단재를 찾을 수 없는, 단재 나름의 길이 있었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많다. 우선 첫째는, 임정은 1919년에 이미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1919년 2월에 위임통치론을 발표했다는이유로 그의 국무총리 선임을 반대하면서, 신채호는 임정 출범과 거의 동시에 임정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출범한 당시에는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였다가 이승만에 의해 정부조직이 대통령제로 개편되었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 아닌가 싶다. <백년전쟁> 1부 '이승만의 두 얼굴'에서 나왔던 얘기 같기도 하고.

 

이회영과 신채호에 얽힌 이야기도 재밌었다.

 

또 무정부주의자연맹 <선언문>은 <조선혁명선언>에 이은 최고의 명문인 것 같다. 사과반 세미나 커리에서 봤던 얘기들이 이 글에 다 녹아있는 것 같다.

 

(370~371) "세계의 무산대중, 그리고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피와 가죽과 살과 뼈를 짜 먹어 온 자본주의 강도 제국 야수군은 지금에 그 창자, 배가 터지려 한다. ... 민중은 죽음보다 더 음산한 생존 아닌 생존을 계속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민중이 최소 수의 짐승 같은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살을 찢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의 군대 까닭일까, 경찰 때문일까, 그들의 흉측한 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는 그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발달 성장해 온 수천 년 묵은 괴물들이다. 이 괴물들은 그 약탈 행위를 조직적으로 백주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의 소득을 분배하려는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지위를 누리고자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제재하는 소위 법률 형법 등의 조문을 제정하며 민중의 노예적 복종을 강요하는 소위 명분, 윤리 등 도덕율을 조작한다.

... 민중이 왕왕 그 약탈에 견디다 못해 반항적 혁명을 행한 때도 있지만 마침내 기개 교활한에 속아 다시 그 강도적 지배자의 지위를 허여하여 '以暴易暴'의 현상으로 역사를 반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곧 다수가 야수들에게 유린당해 온 원인이다."

 

단재는 잡지 발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위체를 발행해 옮기는 과정에서 일 경찰에 적발돼 체포되었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할때까지 8년 동안 심한 노역에 시달리면서 옥살이를 했다. 7년째 되던 해 건강이 악화되자 형무소 당국이 서울의 가족에게 병보석 출감을 통고했으나 친일파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길 수 없다고 이 제의를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쓸쓸하게 혼자 죽어갔다.

 

생전 단재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던 홍명희가 남긴 글이 인상적이었다.

 

"만나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서도 보지 못하고 지냈으니, 만나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보지 못하려나 생각하면 그만이다. ... 단재와 나 사이에 서신 왕복도 그친지가 오래지만 이제는 아주 영원히 그치게 된 것이 전과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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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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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신분은 평민 압도적 다수의 농민과 소수의 도시 상공업자 즉 부르주아와 극소수의 도시노동자로 분화되어 있었다.

 

- 18세기 프랑스 경제가 호황기를 맞이하면서 자본가 계급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상층 부르주아지와 하층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분화를 자극하여 상층 부르주아지는 더욱 더 부유해졌다. ... 부르주아는 현실과 제도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였다. 마티에는 <프랑스혁명사>에서 혁명의 궁극적 원인은 번영 속에서 불거진 계급간의 불균형이라고 말한다. “혁명은 쇠퇴하는 나라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하고 번영하는 나라에서 일어난다. 가난은 더러 봉기를 일으키게 하나 사회를 전복시키지는 못한다. 사회 전복은 언제가 계급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 “혁명 전의 프랑스는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의 지층의 균열 상태와 유사한 것이었다.”

 

- 18세기 프랑스는 대체로 호황기였는데 1775년 이래 불황에 직면했다. 이 불황기에 두가지 정책적 과오를 저질렀다. 첫째는 1778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이고, 둘째는 1786년에 영-불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은 영국에 대한 복수심 같은 원시적 감정에 따른 것이었고, 후자는 영국 공업 제품을 수입하게 됨으로써 프랑스 공업에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의 곡물을 수출함에 따라 곡가가 폭등하였다.

 

- 파리민중에 의한 강제천도의 의미는 바스티유 사건 이상으로 중요하였다. 왕과 의회는 혁명의 인질이 되고 행정, 입법부는 파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 (91년 당시) 혈통의 특권적 지배를 무너뜨린 민중은 이제 돈의 특권적 지배를 오래 참고 견딜 생각이 없었다. 푀양파와 같은 보수적 부르주아는 헌법의 제정으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민중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 91년 헌법은 인민주권의 원리를 지나칠 정도로 널리 적용하여 입법부는 물론 사법부와 지방자치제에 이르기까지 선거제를 채택했으나, 국민을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으로 양보하여 능동시민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짓이었으며 인권 선언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

 

- 당통파 숙청후, 혁명정부의 재건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이었으나, 혁명정부의 독재는 대중적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혁명당국과 상퀼로트의 직접적이고 우애적인 접촉이 없어지고 공포정치의 관료주의가 곳곳에 침투하여 혁명의 활력소가 메마르고,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 사라져 어용신문만이 메아리 없는 함성을 높이고 이에 대하여 비판적인 많은 언론인이 사형에 처해졌다.

 

-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파가 처형당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프랑스의 민주공화주의를 100년간 후퇴시켰다. 테르미도르파의 지배하에서 뒤늦게 그 쿠데타의 성격을 깨달은 노동자들이 최고임금제 부활을 위해 봉기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프랑스 혁명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나폴레옹의 제정과 부르봉왕가의 복위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 산악파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철저한 민주적 공화국의 건설을 명확히 자각하여 중요한 3대 목표를 내세웠는데, 그 3대 목표란 조국의 방위와 혁명의 수호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177~179) 이 목표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미치고 있는 영향...

 

“산악파가 정권을 담당한 시기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연합하여 인권의 나라 프랑스의 국토와 국민공회가 세운 공화제도를 위협한 시기였다. ... 그러나 산악파의 정권은 1년 미만에 적군을 물리쳤다. 공화국 프랑스가 유럽의 모든 인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주려던 꿈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으나 제 힘으로 제 나라를 훌륭히 구출할 수는 있었다. 자코뱅파는 무엇보다도 먼저 애국자였다. 그들에게 민족자결의 권리란, 제 손으로 세운 공화국을 제 힘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1870년 독일의 침략을 받고 강베타가 철저한 항전을 외치면서 프랑스 국민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 했을 때 그가 믿었던 것은 바로 이 자코뱅의 애국적 전통이었다. 조국 방위라는 자코뱅적 전통은 그 후에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자코뱅파는 조국 방위의 어려운 일을 수행하면서 국내의 완강한 반혁명 세력을 타도하려고 했을 때 스스로의 원리에 거역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자유의 수립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혁명이 자유의 가면을 쓴 적의 음모에 희생당하려 했을 때, 혁명 정부는 공화주의와 자유를 구출하기 위하여 자유가 수립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자코뱅의 독재정치는 일시적, 잠정적인 것이었다. ... 자유의 억압을 정당화할 만큼 자유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을 무엇일까? 국민공회와 자코뱅의 전통은 그 기준을 대외전쟁이라는 명백한 사실에서 찾았는데... 이처럼 자코뱅적 전통이 남긴 독재의 특성은 자유의 일시적인 억압이라는 정당성의 기준이 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는 사실이다. ... 방토즈법은 대담한 토지 재분배에 의하여 아무리 비천한 국민에게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하게 하려고 하였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민이 저마다 소생산자인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자코뱅의 신념이었다. ... 자코뱅의 민주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제한한 독립적인 시민들의 토대 위에 자유를 수립하려는 것으로서,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이었으나 재산의 평등 따위의 비현실주의로 달리지는 않았다. 다만 재산의 격차가 민주주의 건설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소유의 극단적인 불균형이나 무산 시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시민은 정치적으로 시민 구실을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시민이 광범히 존재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할 것은 명백하다. ... 이러한 제한적 평등주의의 이상은 자코뱅적 전통에 일관하여 흐르고 있다. 이 전통은 프랑스 사회주의에 깊이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민주주의 이상에도 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792년,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 나폴레옹의 사회정책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농민과의 관계였다. 프랑스 혁명이 전형적인 시민혁명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농민 혁명이 가장 광범하고 가장 철저히 수행되었기 때문인데, 나폴레옹은 농민 혁명의 결과를 잘 보호하였다. ... 따라서 농민은 나폴레옹을 싫어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 얻은 농토를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안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사력이 등장하기 이전에 농민은 항상 자신의 새 토지에 대하여 불안해했는데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 그만큼 농민은 나폴레옹에게 고마워했고, 또 그만큼 보수화하였다. 농민의 보수화야말로 보나파르티즘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 대륙봉쇄는 그 자체가 모순에 가득찬 억지였다. 이 억지를 지탱하는 힘은 오로지 나폴레옹의 군사적 지배력이었다. 총칼이 순리를 이기지 못함은 만고의 진리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지배력이 이 억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거기 그의 몰락의 궁극적 원인이 잠복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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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으로 가다
박민규 지음 / 어진소리(민미디어)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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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이틀째, 선교장 답사 일정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서 시립도서관에 왔다. 가방 속에 있는 책 말고, 지금! 이곳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가에 들어가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수첩에 빼곡히 적어두었던 책 이름이, 정작 필요한 순간임에도 생각이 안 나는 거다. 한국 소설 코너의 책 분류가 저자의 이름 ㄱ,ㄴ,ㄷ 순으로 되어 있길래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성석제, 공선옥, 박민규, 황석영이 생각났고,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읽고 싶어졌다. 재밌다는 얘기를 여러번 들었었고, 어쩌다 먼저 읽게 된 박민규의 다른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무지 재밌어서 다른 소설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무엇보다  최근에 박민규를 기억에서 끄집어내게 된 특별한 계기기 있었던지라...

 

서가를 뒤졌더니, 하필 박민규의 책 중 하필 그것만 없다;; 성석제와 공선옥의 다른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태양으로 가다>라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의 책, 일단 전체 분위기가 심각하고 우울하면서 소재 자체는 좀 독특하고 기발하다. <마지막 팬클럽>의 분위기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박민규의 세번째 소설이라는 이 <태양으로 가다>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 고독, 소외, 자기 파괴의 심리는 <파반느>의 또다른 주인공에게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한권을 거의 다 읽어갈 때 쯤 되면 남은 페이지 수를 헤아리게 되는데, <태양으로 가다>는 마지막 장을 읽는 순간까지 호흡이 쭉 이어지게 하는 긴장감이 있다. 다만 결말이 좀 허무하다는 점에서 <파반느>보다는 완성도가 덜 하다는 생각이 든다. 통속적인 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차 고립되고 소외되어 가다가 자기 부정에까지 이르게 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이 설정한 상황과 주인공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충격적이다.

 

주인공 조영하는 자기 귀를 자르려던 결심을 포기했고 결국 '고흐'가 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결말은 결코 희망적이진 않지만,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꿈꾸게끔 기대 혹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아하게도.. 좀, 위로가 되는 소설인 것 같다. 이런 현실적인 소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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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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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때 먼 이국땅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해방 전이나 후나 오로지 통일 전선,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남한과 북한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던 김원봉. 혁명가, 독립운동가의 최후가 대부분 쓸쓸하고 비참했듯 28년 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만을 해왔던 김원봉 역시 북한에서 숙청당했고 친일파 이광수도 죽어서 가진 무덤 조차도 남기지 못했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은 해방되기 직전 왜놈 총에 맞아 사망했고, 밀양에 살고 있던 가족들은 6.25전쟁 중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살당했다. 친일파, 자치론자, 외교론자 등이 민족주의자로 둔갑해 미국의 비호 아래 권력을 잡아가는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순수한 자들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통일정부수립과 반이승만 노선, 월북과 북한 고위직 역임,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의 ‘과격 사상’으로 인해 온전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주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던 당시 김원봉은 공산당계열로부터 여러 차례 합류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세력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원봉은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어떤 단체나 국가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유연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념체계만은 아나키즘 성향의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다시 읽게 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정말 명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으면서 감동도 있다. “...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라는 부분에선 박근혜 당선자가 잠깐 생각났고..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는 부분을 지금의 정치가들 모두가 같이 읽고, 느끼고 반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김원봉뿐만 아니라 의열단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의열단을 무장단체 중 하나로 생각했었는데, 임시정부에 이어 두 번째로 활동기간이 길었을 뿐만 아니라, 단원들이 보여준 희생, 헌신은 임시정부를 능가했다. 대표적인 예로 의열단원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위장하고 부산경찰서 찾아가 서장을 면회, 서장 면전에 폭탄을 투척했다. 서장은 사망했고 박재혁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체포당했다.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박재혁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이 의열단원의 길이라는 신념 아래 고문과 심문으로 쇄약해진 몸으로 단식을 시작했고 9일 만에 순국하였다.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해 활동했던 박용만이 독립운동 진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의열단원 이해룡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또, 중국 관내에서 처음 만들어진 독립군, ‘조선의용대’가 ‘군’이 아닌 ‘부대’라는 위상을 갖게 된 것이 자국에서 외국 군대가 창군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중국 정부의 이해가 반영된 결과였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김원봉은 김구에게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김구는 끝까지 거절했다. 중일전쟁 중 일본군 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중국인 대장의 지도하에 반전운동을 벌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북지역으로 이동해 중국 공산당에 합류하게 되는데, 중국공산당은 의용대원들에 우호적이면서도 김원봉은 마땅치 않아 했고 결국 그의 화북행을 차단했다. 김원봉이 화북으로 오게 되면 중국이 의용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던 거다. 조선의용대의 진로는 중국 국민당,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대결과 이해관계에서 선택되거나 배제되었다.

 

해방이 되었을 때, 한독당 계열에서는 임시정부의 조직을 그대로 갖고 귀국하자는 입장을 내세웠고,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계열은 임시정권을 인민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줄곧 해외에 있었던 임정이란 기구가 국내에서 들어가 인민의 지지를 받는 혁명정권이 되지 못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귀국하느냐의 문제를 두고서도 심하게 대립했다. 약산은 한독당 계열 인사들에게 1진으로 귀국할 기회를 양보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해방 정국에서 김원봉과 민혁당 계열은 3개월 만에 귀국하는 김구보다 한달이나 더 늦게 귀국하게 되면서 설 자리를 더 잃어 갔다.

 

김원봉은 합류한지 4년 만에 임정을 탈퇴했다. 그리고 47년, 전평이 주도한 총파업에 참여했다가 장택상의 지시로 체포되어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나와 꼬박 3일을 울었다고 한다. 고문의 아픔보다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결국 김원봉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되고 신변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면서 월북을 결심했다. 그리고 48년 4월, 38선을 넘었다.

 

김원봉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마크르시즘의 모든 장점을 취한 체제를 추구했고, 월북 이후 6.25때 ‘모시기 작전’으로 납북된 인사들과 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만들어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균등에 기초한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일전선의 상징적 존재였던 김원봉 역시 58년에 숙청되고 말았다.

 

김원봉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이 남한과 북한에 각기 들어선 정부에 의해 이용되고, 소모되었다가 비참하게 버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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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1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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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을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 이슈 이 여섯가지 분야로 나눠 각 백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설명한 책이다.

 

회화와 철학, 특히 철학 파트는 너무 어려워서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버클리, 흄,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니체, 루카치.. 프래그머티즘...ㅠ

 

혼자 책 읽는 방식으로 해선 철학 공부에 조금도 진전이 없을 것 같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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